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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도쿄도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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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90대 내각총리대신 쓰키야마 아키히로 月山明博 | Akihiro Tsukiyama | |
본명 | 이명박 (李明博) |
출생 | 1941년 12월 19일 (80세) |
오사카부 나카카와치군 가미무라 후쿠이도정 | |
국적 | 일본 (1962~ ) |
현직 | 일국회 특별고문 |
재임 기간 | 제15대 도쿄도지사 |
2003년 4월 14일 ~ 2007년 4월 8일 | |
제90대 내각총리대신 | |
2010년 8월 12일 ~ 2011년 5월 4일 | |
링크 | 채널 아키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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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15대 도쿄도지사와 제90대 내각총리대신직을 역임하였다.
상세
일본 내에서 몇 안되는 자수성가형 정치인으로, 재일 조선인이자 부라쿠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도지사직을 거쳐 내각총리대신직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비(非) 일본계 총리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도쿄도 중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를 시작했다.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경제산업성 대신을 역임했다. 도쿄도지사로 재직하고 있을때에는 외국인 참정권 보장, 도쿄도 내 지하철 환승 시스템 개선, 스미다강 복개 건설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로 사활의 위기에 내몰려있던 자유당의 소방수로 투입되어 경제 위기를 최대한 수습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하여 정권을 민주당에게 넘겨줬다.
자유당 내의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리버럴)로도 분류된다. 총리를 지낼때에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경제 위기를 잘 수습하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지지율이 좋지 않았지만, 퇴임 이후에는 자유당의 원로로서 대우받고 있다. 또한 자신을 따르는 몇몇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들로 구성된 일국회(아케호시파)의 명예대표격인 특별고문으로도 재직중에 있다.
생애
중의원 의원
경제산업성 대신
도쿄도지사로서
2003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자유당, 공명당, 민주당, 국민신당의 추천을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한 쓰키야마 의원은 공산당과 사민당의 추천을 받은 현직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를 근소한 표차(45.63% vs 42.96%)로 꺾고 도쿄도지사로 당선된다.
도쿄도지사로서의 지지율은 꽤 높은 편이었지만 정작 2007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민주당과 자유당 양당의 큰 반발을 불러온 외국인 참정권 도입이 문제였다. 사실상 재일조선인 참정권법이라는 비난이 쇄도했고, "조선인 챙기기냐"라는 비판이 자유당 내에서조차 나오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가 직접 책임을 지고 재선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자유당 내에서는 하토야마 구니오가 쓰키야마를 대신하여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정작 쓰키야마를 정책 문제로 밀어냈다는 도쿄도민들의 불만이 증폭되어, 결국 2007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공명당과 사민당이 추천한 무소속 후보인 류시타 라퓨타가 55.7%를 득표하면서 이시하라를 밀어내고 도지사에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총리 시절
2007년, 도쿄도지사의 임기를 끝낸 쓰키야마는 46회 중원선의 도쿄도 제13구에 출마하였다. 당시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출범 이후 5년간 집권하고 있던 민주당 내각에 대한 피로감이 컸던 시기였기에 쓰키야마는 현직 의원 조지마 마사미쓰를 꺾고 중의원 의원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경제산업대신으로 복귀하거나, 혹은 내각 서열 3위의 재무대신으로 지명될 것이라는 설이 돌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배제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와의 개인적인 불화가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와중에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금융 위기가 일어나자, 상황이 어느정도 반전되었다. 자유당의 지지율이 20%대 초반으로 추락하였고, 자유당의 방만한 경제 위기 대응책은 국민적인 분노를 사고 있었다. 결국 당 내에서는 2011년의 총선을 1년 앞두고 쓰키야마를 소방수로 내세워야한다는 여론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렇게 2010년 8월 12일, 쓰키야마 아키히로는 자유민주당의 총재로 선출됨과 동시에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초기 여론은 지지한다는 여론이 58%로, 당시 자유당의 지지율을 감안한다면 꽤 높은 수준이었다. 쓰키야마 총리 역시 의욕적으로 경제 위기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하면서 한때 15%까지 떨어졌던 자유당의 지지율은 30%대까지 올라, 민주당과 접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2011년 3월 10일, 동일본대지진이 터졌을때 쓰키야마 총리가 보인 무능한 대응이 도마에 오르면서 그의 지지율은 다시 하락세를 타게 되었다. 특히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당시 도쿄전력과의 간담회에서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 원전이 실제로 폭발했을 확률은 낮을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하면서 쓰키야마 내각의 지지율은 40%대 후반에서 10%대로 급추락하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일본공산당 소속의 참의원 의원들이 쓰키야마 총리의 개인적인 공금 횡령 의혹을 폭로하면서 자유당의 지지율은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고, 47회 중원선에서 자유당은 호헌선조차 지키지 못하며 참패하고 만다.
총리 퇴임 이후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재선에 도전하는 카미조 토우마 도지사의 지원 유세를 나서면서 오랜만에 정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분전 끝에 카미조 도지사가 석패하게 되면서 빛이 바랬다는 평가이다. 그래도 쓰키야마 총리의 전 지역구였던 도쿄도 제13구가 속한 투표소에서 카미조 도지사가 60%대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쓰키야마의 도쿄 내 영향력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총리 시절 개설한 유튜브 채널인 채널 아키히로에서의 활동히 활발해졌다. 총리 퇴임 후에는 먹방 컨텐츠가 자주 올라간다.
평가
긍정적 평가
도쿄도지사 시절의 정책
대중친화적인 행보
과거사 사죄 및 융통성 있는 외교
부정적 평가
지나친 기독교 챙기기
부정부패, 비리 논란
결국 실패한 경제 위기 해결
권위주의적 행보
과도한 친한(親韓) 성향
논란 및 비판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자유민주당 | 1990 - 1992 | 정계 입문 |
1992 - 1993 | 입당 | |
무소속 | 1993 - 1994 | 노선 차이로 탈당 |
1994 - 2003 | 창당 | |
무소속 | 2003 - 2007 | 도쿄도지사 출마로 탈당[2] |
2007 - | 복당 |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율 (득표수) | 당선 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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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도쿄도 제4구 | 자유민주당 | 73,415 (17.53%) | 당선 (2위) | 초선 |
1993 |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6,795 (14.32%) | 당선 (4위) | 재선 | ||
1995 |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도쿄도 제13구 | 111,578 (47.68%) | 당선 (1위) | 3선 | |
1996 |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9,654 (46.44%) | 4선 | |||
1998 |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5,684 (53.37%) | 5선 | |||
2002 |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7,578 (43.99%) | 낙선 (2위) | |||
석패 당선 | 6선 | |||||
2003 | 2003년 도쿄도지사 선거 | 도쿄도 | 무소속 | 4,437,851 (45.63%) | 당선 (1위) | 초선 |
2007 |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도쿄도 제13구 | 187,085 (57.33%) | 당선 (1위) | 7선 | |
2011 | 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4,465 (46.61%) | 낙선 (2위) | |||
석패 당선 | 8선 | |||||
2014 |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57,871 (48.05%) | 낙선 (2위) | |||
석패 당선 | 9선 |
여담
- 어릴때 많이 굶어서,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식성 탓에 먹방을 굉장히 잘한다. 특히 돌솥에 날계란을 넣은 한국식 다마고카케고한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자기 몫의 돌솥만 준비해놓고 기자에게는 돌솥을 주지 않는 메이와쿠를 저질러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 생김새가 쥐와 비슷하다고 하여, 일본 내에서는 생쥐 혹은 마우스(マウス)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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