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연합국 (승리의 왕관)

제4세계

아메리카 연합국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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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자이르국

니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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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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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콜롬비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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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디스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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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태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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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볼타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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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볼리비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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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스발국
아메리카 연합국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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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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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표어 Deo Vindice
(하나님은 우리의 대변자)
국가 주여, 남부를 지켜주소서
수도 제퍼슨 시티 북위 36° 00′ 06″ 서경 76° 42′ 41″ / 북위 36.001766° 서경 76.711472° / 36.001766; -76.711472
정치
공용어 잉글랜드어
역사
제2차 아메리카 내전  
 • 아메리카 연합국 선포 1963년 6월 3일
지리
면적 1,096,681km2
시간대 AMT (KW-6)
인구
2020년 어림 68,322,640명
인구 밀도 62.29명/km2
경제
GDP(PPP) 2020년 어림값
 • 전체 2조 864억ℳ
 • 일인당 30538ℳ
통화 연합 달러 ($)
기타
ION 3166-1 , CS, CSA
도메인 .sca

아메리카 연합국(잉글랜드어: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도이치어: Konföderierte Staaten von Amerika) 혹은 연합국(잉글랜드어: Confederate States, 도이치어: Konföderierte Staaten)은 북아메리카에 위치한 10개의 주와 1개의 특별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뉴잉글랜드, 아메리카 사회주의 공화국가, 서쪽으로는 서아메리카가, 남쪽으로는 카리브해를 사이에 두고 카리브 연방과 접하고 있다. 아메리카 연합국의 영토는 1,096,681 제곱킬로미터이며, 주로 온대 습윤 기후이나, 플로리다주 남부에는 열대 기후를 보인다. 공용어는 잉글랜드어이며, 백인흑인이 전체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제2차 아메리카 내전 이후 황폐회진 워싱턴을 대신하기 위해 새로 계획된 재퍼슨 시티샬럿, 애틀랜타, 내슈빌, 잭슨빌, 그리고 마이애미 등이 있다. 대항해시대 이전 아메리카 대륙에는 오직 아메리카 원주민만 존재했으며, 서부개척시대를 통해 북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도이치미텔유로파 연합에 의해 패배한 이후 제2차 아메리카 내전을 겪으며 분열되었다. 현재 전 아메리카 합중국의 영토에는 서아메리카 연방멕시코, 뉴멕시코 연방, 아메리카 사회주의 공화국, 뉴잉글랜드 공화국이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재퍼슨 시티이다. 아메리카 연합국은 제4세계를 대표하는 추축국의 맹주국으로 전세계 분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명

1507년, 도이치의 지도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과거 브리튼 식민지 시대에 아메리카 독립선언서에서 "아메리카 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으로 이 나라의 현 명칭이 쓰이는데, 이것은 1776년 7월 4일에 "아메리카 합중국 대표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아메리카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전 합중국의 국호가 확립되었다. 이후 제2차 아메리카 내전을 겪으며 쪼개진 대부분의 나라들은 모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아메리카 연합국", "아메리카 사회주의 공화국", "서아메리카 연방국"이 그 예다. "아메리카 연합국"이란 국호는 남부 맹방 아메리카 연합국에서 따왔으며, 이를 계승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축약형으로는 "Cenfederate States"를 사용하며, "the C.S."와 "C.S.A."도 주로 사용한다.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식민지화

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 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라이히인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라이히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라이히멕시코 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브리튼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아메리카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아메리카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브리튼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바타비아 정착민들이 맨해튼 섬뉴암스테르담허드슨 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청교도, 프랑라이히슈바이츠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니아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아메리카의 역사가 태동했다.

1674년, 브리튼-네덜란드 전쟁 이후 바타비아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브리튼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니아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아메리카 합중국을 이루게 될 브리튼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아메리카의 평균수명은 브리튼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브리튼군이 프랑라이히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라이히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브리튼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독립과 영토 확장

1760년대와 1770년대 초 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브리튼 사이 대립으로 아메리카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모든 아메리카계 국가의 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라이히의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브리튼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브리튼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합중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합중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합중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합중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라이히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브리튼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아메리카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아메리카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합중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 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합중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 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46년 브리튼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합중국은 오늘날의 오리건-로키의 남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아메리카 전쟁에서 합중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 등을 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제1차 아메리카 내전과 산업화

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제1차 아메리카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합중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합중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아메리카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아메리카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아메리카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아메리카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아메리카-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합중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트리코, , 필리핀을 병합했다.

세계 대전과 대공황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합중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아메리카인 대부분은 브리튼과 도이치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아메리카는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1920년대에 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합중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브리튼 해협 봉쇄 작전 중 합중국의 군함과 상선이 침몰되자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도이치는 1942년에 러시아 제2제국을 항복시키며 자원부족을 해결하였으며, 1943년에는 프랑라이히를, 1944년에는 바다를 건너 브리튼 제국을 항복시키며 승승장구했다. 이후 뉴펀틀랜드 해전으로 합중국의 해군을 괘멸시킨 도이치브리튼령 캐나다를 점령하고 아메리카 동부까지 점령한다. 이후 서아메리카 작전으로 캘리포니아로 이동해있던 합중국 정부는 항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