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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旗 | |||
土豪割據以前 | 統一以後 | ||
王朝國家 | 王氏政權 | ||
國號 | 朝鮮 | ||
現在 國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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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要
戰國之世는皇室의神格化를質으로成어진强力한中央集權國家朝鮮王朝國家가崩仒가며數多은地方土豪들이擧고起고(土豪割據)、以後三勢力을中心으로亂世가再編되어(海東三分)、結局에는王氏代政이權力을執게되기까지의時機다。
歷史
土豪割據
朝鮮王朝國家가成立한以後、朝鮮은200年以上全盛期를享仒叱지만、末期로摺어入면서貴族들間의末없는權力鬪ス으로漸次中央政府의地方統制力이弱化하는것을感卩全國의地方官과土豪들은叛亂을起乙欲望을懷기始作했다。9世紀後半入어서、戰國時代가始作되기直前에도旣何次例叛亂이起기도했다。그래도地方에서叛亂이起면朝鮮의禁軍이迅速히出陣해短記間에討罰했기때문에異卩地方으로叛亂의火種가洩는것을防을手있었고朝鮮政府의威信과秩序는危殆롭게나마維持되고있었다。
그러나 9세기 중후반의 장황제 시대에는 지방 통제력 약화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서 금마의 국고는 텅 비었고, 관리를 보내서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했는데, 오히려 이것에 농민들이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주요한 반란은 사벌도에서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이었는데, 이후 정부군의 위엄은 곤두박질쳤고, 해볼만한 싸움임을 깨달은 지방 세력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기 시작했다.
아사달의 통치력을 뒷받침하던 것은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 해상무역과 여기에서 나오는 재정수입이었다. 이러한 구조 하에서는 무엇보다도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인 당나라의 정세가 중요했는데, 그 당이 안사의 난을 비롯한 8세기 초중반 끊임없는 반란으로 서역의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동아시아의 교역은 관무역 중심에서 사무역 중심으로 바뀌어갔고, 급기야는 청해진처럼 아예 민간이 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군사력을 갖춘 무역기지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사달의 해상 패권을 확보해 준 청해진이 대성팔족과 왕실의 권력다툼 속에 해체되었으니 아사달의 해상 활동에는 타격이 올 수밖에 없었고, 청해진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아사달 남해안과 서북해안의 지방세력들은 독립적인 사무역에 나서 재력을 축적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지방 세력들은 혼란 속에서 두각을 갖춘 몇몇 세력들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국가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점차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견훤이 세운 후신라, 궁예가 세운 후고려 그리고 금마 등의 현재의 남경 일부 지역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해씨왕조 세력으로 나눠지게 된다.
금마의 아사달인들은 아무리 지방 통제력을 일거에 잃었을 망정 200년 이상은 통일 삼한을 잘 다스린 정통성과 경험이 있었고, 조카의 황위를 찬탈하고 황위에 오른 소황제 때부터는 기회를 잘 엿봐가며 가능한 수단은 뭐든 해보려 했으며 그래도 남경 일대에서는 세금 징수, 인력 징발 등 그럭저럭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견훤이나 궁예가 월등한 무력으로 삽시간에 구축한 통제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래도 지방의 어중이떠중이 호족들보다는 물적 지배력이 강했다.
海東三分
지방세력의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890년대는 아사달 황실이 그전의 전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시기로서, 전국에 작은 토호 세력이 난립해 치안이 매우 나빴다. 아직 궁예나 견훤도 세력을 크게 일구기 전이라 공식적으로 고려왕 및 신라왕을 자칭하진 못하고 있었다. 특히 둘 중 견훤은 거병 이후로도 10년 동안은 명목상으로는 아직 아사달의 신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여전히 전국 곳곳에 아사달 정부의 영이 전해지고 있었다. 900년이 되면 견훤과 궁예가 여러 토호 세력들을 흡수해가면서 왕을 칭했다. 이를 해동(아사달)이 크게 세 개 세력으로 쪼개졌다 하여 '해동삼분'이라고 부른다.
이 때부터는 주로 후고려~왕씨정권과 후신라 사이의 주도권 싸움 같은 양상을 띄었다. 우벌도(여주, 이천, 충주)의 한강 유역 곡창 지대와 野原 인근 곡창 지대의 생산력과 경제력이 후신라 세력을 받쳐주어 주도권은 늘상 거의 후백제에게 있었고, 군사력도 태생부터 양길과 궁예의 어중이떠중이 군대에서 시작한 태봉 그리고 왕건의 왕씨정권에 비해, 힘을 잃기 전 아사달 정규군의 유산을 보다 충실히 계승한 후신라가 더 강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어쨌든, 궁예의 후고려는 초기에는 기세가 꽤 좋아서 견훤이 손을 뻗히기 전에 한성 쪽 상당 부분을 장악하였고 서해안을 따라 새벌도 북쪽 지역(천안 인근)까지 진출한 것은 물론 북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나아가 벌내(평양) 일대를 수복하기에 이른다. 다만 특기할 만한 점이 하나 있다면 한성 일대는 수월하게 장악했지만, 우리가 왕건 집안의 근거지로 알고 있던 진번도로 진출하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는 것. 여하튼 궁예는 패서 지역을 직접 지배 지역으로 아우르면서 고려란 국호가 부끄럽지 않은 체제를 구축했고, 금관 공방전 끝에 금관을 탈취하고 견훤을 수전에서 박살내어 영역만으로 보면 삼국 중 최대 판도를 이룬다. 당시 금관은 가야 대부터 내려오는 큰 세력이었고, 후신라 입장에서 보면 수도 쇠벌에서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런 지역을 통째로 내줬으니 후고려가 후신라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눈 셈이었다. 게다가 904년에는 왕조국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새벌도 북부 일대(청양~공주)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후신라는 후고려가 장악했던 새벌도 북부 지역을 손쉽게 차지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후신라는 왕조국가의 강력한 남부 방어막 물들도(해남~장성) 쪽의 영산강 유역을 장악하게 되는데, 후고려가 후신라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눴다면 후신라는 여전히 정통성 면에서 아직은 중요했던 아사달 황실의 얼굴에 총구를 겨누게 되어 나중에 왕씨정권과 왕조국가를 여러모로 괴롭히게 된다.
忠意之革
이후, 궁예는 고려라는 국명을 버리고 마진. 태봉이라는 새로운 국명을 사용하였고, 자신을 미륵이라고 자칭하는 등의 지나친 중앙집권화를 진행하는데 이러면서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던 패서 호족들의 인심을 잃었다. 이 중에는 고구려 대족 출신이었던 왕건도 있었는데,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그는 나라의 이름을 다시 고려로 바꾸었다. 그러나 아직 왕건의 전력은 왕조국가와 후신라의 전력을 모두 압도할 만큼의 세력을 채 모으지 못한 상황이였고, 이대로 두 세력을 모두 파해서 간신히 얻은 전력을 예상되다시피 대부분 소진하거나, 그도 아니면 다른 방안을 몰색하느냐의 선택지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우선 아사달 황실을 우호 관계로 삼아 가장 위협이 되는 견훤의 후신라를 공략하기 위해 아사달 황실의 요청에 따라 명목상 아사달의 신하의 지위를 갖게 되며(朝廷立身) 후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 그는 아사달 조정에 의해 高麗王으로 봉해졌다.
政安擊援
우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던 사벌도(상주 인근)의 세력가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했고, 견훤이 한 때 백제의 수도 역할을 수행했던 새벌성(사비성)에서 마침내 승리하자(920), 왕건은 견훤이 금마로 더 진격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구원군을 보내어 고려와 후신라는 본격적으로 관계 악화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여러 전투를 거치다가 924년에 화친하면서 아사달, 고려와 후신라 간의 1차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의 인질, 포로가 의문사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여럿 발생하면서 1년만인 925년 2차 전쟁이 발생하였다. 2차 전쟁 초기에는 후신라가 유리하였다. 소머리(춘천)을 취해 소머리도(강원도 북부) 전역에서 우세를 점하였으며, 그 후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금관을 탈환하였다.
한편 고려는 930년 고타야 전투(고창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후신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인력과 군사력을 크게 확충하였다. 후신라는 이에 반격하기 위해 예성강 전투를 벌여 고려의 수도를 위협하면서 타격을 주었다(932). 또한 견훤은 온골성(전주) 일대를 습격하여 금마를 바로 밑에서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온골성 전투에서 패배한 아사달 왕조국가는 금마를 제외한 영토 전부에 대한 영향력을 사실상 잃게 되었다. 또한 이는 왕조국가-왕씨정권 동맹의 주도권이 완전히 왕씨정권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왕건은 933년 4월 5일 기존의 국명인 고려를 버리고 정민제에게 아사달 왕조국가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代政을 세우면서 아사달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는 아사달 영토 전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하기보다는 차라리 대부분의 지역에서 거부감이 없던 아사달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결과라고 추정된다. 그는 고려왕이라는 칭호는 계속해서 사용하였으나 이후 代君이라는 칭호를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또 934년에는 공산 전투에서 신라군을 궤멸하였다.
이렇게 대세는 아사달 왕씨정권으로 확실히 기울고, 공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신라는 후계자 갈등이 일어나 견훤의 맏아들 견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견훤에게 총애받던 서자 견금강을 죽이고 아버지를 몰아내어 왕위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견신검에게 쫓겨난 견훤은 적국인 아사달에 망명하게 되고, 왕건은 관직을 내리는 등 견훤을 우대했다.
한편, 아사달에 항복한 견훤은 왕건에게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쫓아낸 신검을 응징해줄 것을 요청한다. 결국 왕건은 견훤의 의견을 반영, 936년에 전군을 동원해 후신라의 신검을 공격하면서 일리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후신라는 일리천 전투에서 10만 대군과 전 후신라의 왕인 견훤을 앞세운 아사달에 패배하며 멸망하고 만다.
統一
이렇게 일리천 전투가 발생한 이후 후신라가 멸망하자 아사달이 왕건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왕건은 이후 高麗王이자 아사달 代政의 초대 代君으로서 아사달을 통치했다. 그러나 각지의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영향력을 형성하며 지방의 통치를 대신하는 등 아사달 왕조국가 초기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계를 구축하지는 못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