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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디아 해방전쟁
Eldia befreien krieg

작전 수행중인 6호전차 티거
날짜1948년 2월 12일 ~ 1949년 5월 1일
장소독일령 에르디아
결과

에르디아의 승리

  • 에르디아의 자주권 획득
  • 에르디아 해방선언
  • 독일제국 식민지 독립 요구 시작
교전국

독일 제 2제국

에르디아 독립전선
자유군
지휘관

콘라트 아데나워

헤르만 융어

헤르만 아커만

하이스트 레이스

병력
380,482명 587,412명
피해 규모
12,958명 사망
19,332명 부상
67,583명 사망
129,485명 부상

에르디아 해방전쟁(독일어: Eldia befreien krieg 엘디아 베프라이엔 크리그[*], 에르디아어:Erdia befrein krik 에르디아 비프린 크리크)혹은 에르디아 혁명(독일어: Eldia Umwälzung 엘디아 움벨충[*] , 에르디아어:Erdia revolute 에르디아 리볼루트)은 독일 식민지 독립전쟁의 일부로써, 독일령 에르디아의 독립운동가들이 독일 제 2제국에 대항해 일으킨 전쟁이다. 1948년 2월부터 1949년 5월까지 약 15개월간 진행되었다. 전쟁 결과 독일은 에르디아섬의 영유권을 잃었고 에르디아는 에르디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에르디아 해방전쟁은 제국주의의 종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독일제국이 1차대전 이후 지속되던 절대적 국제 우위권을 잃고 미국,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독일제국은 이후 1970년 에르디아 해방전쟁이 정당한 에르디아 독립파의 요구였음을 인정하였다.

전개

독일령 에르디아(독일어: Deutsche Eldia)는 본래 마다가스카르(독일어: Madagaskar)로, 프랑스군이 먼저 이 섬을 점령하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1919년 상수시 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분단되고 프랑스의 모든 식민지가 독일에 귀속됨으로써 마다가스카르 섬은 에르디아섬으로 개칭되었다. 본래 프랑스와 관계가 좋지 못했던 마다가스카르 주민들은 독일제국의 입성을 반겼으나 이내 입장이 완전히 뒤집어지는데, 사유는 바로 에르디아 학살에 있었다. 1926년 8월 1일 독일 제 2제국의 병사 1000여명이 5개의 마을을 약탈하고 각종 귀중품을 훔친다음 주민 5600여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내 소문으로 퍼지면서 에르디아인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1930년 5월 1일,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종교인 40여명이 모여 독일로부터 에르디아 섬의 독립을 꾀하는 에르디아 독립전선을 창당하였다.

에르디아 독립전선은 소련의 간접적, 직접적 도움을 통하여 성장하였고 1934년에는 이탈리아의 극좌 테러조직 그라쿠스 형제단과 자매결연을 맺어 에르디아섬에서 테러를 일으켰다. 이러한 테러 행위속에서 독일 정부는 전전긍긍하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독일은 에르디아 독립전선에 유화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이 배경에는 1939년 독일 내전으로 독일이 대외 관계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던것도 한목 했다. 그러나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이 수립되자 독일은 다시 강경히 테러에 대응하였고, 에르디아 독립전선도 강도 높은 테러행위를 이어나갔다. 참다못한 독일 제 2제국은 1948년 2월 에르디아 섬 전체에 계엄령을 내리고 제국군을 투입했다. 에르디아 독립전선도 이에 대응해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에르디아 해방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에르디아 독립전선을 이끄는 수장 헤르만 아커만(Herman Ackermann)은 에르디아섬 주요 도시에서 테러를 일으켜 공권력을 마비시키고, 주요 거점인 대도시를 점령하는 방식으로 에르디아섬을 잠식하였다. 전쟁 개시 9일만에 독일령 에르디아 정부는 에르디아섬에서의 지도권을 잃었으며, 24일만에 항복을 선언하고 나미비아로 정부 수반들이 도망가기에 이른다.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제국의 아프리카 사령관이었던 에르빈 롬멜은 당장 강경진압을 주장하였다. 이에 1948년 3월 15일 에르디아 섬 남부에 약 15만명의 독일제국군이 상륙하였다. 이후 30일 뒤인 1948년 4월 14일 또다시 5만명의 군대가 상륙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에르디아 독립전선 - 독일제국군의 전투가 이뤄지게 되었다. 파일:에르디아 전쟁 10개월 경과 에르디아 독립 전쟁은 초반에는 독일제국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시 세계 1위 경제력, 군사력 국가였던 독일 제 2제국 앞에서 에르디아 독립전선은 각종 전쟁에서 패퇴하며 패주하였고, 남부 지역 대부분을 빼앗기기에 이른다. 그러나 1948년 12월 23일 자인스트마르크 전투이후 판도가 역전되어 에르디아 독립전선의 전술에 말려든 독일 제국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현지인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던 에르디아 독립전선의 게릴라전을 독일 제국군이 대응하기에는 무리였다. 에르디아는 섬이었기에 독일제국군이 군수 물자를 보급하기 힘들기도 하였다.

1949년 3월 12일, 독일제국의 제 1 도시이자, 당시 에르디아 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에르디아인들이 에르디아의 독립과 전쟁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였다. 그런데 독일제국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이들을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12명이 죽었다. 이에 격분한 에르디아인 뿐만 아니라 독일 내 좌파진영도 반전시위를 일으켰다. 독일 사회민주당독일 공산당은 동시에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발의했다. 비록 자민당의 반대로 불신임 투표는 무산되었지만, 서구권 대부분의 국가는 이 사건에 대해 충격받았다. 무엇보다 아메리카 사회주의 공화국이 전쟁에 개입할 조짐을 보이자, 독일제국은 5월 1일 모든 전쟁을 중단하고 에르디아의 독립을 허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독립 조약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