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트의 황제
Kaiser von Hart
제1대 하르트의 황제
(초대) 하이케 1세
1591년 4월 11일 ~ 1602년 7월 2일
후임
하이케 2세
하이케 1세 · 하이케 2세 · 메레트 1세 · 루이제 1세 · 메레트 2세 · 메레트 3세 · 루이제 2세 · 엘리자베트 1세 · 하이케 3세 · 메레트 4세 · 엘리자베트 2세
엘리자베트 2세
Elisabeth II
100%
100%
하르트 황제
Kaiser von Hartland
임기 1876년 1월 3일 - 현재
대관식 1877년 6월 18일
전임 메레트 4세
후임 (현직)
하임 국왕
König von Heim
슈타리트 대공
Großherzog von Starit
임기 1877년 6월 18일 - 현재
대관식 1877년 6월 18일
전임 (신설)
후임 (현직)
이름 하인레네 엘리자베트 힐데가르트 마리아 폰 하르트
출생일 1849년 3월 22일
출생지 하르트 하르트 베르하르트
가문 하이드로치엔가
모친 메레트 4세
부친 게오르크 폰 로이에
형제 알베르티네 게오르케 폰 하르트 황녀
디아네 마르티나 폰 하르트 황녀
빌헬름 하넬 폰 하르트 황자
헬레나 힐데가르트 폰 하르트 황녀
학력 미리엔 대학
종교 프리치교
신체 신장 166cm
몸무게 58kg
군사 경력


엘리자베트 2세(독일어: Elisabeth II, 1876년 1월 3일 - 현재)는 제11대 하르트 황제으로 본명은 하인레네 엘리자베트 힐데가르트 마리아 폰 하르트(독일어: Heinrene Elisabeth Hildegard Maria von Hart)이다. 1849년 3월 22일 메레트 4세게오르크 폰 로이에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메레트 4세의 후계자로써 엄격한 후계자 수업을 보내었다. 대전쟁 말인 1876년, 메레트 4세의 뒤를 이어 27세의 나이로 황제로 즉위한다. 대전쟁에서 하르트 제국이 승리한 후 하임 왕국슈타리트 대공국의 군주로도 즉위한다.

즉위 이전

하인레네 엘리자베트는 1849년 3월 22일, 하르트 제국 베르하르트 제겐궁에서 메레트 4세게오르크 폰 로이에 사이에서 태어난다. 당시 메레트 4세는 임신을 위해 게오르크 폰 로이에를 섭정으로 내세워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하인레네는 메레트 4세의 장녀였기 때문에 황태녀로써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당시 하르트는 남부의 모르디종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는데, 모르디종의 여론은 경제 붕괴와 함께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하르트에 대한 의견이 나락을 기었다. 양국은 서로를 견제하며 군비를 팽창해나갔고, 하르트의 국민 정서는 군국주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황실에서 선도해야 했기에 하인레네의 황태녀 교육은 군대와 국제 정치가 주를 이루었다. 4살 때, 하인레네는 교육을 위해 군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그녀는 군대에 대해 강한 호감을 갖게 만들었다.

하인레네가 태어난 지 2년 째인 1851년 10월 8일에는 그녀의 동생인 알베르티네 게오르케 폰 하르트 황녀디아네 마르티나 폰 하르트 황녀가 태어난다. 그리고 1년 뒤에는 디아네 마르티나 폰 하르트 황녀가 태어나는 등 그녀의 놀이 친구는 풍족하였다. 빌헬름 하넬 폰 하르트 황자헬레나 힐데가르트 폰 하르트 황녀과는 각각 5년과 6년의 나이 차이가 있던 만큼 놀이 친구 보다는 동생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하인레네가 5살이 되었을 무렵, 그녀의 아버지 로이에는 군대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새로운 가정 교사를 붙여주었는데, 그녀가 후에 유명한 군인이자 작가가 될 에리페니카 폰 지크미어의 모친인 크리스타 폰 지크미어였다. 그녀는 마법기병의 장교로써 마법의 재능과 군사적 재능, 거기다 예술을 취미로 두는 등, 하인레네의 이후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할 수 있다. 하인레네는 크리스타 폰 지크미어로부터 전술, 마법, 승마, 플루트 등 많은 것을 전수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10살이 되던 해에 크리스타 폰 지크미어에리페니카 폰 지크미어를 소개해주었는데, 이는 그녀 인생의 최고의 교우 관계가 형성되게 만들었다.

성년이 된 하인레네는 에리페니케를 따라 미리엔 대학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공부한다. 1870년, 하넬레네는 성공적으로 9학기의 대학 과정을 이수한다. 대학 졸업 이후 그녀는 전통에 따라 하르트군에 제1 근위마법울란 연대의 연대장으로 복무를 시작한다. 복무를 시작한지 단 1년 만에 세계는 대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그녀의 제1 근위마법울란 연대는 로트 작전에 참가하여 소소한 전공을 세운다. 그러나 1872년의 토젠 전투에서 제1 근위마법울란 연대가 큰 피해를 입고 그녀 또한 중상을 입음으로써 그녀는 명예연대장이 되어 후방으로 전출된다. 토젠 전투에서의 사건과 그로 인한 후방 전출로 인해 그녀는 큰 트라우마를 지니게 된다. 또한 이때 입은 중상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의 사용에 있어 장애를 가지게 된다.

하인레네가 토젠 전투의 영향으로 후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녀의 에리페니케는 전방에서 전공을 쌓아올렸다. 이는 하인레네가 에리페니케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그녀를 향한 강한 선망을 지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감정은 에리페니케호르셀 공세에서 모르디종 왕국을 상대로 패퇴하는 아군의 후방을 보호하고, 되려 추격하는 모르디종 왕국군을 상대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에리페니케는 전투에서의 승리로 단숨에 영웅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잠시 동안 하인레네와 에리페니케 사이에 오가던 편지가 끊겼다. 끊긴 연락은 반년 가까이 이어지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하인레네는 에리페니케에 대해 더욱 거대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서로 간의 편지가 끊긴지 5개월 째에 하인레네는 에리페니케를 직접 만나기 위해 전선으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메레트 4세게오르크 폰 로이에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녀는 이를 뿌리치고 에리페니케에게로 향한다. 에리페니케와 만난 하인레네는 몇 주간 그녀와 같은 침대를 공유하며 생활하였다. 지크미어는 몇년세에 달라진 하인레네의 행동에 대해 《파도 속에서》에서 "마치 거대한 재난이 지나가고 그 이전과 이후의 차이와 같았다."라 회고하였다. 몇 주간의 에리페니케와의 생활을 마치며 돌아가는 길에 하인레네는 그녀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편지를 보내기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1주 뒤 에리페니케의 편지는 그녀의 손에 다다른다.

즉위

1876년 1월 3일, 메레트 4세대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붕어함으로써 하인레네는 하르트 제국의 제11대 황제로써 즉위한다. 그녀의 대관식은 대전쟁으로 인해 무기한 미뤄졌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큰 불만을 표했으나, 빌헬름 황자로부터 승전 이후 모르디종의 수도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것을 추천하면서 불만은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즉위와 동시에 국가원수(계급)에 오른다. 이로써 그녀는 하르트군의 최고통수권자가 된다. 그녀는 국가원수가 되자 마자 에리페니케를 대장으로 승진시킨다.

엘리자베트 2세는 모르디종의 공세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대학에서 배운 군사학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공세를 계획한다. 해당 공세는 하르트군의 기용 가능 병력을 모두 모은 총공세로, 후방 예비대 또한 투입하기 때문에 도박에 가까운 대규모 공세였다. 계획 단계에서 많은 반대에 부딫쳤으나, 그녀는 체계적인 계획으로 반대 의견을 잠재운다. 해당 계획에서는 제1군의 역할이 중요했으며, 이를 위해 그녀는 고작 4개월 전에 대장으로 승진시킨 에리페니케를 보병대장으로 다시 승진시키고 제1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엘리자베트는 에리페니케와 직접 대면하여 막강한 권한을 인정한다.

1876년 9월, 모르디종의 공세가 종료된지 몇주만에 하르트의 대규모 공세인 엘리자베트 공세가 개시된다. 공세의 이름에 그녀의 이름이 붙은 만큼 그녀는 공세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에리페니케제1군로셀 강 전투에서 모르디종 왕국군을 대패시킨다. 이미 지난번의 공세로 인해 모르디종 왕국군의 내부는 명령 불복종과 하극상이 만연했는데, 로셀 강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모르디종 왕국군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무스당 전투에서는 한 개 연대가 장교를 살해하고 단체로 하르트군에게 투항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단 한달만에 모르디종의 이전 공세로부터 잃은 땅을 되찾고 2달 째에는 모르디종의 제2도시인 디종을 점령한다. 모르디종국민영웅군라는 이름으로 군면제 대상과 어린아이까지 징집해가며 해당 공세에 맞섰다. 그러나 12월의 샤를레옹 전투에서의 패배로 약 50만 명의 국민영웅군은 지휘체계를 잃고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모르셀 전투에서 모르셀의 모든 시민과 그 주변 도시의 시민까지 동원하여 다시 40만 명의 국민영웅군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모르셀 전투에서 국민영웅군 뿐만 아니라 모르디종 왕국군까지 전멸하고 만다. 1877년 1월 18일, 모르디종의 수도, 모르셀하르트군 제1군에 의해 점령되어 에리페니케의 생일 잔치가 열린다. 모르디종 정부는 모르셀이 포위되기 전 할롱으로 탈출하였으나, 1월 28일, 모르디종 왕국군 내 반전파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부가 붕괴되고 항복한다.

종전

모르디종의 항복 이후 몇 개월 후 동부의 뷔레텐라이히와 바다 건너의 세레랜드가 항복함에 따라 7년 동안 세계를 뒤흔든 대전쟁중앙동맹의 승리로 종결된다. 전쟁 초기 하르트 제국의 요구는 더욱 가혹해져서 모르디종을 여러 국가로 해체시키고 뷔레텐라이히 연방국을 해체시킨다. 엘리자베트는 즉위 당시 군부의 제안에 따라 푸르뒹 조약이 체결된 1877년 6월 18일, 모르디종의 수도 모르셀에서 하르트 황제로써의 성대한 대관식과 동시에 새로 건국된 서부의 슈타리트 대공국, 동부의 하임 왕국의 군주로 즉위한다.

1878년, 에리페니케 폰 지크미어 보병대장이 전역을 요청한다. 해당 요청에 대해 엘리자베트와 장교 뿐만 아니라 여러 민간 언론에서도 크게 반대하였다. 그녀는 민간에서 호르셀 전투에서 제국을 구원하고 엘리자베트 공세에서 왕국을 멸망시킨 전쟁 영웅이였다. 이미 여론은 그녀의 보병대장이라는 계급에 대해 불만을 품고 그녀를 야전원수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또한 여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를 야전원수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에리페니케야전원수직을 거부하면서 흐지부지된 사건이 이전에 있었다. 에리페니케 스스로는 군대라는 것에 크게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는 엘리자베트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전역 요청에 대해 엘리자베트는 여러차례 그녀와 사적인 만남을 가지며 그녀를 군대에 남기고 싶어했으나, 항상 에리페니케는 전역을 요청했다. 결국 1878년 7월 19일, 에리페니케 폰 지크미어보병대장으로 전역함과 동시에 지크미어호르셀 남작의 작위를 하사 받는다. 해당 작위도 원래는 후작 정도의 작위를 수여할 예정이였지만, 에리페니케 본인이 이를 거부하면서 남작으로 타협된 것이였다. 여론은 이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해 황실이 직접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세계정치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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