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역사

1898년 무술화변으로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과 황태자 이척이 동시에 독살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제위 계승 1순위였던 이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강은 연호를 천희(天禧)로 개원하고 유길준 등 개혁파 관료를 등용해 급격한 정치·경제·문화 개혁인 천희경신을 추진함으로써 대한국 헌법 제정을 비롯하여 조세 개편, 의원내각제 도입, 용산군기창 건설 등의 성과를 거둔다.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 제국일본으로부터 승리를 거두자, 대한제국은 친러 위성국으로 전락한다. 새로이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된 친러파 관료 이용익은 러시아를 통해 청과 일본을 견제하며 종전의 개혁을 이어갔고, 그레이트 게임으로 러시아와 대립하던 영국과 접촉해 대한제국의 중립국 지위 보장을 요청, 1907년 영러협상을 거쳐 대한제국에 대한 영토 보전·내정 불간섭 원칙을 인정받게 된다.

러시아계 자본의 유입으로 본격적인 산업 육성에 나선 대한제국의 근대화·서구화는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자 이범윤을 위시한 사포대러시아의 묵인 아래 간도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경제 호황을 바탕으로 겸이포 제철소를 세우는 등 본격적인 공업화가 시작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국내 러시아계 자본을 국유화했으며 망명해 오는 백군과 난민들은 함경북도 경성군에 정착하면서 '노비나'로 불리는 러시아인 마을을 형성한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러시아계 기술자들과의 협업으로 장진강·부전강수력발전소가 세워지자 대한질소비료주식회사 공장 등 화학콤비나트가 들어서며 중공업이 크게 발전했고, 간도철도주식회사를 통해 일본과 함께 경쟁적으로 만주 이권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대한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안정되어가던 정당 정치는 급속도로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자 정치권에서는 경제 위기의 책임을 화교에게 향해 신미배화, 평양대학살을 조장해 국내에 체류중인 다수의 중국인들을 학살하는 등 사회·정치적 극단주의가 만연해진다. 그럼에도 여론은 의회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표출했고, 이에 민심을 등에 업은 군부는 1933년 계유정변을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추원을 강제 해산시킨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