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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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코리아
Britis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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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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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 1905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조선 코리아 자치령
국가 신이시여 국왕 폐하를 지켜주소서
위치 코리아 반도
수도 해밀턴 (1862 - 1868)[1]
리버러스터 (1862 - 1868)
맨브룩 (1868 - 1894)
캐피탈 (1894 - 1905)
국가원수 명목상: 황제
사실상: 부왕 및 총독
주요 총독 7대 델라웨어 백작, 레지놀드 새크빌(1862 - 1885)
6대 스펜서 백작, 찰스 스펜서(1885 - 1895)
6대 타운센드 후작, 존 타운센드(1895 - 1905)
언어 영어, 코리아어
민족 영국인, 조선인
종교 개신교, 불교
주요 사건 1852년 거문도 사건
1853년 영국 동인도 회사 조선 지부 설립
1862년 임술농민봉기쿠퍼 조약
1862년 코리아개척법 제정
1894년 농민 항쟁고종 폐위
1894년 영청전쟁
1905년 남만주 사건
1905년 코리아통치법 제정
통화 영국령 코리아 파운드

1862년부터 1905년까지 43년 간 존속한 대영제국의 식민지이다. 인구는 1905년 기준 1,800만 정도로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 두 번째로 인구가 많았다.

역사

영국 동인도 회사 조선 지부

1853년의 영국 동인도 회사 조선 지부 설립 이전에 조선과 영국은 거문도 사건으로 처음 외교적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1852년 거문도(현 해밀턴)을 점령한 영국은 조선에 거문도를 포함한 남해안의 반도의 조차를 요구하였다. 당시 영국은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조선의 거문도 주변 반도에 해군기지를 세워 태평양으로 향하는 최단 기착지로 함과 동시에 동아시아의 비문명 3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조선은 거문도 및 주변 반도에 대한 조차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영국 해군은 무단으로 거문도에 정박한 채로 1년의 시간이 흐르게 된다. 이후 관련 내용을 받아든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문호 개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을 개항 시키기 위한 교두보로 판단하고 거문도와 관련 반도를 조선 정부로부터 6만 5천 파운드라는 헐값에 구매하였다[2][3].

이후 동인도 회사는 조선 지부를 설립하였으며, 조선에서 따로 통화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것을 파악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 파운드라는 새로운 통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가 취급하는 사치품과 대량 생산된 생필품, 싸고 질 좋은 식자재 등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동인도 회사 파운드가 필요했으며, 조선의 고위층과 해밀턴 지구(거문도 주변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도 파운드가 조선의 한 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특히 동인도 회사는 당시 세도 가문이던 안동 김씨에 자금을 대며 철종의 동인도 회사 무력화 시도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하지만 1857년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 항쟁으로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의 모든 권리를 청산당하면서 주 사업장이 조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임술 농민 봉기

1862년 2월 진주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동인도 회사는 농민군에 싼 값에 화승총을 팔아 치웠다. 그리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현할 태세가 보이자 각 농민군에 동인도 회사는 농민군을 지지하며 언제든지 대영제국 해군이 도와줄 수 있다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5월에 전국적 사태로 흘러가자 조정은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농민군의 무장이 사실상 조정의 무장과 대등한 수준이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6월 영국 동인도-중국 함대의 아우구스투스 레오폴드 쿠퍼 제독이 직접 조정에 방문하여 대영 해군이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전하였다. 쿠퍼 제독의 제안에 철종은 이를 거절하려 하였지만, 세도 가문이 이를 뒤에서 수락하고 어새를 통해 영국이 조선을 보호하는 쿠퍼 조약을 체결하였다. 농민군은 보호해준다던 영국 해군의 총탄과 함께 그대로 무너지게 되었다.

쿠퍼 조약에 의해 해밀턴(거문도), 리버러스터(강화도), 맨브룩(인천), 넬슨(나진), 뉴조지(평양), 뉴에든버러(강릉)가 영국의 직접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쿠퍼 조약을 바탕으로 영국은 조선 해안에 대한 자유로운 측량의 권리를 얻었으며, 측량에 대한 대가라는 명목으로 값싼 동인도 파운드를 지역마다 마구 뿌려 대며 조선의 경제를 잠식하고 조선의 통화 가치를 폭락 시켰다.

코리아 개척법 제정과 고종 시대

동인도 회사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장악이 한창인 가운데 영국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코리아개척법을 제정하여 코리아 반도 내의 전략적 거점을 통제하길 원했다. 개척법을 통해 1863년부터 매년 1만 2천여 명의 영국인이 조선의 척박한 강계 지역과 함경도 지역에 정착했다. 대동강 이북과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영국인의 수가 빠르게 불어나 이후 1900년에 들어서는 조선 내의 영국인이 150만 여 명에 육박하게 된다.

1864년 철종이 사망하고 고종이 어린 나이에 조선의 부왕으로 즉위 했다. 하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대신 통치 하였다. 대원군은 영국의 계속된 내정 간섭에 반발하고 다시 이씨 가문이 통치하는 전제왕조로 돌아가길 원했다. 특히 리버러스터[4]에 있는 대영제국 총독부를 본 이후에는 하루 빨리 경복궁을 재건해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조선에 널리 유통되던 동인도 파운드로 인한 경제적 예속화를 탈피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생각한 대책은 바로 조선 통화량을 수 십 배로 늘려 화폐의 거래량으로 압도하여 실질적으로 동인도 파운드가 통화로써 기능할 수 없도록 하여 조선 시장 내에서의 가치를 떨어트리려고 한 것이다. 이런 사고에 기반한 정책을 펼쳐 상평통보에 100배에 해당하는 당백전이 경복궁 중건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지급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매우 안일한 생각으로써 오히려 상평통보를 위시하는 조선의 통화 체계는 당백전의 발행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당백전의 발행으로 아주 잠깐 조선 통화의 거래량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모두 한양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었으며, 6개월 간 쏟아져 나온 1600만 냥의 당백전으로 오히려 시중에 유통되는 상평통보의 가치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며 상평통보의 100배 라는 가치를 조선 정부가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1867년 당백전은 조정의 지시로 모두 회수 되었으며, 사실상 조선의 통화 체계는 완전히 동인도 파운드로 예속화 된다.

흥선대원군의 계속된 실정으로 '코리아'라는 시장 자체의 붕괴를 염려한 레지놀드 새크빌 영국령 코리아 총독이 흥선대원군에게 압력을 넣어 1874년 정치에서 손을 떼도록 조치 하였다. 이 때부터 고종이 실질적인 조선의 국왕으로 통치를 시작한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흥선대원군의 반 서구적 정책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주국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영국의 보호 통치와 총독을 통한 내정 간섭을 극도로 혐오하였으며, 아편 전쟁으로 영국에 이를 가는 청나라와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진 정책을 펼치던 러시아에 물밑 접촉을 시도했다.

청나라와 러시아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조선의 전제군주국화를 지지하였다. 이에 고종은 별기군을 창설함과 동시에 러시아로부터 머스킷과 기술진, 그리고 장교들을 영입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모두 경복궁 내부라는 외국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에서 행해지면서 당시 영국령 코리아 총독은 이러한 조선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지게 되는데, 1882년 구식 군대의 급료를 실물인 쌀이 아니라 사실상 시장에서 죽어버린 상평통보로 지급하며 사건이 시작되었다. 선혜청(宣惠廳)에서 밀린 구식군의 급료를 기존에 분배하던 쌀이 아니라, 시장에 유통되지 않아 대량으로 조정에 쌓여있던 상평통보로 지급한 것이다. 구식 군인들은 상평통보로는 국밥도 얻어먹을 수 없다고 쌀을 요구했지만 선혜청에서 싫으면 받지 말라는 대응으로 나오자 불만이 폭발하며 선혜청을 방화하고 경복궁을 습격하게 된다.

습격 과정에서 질 좋은 쌀을 받아가는 별기군과 훈련 중인 러시아인 장교를 발견한 구식 군인들은 별기군과 장교단을 살해하고 궁전을 점거하였다. 한성부와도 연락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자 별 수가 없던 조정은 당시 영의정 홍순목을 통해 영국령 코리아 총독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영국군이 임오군란에 개입하여 이를 정리한다. 한편 임오군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영국은 조선이 러시아와 교섭을 통해 통제를 벗어나려 했다는 것에 분노하였으며, 고종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총독에게 대외 사무를 이관하였다.

농민 항쟁과 영청 전쟁

외교권을 박탈 당한 고종은 더더욱 청나라에 기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이 청나라와의 관계는 눈치채지 못했을 뿐더러, 청나라는 당시 양무운동을 통해 신식 군대를 재편하며 서구 열강과의 전면전에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박탈된 권한은 외교권 뿐이었지만 사실상 외교권과 함께 내정도 심각하게 간섭을 받아 조선의 백성들은 영국령 코리아 총독부와 조선 정부에 이중으로 과세를 당하고 있었다.

1894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삼남지방에서 전국적으로 확산하며, 조정과 총독부를 위협하였다. 하지만 총독부는 조선의 요청이 있거나 영국의 직접통치령 까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를 방관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무장 대기만을 지시하였다. 또한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해밀턴항에 있던 동인도 함대가 리버러스터항으로 집결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영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청나라에 북양함대와 북양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북양군은 평안도로, 북양함대는 강화도로 집결하게 된다. 윌리엄 케네디 동인도 함대 사령관은 전보를 통해 청나라에 현재 청 함대가 대영제국의 보호국 영해에 무단 침입 중이라고 보냈으나 이는 무시되었고, 북양함대가 대영 해군을 공격하며 영청전쟁이 발발한다.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를 바랬지 청나라와 영국이 싸운 것을 원하지 않은[5] 명성왕후와 고종은 진주로 특사를 보내 농민군과 진주 화약을 맺고 전투를 종료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미 구축함 HMS 코리엔테스가 격침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국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영국은 인도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 함대의 본대를 조선으로 급파하였고, 조선 각지에 주둔 중이던 2만 6천의 보병이 북양군을 막기 위해 뉴조지[6]로 이동하였다.

영청전쟁은 남양함대의 비협조로 인해 북양함대가 격파되고 웨이하이요새를 영국 해군이 점령하고, 뉴조지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며 전쟁이 장기화 되었다. 특히 청나라는 남양함대의 명령 불복종에 대한 대책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궁리하던 일본 함대를 참가 시켰다[7].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당시 영국 본토에서 증원을 위해 아산항에 정박한 HMS 로열 소버린[8]을 공격하였다.

영청전쟁은 순식간에 영일전쟁으로 커졌으나, 영국 본토 함대와 합류한 동인도 함대가 일본 해군을 쓰시마 해전에서 말 그대로 박살 내버리며 승전의 가능성이 없다고 본 일본과 청나라 사절단이 포트 해밀턴을 방문해 종전에 합의하였다. 해밀턴 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또 청나라는 영국에 랴오둥 반도의 일부,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팽호 열도를 할양하고 고평은 2억 냥을 7년 내에 배상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 역시 류큐 열도를 포함한 태평양 대부분의 섬 식민지 영유권을 영국에 할양 하였으며 4750만 파운드[9][10]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토해내야 했다.

또한 영국은 이 사건을 결국 영국이 아닌 타국에 도움을 요청한 고종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으며, 1895년 고종을 폐위 시키고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영국령 코리아는 총독에 의한 통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수도 역시 맨브룩에서 조선의 옛 수도였던 캐피탈로 이전하였다.

남만주 사건

영청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식민패권 강화는 자명한 일 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랴오둥에서 출발하는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따냈으며, 코리아 식민지 경영은 영국의 점령 이후 40년 만에 흑자로 전환되었다. 특히 상품 시장으로써의 값어치가 캐나다 이상으로 높은 데 반해, 유지비는 캐나다의 10분의 1 수준이었기 때문에 영국에게 있어 코리아는 노른자위 땅이었다. 게다가 조선이 금광이나 은광 등 지하자원에 대한 개발이 심각히 뒤쳐져 있던 것이 드러나면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흔히 말하는 코리아 드림을 안고 영국에서 코리아로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편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화단 운동 등으로 불안한 중국 정세를 틈타 러시아가 만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특히 15만 대군을 만주에 진주시켰으며, 영국 동인도 회사의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영국령 코리아 총독에게 코리아를 분할 점령하자고 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1905년 남만주 철도 부설에 사업권을 가진 영국인 자본가가 러시아령 뤼순항에서 암살되었다. 배후에 러시아가 있을 것이라 확신한 영국 해군은 리버러스터의 코리아 함대를 급파하여 러시아령 뤼순항을 급습 점령하면서 남만주 사건이 발생한다. 압록강 전투, 봉천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한 영국은 발트해에서 출발한 러시아의 발틱 함대만 무력화하면 전쟁이 끝났음을 이해하였다.

어리석게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출발한 발틱 함대는 발트해를 벗어나지도 못한 유틀란트 해협에서 영국과의 대해전을 치루고 사실상 소멸하면서 러시아는 전쟁에 대한 의욕을 잃고 평화를 제의하였다.

1905년 영국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코리아에 대한 완전하고도 확고한 통치권을 확보한 영국은 정식으로 코리아를 영연방에 편입하고 자치권을 부여하는 코리아통치법을 제정하여 코리아 자치령을 설립하였다.

각주

  1. 태풍이 부는 7~8월이 되면 수도 기능이 리버러스터로 이전
  2. 현재 880만 파운드, 한화 약 135억원.
  3. 동인도 회사의 주된 논리는 우리는 나라가 아니고 개인 회사이며 영국과는 오히려 경쟁 관계라는 주장이었다.
  4. 7~9월에만 사용되는 임시 총독부
  5. 언젠가는 영국을 청나라의 힘을 빌어 밀어내려고 했지만, 시기가 조선이 아예 준비가 안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놀랐다. 물론 함대와 군대를 요청했으면서 전쟁으로 격화될 거라 보지 못했던 근시안적인 조선의 생각이 문제였다.
  6. 과거 평양
  7. 대가는 조선 공동통치령으로 알려져 있다.
  8.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9. 2020기준 62억 8680만 파운드, 한화 9조 5800억
  10. 이 전쟁으로 일본은 부채 상환에 따른 초장기 불황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투표권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