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

  1939: Erster Weltkrieg by Ernst |  데스크톱  크롬  벡터 스킨 지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헝가리 혁명의 일부

독일 제국으로부터 보급된 장비를 착용한 주데텐란트 시민군
날짜1923년 2월 12일 ~ 1925년 2월 16일
장소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결과

1925년 프랑크푸르트 협정의 체결

교전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슬로바키아인
트란실바니아 해방전선
주데텐란트 독일인연합
헝가리 왕국 헝가리 왕국 (1924-)


독일 제국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헝가리 공화국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보헤미아 왕국
세르비아 보호령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인


프랑스 프랑스 제3공화국
폴란드 폴란드 제2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1924)
지휘관

오스트리아 제국 카를 1세
밀란 호자[1]
율리우 마니우[2]
루돌프 폰 아우엔[3]

헝가리 왕국 호르티 미클로시

헝가리 공화국 쿤 벨러
카렐 크라마르[4]

알렉산다르 1세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삼국 동맹 1882년
러불 동맹 1894년
제1차 대양함대법 1898년
제2차 대양함대법 1900년
영불 협상 1904년
러일 전쟁 1904년 - 19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 1906년
제3차 대양함대법 1906년
영러 협상 1907년
제4차 대양함대법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 - 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 1912년
제5차 대양함대법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7월 위기 1914년 7월
제3차 발칸 전쟁 1914년 - 1915년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년 - 1917년
제6차 대양함대법 1916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적백 내전 1917년 - 1922년
제7차 대양함대법 1922년
방공 협정 192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년 - 1925년
러시아 내전 1924년 - 1926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1925년
제4차 발칸 전쟁 1926년 - 1927년
제8차 대양함대법 1928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930년 - 1931년
세계대공황 1931년 - 193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제2차 러불 협상  
제2차 영러 협상 1935년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1936년 - 1937년
스페인 내전 1937년 - 1939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룩셈부르크 위기 1938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할힌골 전투  
독-일 조약  
9월 폴란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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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또는 제국 내전(독일어: Bürgerkrieg des Kaisertum)은 카를 1세 지지자와 제국 내의 독일인들을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와 헝가리의 총리, 쿤 벨러를 중심으로 헝가리 공산당,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한 좌파 반란군 사이에 있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내전이다.

1923년 2월 12일, 부다페스트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 공산당 사병들이 시내의 라디오 방송국을 탈취, 헝가리 독립을 주장한 것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반란을 진압하려는 공통 육군(일반 군대, KuK)과 란트베어(KK)에 반해 혼베드(Ku)을 중심으로 각 구성국의 독립주의자, 좌파인사들이 대항했고, 이후에는 독일 제국이 제국 내 독일인을 지원했고, 프랑스가 이를 견제하고자 헝가리를 지원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접경국은 혁명의 여파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주면서 국제 대리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후 1925년 2월 16일, 제국의 구성국 대다수가 독립 선언을 하자, 독일 제국의 중재로 프랑크푸르트 회의가 열리면서 끝마쳤다. 이 내전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이 내전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었다. 독일인이 우세한 -공식적으로 제국의 밖이었지만, 암묵적으로 제국의 일부였던- 리히텐슈타인주데텐란트, -독일 연방에 속해있었던- 오스트리아 지역은 독일 제국에 합병되었고,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폴란드에게 합병되었다. 세르비아 보호령은 내전으로 독립한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몬테네그로와 함께 연방 정부를 구성했고, -제3차 발칸 전쟁으로 잃었던- 제국령 세르비아를 합병했다. 보헤미아모라바 지역은 하나의 국가로 독립했으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사이의 완충지로 독립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달마티아 왕국크로아티아로 분리되어 각각 독일 제국과 헝가리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배경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

1906년 포포비치가 제안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구상 지도

20세기 초반 이중 제국 형식을 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독일인헝가리인(독일인, 헝가리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44%를 차지했음)이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과 같은 소수 민족은 권력을 잡지 못했다. 특히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거주하고 있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자치권 행사가 제한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의 귀족과 헝가리의 귀족이 1867년에 있었던 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를 통해 수립된 다민족적인 제국이었지만 빈번한 시위와 폭동, 테러로 인해 불안정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급진적인 개편을 추진했다. 그가 제시한 개편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을 민족적, 언어적 구분에 맞춰 분류하고 구성국마다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는데 이는 서로 다른 민족이 갖고 있던 권력, 권리의 행사에서 균형을 맞추고 민족적, 언어적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해 헝가리의 귀족들은 헝가리가 영토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계획은 큰 차질을 빚었지만, 대공의 계획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제외한- 소수민족 정당과 정치 인사 사이에서 이미 상당 부분 이야기 되어왔기에 1916년에 즉위한 카를 1세 또한 합중국 개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런 카를의 행보에 헝가리의 귀족은 빠르면 1920년대 중으로 비헝가리 민족들에 대한 지배권과 제국 내 민족적 특권을 빼앗길 것을 크게 우려했다. 그들은 혹여나 일어날 권리 박탈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소수민족의 급진 독립주의자들을 계속해서 지원해주었다.

러시아 혁명의 여파와 공산주의의 망령

1922년,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적백 내전이 마무리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출범했다. 이들은 제3인터내셔널로 알려진 국제 사회주의 단체를 통해 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발시켜 독립적인 사회주의 정부를 꾸리는 것을 지원했다. 그 결과 헝가리 내에서 헝가리 사회민주당의 세력 또한 크게 늘어났다. 그들은 1920년 선거에서 헝가리 내에서 두 번째로 영향력 있는 정치 단체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친볼셰비키파이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특사였던- 쿤 벨러를 중심으로 헝가리 혁명군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헝가리의 사회주의 전환에 있어, 첫 번째 과제는 헝가리의 독립이었다. 당대 인터내셔널의 영향을 받은 다수의 좌파 인사들은 공산주의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독립주의자를 겸했다. 따라서 이러한 행보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헝가리 귀족의 눈에 들었다. 비록 귀족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양립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제어할 수 있을 만큼만 헝가리 혁명군을 키우는 것이 이점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애초에 그들은 -'혼베드'로 불리는- 헝가리 정식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기에 독립 이후 혁명을 진압하기란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헝가리 사회민주당의 입장에서도 혁명군을 확충하고 선전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자금을 -그들이 알 수 없는 경로로- 확충할 수 있었기에 나쁜 일은 아니었다.

헝가리의 이권 투쟁에서 헝가리 귀족의 계획

헝가리는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에 이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른바 특권 국가였다. 그들은 슬로바키아 인과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폴란드인을 왕국 아래에 두고 군림할 수 있었고, 정식적인 헝가리인을 위한 군대(Ku)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합중국으로 제국이 개편되면 이러한 특권은 해제되고 지배 하에 있던 민족들에게 특권을 나누어야 했다. 가장 먼저 영토부터 줄어들 것이고, 인구, 투표, 군대 모든 부문에서 특권이 해체될 것이란 건 자명했다.

따라서 헝가리는 특권 민족의 힘으로 그들의 주군카를 1세의 계획을 저항해야 했다. 또는 이전과 비슷하게 -대타협을 이끌어냈듯- 헝가리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압박하는 것이 방법이었다. 이마저 오스트리아에게 저지된다면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그들의 이권을 위해 제국의 탈을 벗기에도 충분했다.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경제적 인프라는 -이전과 달리- 오스트리아에 뒤쳐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합중국이 선포되면 즉시 그들이 가진 영토를 온전히 독립국 헝가리로 가져오기 위해 투쟁할 것을 각오했다.

내전 경과

부다페스트 혁명

헝가리의 독립은 헝가리의 귀족들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 혁명군이 직접 소총을 보급받고 무장했다. 이후 1923년 2월 12일, 그들은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첫번째로 개국한- 라디오 방송국을 접수했다. 이와 동시에 역사 깊은 전화신문사인 히르몬도 전화국도 습격하여 장악했다. 그들은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오스트리아의 억압을 받은 모든 민족과 사회주의자에게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당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게 -뒤늦게라도 제한했지만- 상당히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파장은 제국 전체에 막대하게 퍼졌다.

그러는 동안, 부다페스트 경찰서는 -불법 무력 행위를 일삼는- 헝가리 혁명군에 대항하여 투입되었지만, 이미 소련과 귀족들에게 상당한 자금을 받아 확충된 혁명군을 진압할 수 없었다. 약 2시간 동안 이어진 경찰과 혁명군의 대치는 혁명군이 경찰의 방어선을 타개하고 철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헝가리의 귀족은 독립 선언이 있은 지, 이틀 동안 상황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오스트리아의 정치 인사들에게 추궁받았고, 그들의 독립 진위를 가리기 위해 상당한 양의 전보가 오갔다. 다만 정확했던 것은 이미, 제국 내에서 소련의 물자로 무장한 혁명군이 몇몇 중심 도시의 치안을 마비시키고 장악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프라하, , 그라츠, 린츠, 브루노, 사라예보, 베오그라드와 같은 대도시에는 이미 오스트리아의 '일반 군대(KuK)'가 진주하여 혁명군을 몰아내기 위해 총격전이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오스트리아 공산당이 '헝가리 혁명'에 동조하면서 곳곳의 정부청사를 습격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일주일 뒤, 헝가리의 독립 여부는 헝가리 귀족의 침묵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정도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 결과, 2월 21일부터 헝가리 왕국 국경으로 란트베어(KK) 병력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22일, 란트베어가 국경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전해들은 헝가리 귀족회의는 즉시, 혼베드(Ku) 사령부와 쿤 벨러를 부다페스트로 불러들여 회담을 진행했다.

전면전의 시작

1923년 2월 12일 ~ 28일 동안 프레스부르크 공방전이 벌어졌고 헝가리군이 패퇴했다.
1923년 3월 1일 ~ 4월 30일 동안 바이스부룬 방어전에서 양측 주력군이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1923년 5월 1일 ~ 6월 30일 동안 오스트리아 군은 남방 공세와 도나우 공세를 실시했으나, 세르비아인과 헝가리인의 저항과 보급 부족으로 후퇴해야했다.

1923년 2월 25일, 헝가리 혁명군은 공식적으로 혼베드(Ku)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헝가리 전역에 걸쳐서 혼베드 예비군이 징집되었다. 헝가리 내에 자리잡은 우익인사와 왕당파,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헝가리의 사도왕에 충성을 맹세한 제국의 '일반 군대'는 국경을 넘어 갈리치아부코비나 일대로 집결했다. 헝가리의 예비군 소집 소식은 즉시 카를 1세에게 보고 되었는데, 그는 헝가리를 진압하고 제국을 합중국으로 전환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 참모총장이었던 아르투어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황제의 명령을 하달받아 헝가리가 예비군 징집 중인 27일 새벽을 기해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혼베드 사단이 사격을 시작하면서 국경 일대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내전 초반은 헝가리 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대부분의 군은 러시아 혁명불가리아의 부상 이후로 동부 국경의 방비가 강화됨에 따라 국경을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오스트리아 군보다 동원을 늦게 시작했으며,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한 것을 탐탁치 않아했던 많은 귀족 장교들과 오스트리아 출신 장교들이 미온적으로 움직이거나 중립을 선언하여 전력 공백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노이트라에 위치한 제74혼베드보병여단은 슬로바키아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중립을 선언했고, 아 그람에 주둔하던 제83혼베드보병여단은 크로아티아인의 봉기에 발이 묶여 있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11혼베드기병사단은 귀족출신 장교들이 사령부를 장악하고 헝가리 귀족에 반기를 들었으며, 제20혼베드보병사단은 동부 국경에서 루마니아의 침공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이 움직일 수 없었다. 반면, 오스트리아 군은 2월 28일, 독일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2세의 지지를 확인받고 국경 부대도 내전에 개입할 수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강도높은 외교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독일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물론 헝가리도 소련으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비공식적이었고 헝가리 정부와 소련과의 관계는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더욱 원만한 거래는 힘들었다.

프레스부르크 공방전

오스트리아는 그들의 우위를 살려서 빠르게 공세를 진행했다. -이는 보급 문제를 악화시켰지만- 헝가리의 병력가 방비를 갖추기도 전이었기에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영토를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반드시 지키고자 했던 거점이 있었는데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 또는 포조니)가 그곳이었다. 프레스부르크는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관문이자 제5군단의 사령부가 위치하는 요충지이다. 결국 개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월 27일, 오스트리아 제2군단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지역을 지키던 헝가리 부대는 팔 나기(파울 폰 나기) 대령의 제73혼베드보병여단이 유일했다. 수적으로 불리한 헝가리 군은 요새에서 항전했지만, 가망이 없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었고, 그전에 지원올 수 있는 부대는 니트라의 헝가리 군이었는데, 그들은 나기 대령의 지원 요청을 무시했다.

그럼에도 73 여단은 성채 내에서 계속 항전을 계속했고, 3월 1일 오전, 성채에 거대한 폭발과 함께 상당수 병력이 사망하면서 그들은 항복했다.

바이스부룬 방어전

3월 5일에 이르러서 헝가리 군은 프레스부르크를 잃으면서 슬로바키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며, 크로아티아의 헝가리 군과도 연락이 두절되었다. 오스트리아 제2군단은 이후로 계속 진격하여 노이트라에 진주했으며, 라프(죄르)를 포위했다. 남쪽에서 진군한 제3군단슈타인암앵어(솜버트헤이)에서 헝가리 수비대를 격파하고 벌러톤 호 일대까지 진군했다. 헝가리 군에게 그나마 호재는 동부 국경에서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의 대부분을 부다페스트로 집결시켜 오스트리아 군의 수적 우위에서 끌어내리고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한 파르티잔들 또한, 지속적으로 소모전을 벌여 오스트리아 군의 진군속도를 현저히 저하시켰다.

헝가리의 방어거점은 2곳이었는데 오스트리아 제2군단을 타타바녀에서 제3군단을 베스프렘(바이스부룬)에서 각각 돈좌시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것이었다. 각각 대치하는 부대는 대등한 규모였기 때문에 방어하는 헝가리 측이 유리할 것은 당연했고, 오스트리아 군의 피로도는 상당했기에 그들의 전투는 헝가리에게 있어 완벽한 기회였다. 그러나 아르투어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었다. 타타바녀의 방비가 강화된 것을 보고받고 즉시 제2군단의 진로를 남쪽으로 변경했다. 3월 12일, 타타바녀 일대에 포격전이 있었지만, 이는 양동작전에 불과했다. 본대는 이미 헝가리의 두 방어거점 사이에 위치한 세케슈페헤르바르로 진주했다. 헝가리 혁명군은 그들의 진주가 남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채었으나, 일선의 헝가리 장교들이 그들의 정보를 '신뢰하지 못할 것'으로 치부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결과적으로 베스프렘의 헝가리 군은 고립된 처지에 있었다. 결국 헝가리 전군은 베스프렘 주둔군을 구하기 위해 이동해야했다.

제2군단은 훌륭한 모루가 되고 제3군단은 강력한 망치가 될 예정이었다. 3월 18일부터 제3군단의 공격적인 공세와 제2군단의 포격이 베스프렘 일대를 뒤덮었다. 3월 20일이 되어서야 구출 준비를 마친 헝가리 군이 오스트리아 제2군단을 압박했다. 이는 베스프렘 주둔군에 가해지는 포격의 강도를 약화시켰지만, 이미 주둔군은 고지에서 퇴패했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주둔군 사령관인 프리제시 차나디는 결국 22일 밤을 틈타 주 병력을 호수를 건너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헝가리 군의 구출 작전의 포기를 보기좋게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부는 그의 후퇴를 반려했다. 다행히도 헝가리 군의 제2군단에 대한 공세가 이어지면서 탄약 부족으로 오스트리아 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들은 25일에 이르러 호수 남쪽 가도를 통해 후퇴를 시작했다.

30일을 넘겨서야 일대를 평정한 헝가리 군에 의해 주둔군은 구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베스프렘의 고지는 오스트리아 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헝가리 군도 구출 작전을 서두르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리아 군도 상당한 인명피해와 함께 보급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돈좌되었다. 결과적으로 양측이 전력으로 부딪히며 전선은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남방 전역

헝가리 전선은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일대는 여전히 격동적이었다. 특히, 세르비아 보호령알렉산다르 1세가 고토 회복과 남슬라브인의 해방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서 보호령 내의 오스트리아 인사를 모두 감금하며 새로운 국면에 이르렀다. 2개 사단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병력이었지만, 그들을 추종하는 민병대와 반군이 많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4월 20일, 사라예보에 진주할 수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오스트리아는 4월 28일 독일 제국에 중재를 요청하여 이탈리아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알프스 일대에서 제14군단 병력의 절반을 차출하여 라이바흐(류블라나)로 진주시켰다. 다음달 2일에는 아 그람으로 진군하여 제83혼베드보병여단과 접촉하였다. 헝가리 군은 오스트리아 군과 협상을 열어 평화적으로 헝가리 지대로 후퇴하려 했지만, 니콜라우스 이반스카 사령관과 헝가리 장교 몇몇이 부대에서 자리를 비우자 슬라브인 사병들이 탈옥하여 반군과 함께 부대를 장악해버리면서 협상은 물거품이 되었다. 반군들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선언한 5월 5일에서 3일이 지나 오스트리아 군은 아 그람을 포위하고 슬라브 인 학살을 시작했다.

5월 13일 후퇴하던 크로아티아 민족전선은 북진하던 알렉산다르 1세의 군세에 합류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는 현재의 프리예도르 인근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을 집결시켰다. 5월 19일에는 이보 필라르를 주축으로한 보스니아 혁명군이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가 독립을 선언하고 보스니아 지역에서 동원을 시작했다. 5월 22일베오그라드가 세르비아 반군 손에 넘어가면서 제14군단 또한 남진을 강요받았다. 빅토르 단클 폰 크라스니크는 제14군단을 해체하고 3개 분견대로 재구성하여 아드리아 해안, 사라예보, 베오그라드에 전선을 구성할 것을 명령했다. 각각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반군의 사기를 꺾을 수 있는 주요 거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B 분견대는 사라예보에 두 갈래로 진입할 예정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각각 A와 C 분견대와 아드리아 해안과 베오그라드 가도를 따라 같이 움직였다. 이러한 계획은 조기에 파르티잔에게 입수되어 크로아티아 민족전선의 반군은 평야인 잔다르를 버리고 산악지대에 위치한 스플리트에 방어선을 형성했고, 프리예도르에 자리잡은 세르비아 군 또한, 이틀 뒤, 사바 강을 도하하여 가도 북쪽의 고지에 포병대를 배치시켰다.

5월 28일 A분견대가 노바그라디슈카를 통과할 때를 기하여 세르비아 군이 포격을 시작하며 전투는 시작되었다. 세르비아 군의 무장 상태가 빈약했기 때문에 포격은 큰 효과 없이 끝났지만, 오스트리아 사령관이 이들을 쫓아 포제가를 향해 진로를 바꾸면서 함정에 걸려들었다. 산지로 진입한 분견대는 지리적으로 우위에 있는 파르티잔들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받아야했다. 그들의 진군은 4일 동안 이어져서 -그들이 산악 지방에서 징집된 부대였기에 다행히도- 세르비아인 포병대를 괴멸시키고 파르티잔에 유효한 피해를 기록했다. 알렉산다르 1세는 6월 2일 베오그라드에서 끝까지 농성할 것을 밝혔다. A 분견대가 보급 한계에 이르고 있을 무렵, C 분견대 또한, 텅 빈 자다르 시가지에서 파르티잔의 집요한 공격을 견뎌야했다. 6월 말이 되어서야 양 쪽 분견대는 각각 스플리트와 베오그라드 외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후퇴를 결정해야했다.

열강들의 간섭

1923년 9월을 넘겨서는 양측 모두 산발적인 교전만이 있었을 뿐 전쟁에 진척은 거의 없었다. 근본적으로 양측 전쟁 수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내부 갈등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헝가리는 그 정도가 심각했는데, 대다수의 헝가리 귀족이 독립에 회의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불신이 몇 차례 내부 반동으로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으로 헝가리 군과 혁명군 사이의 몇 차례 교전이 있었고 이 때문에 12월 20일, 쿤 벨러가 군경을 넘어 소비에트 연방 측과 협상을 진행하여 헝가리 귀족을 제치고 헝가리 내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오스트리아 또한 내부적 갈등이 다양한 양상으로 번졌는데, 근본적으로 오스트리아 공산당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파르티잔들이 사보타주를 곳곳에서 일으켰고 군사기밀을 노리고 국가시설에 잡입하는 등 문제가 있었고, 정부 내에서도 독일 제국의 개입을 허용하는 인사들과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24년 1월에 이르러서는 양측 모두 외교적인 해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혁명군과 파르티잔에 물자 공급을 담당하는 소련이 눈엣가시였는데, 이러한 물자 통로를 마련할 필요성을 가졌다. 결국, 1월 17일, 독일 제국의 개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양측에 소비에트와 독일이라는 양대 세력의 대리전 양상으로 변질되었고, 1월 20일에는 공산주의와 슬라브 민족주의 확산을 막기위해 불가리아 왕국이, 다음 날에는 트란실바니아 고토 회복을 명분으로 루마니아가 오스트리아 지지를 선언했다. 헝가리 정부는 -대외적으로 사회주의자와 결탁한 탓이었고 전쟁에서 지고 있었기에- 외교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접어들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즉시 2월 1일 독일 제국의 철천지 원수였던 프랑스와 접촉하였고, 갈리치아 분할을 조건으로 신생국인 폴란드과도 접촉했다. 2월 10일에는 영국과도 접촉했는데 즉시 거절당했다. 당일 프랑스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보헤미아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공표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독일 간의 관계는 급격히 준전시 상태에 치달았다. 다음 주에는 폴란드가 비공식적으로 지지를 약속하면서 갈리치아 일대에 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장받았다. 헝가리와 프랑스 간의 지원은 큰 문제가 있었는데 지원할 수 있는 루트가 없었기 때문인데 아드리아 해안은 세르비아 인들에 의해 막혀있었고 흑해로의 길은 오스만이 해협에서부터 통행을 막을 터였고 루마니아나 불가리아가 이를 위해 길을 열어줄 리가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헝가리는 세르비아인의 양해를 구해야했다. 2월 20일이 지나서야 헝가리는 남슬라브족의 독립을 인정하고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슬라비아 일대에 헝가리 군이 주둔했었지만, 내전이 발발하고 중앙지휘소의 명령과는 독자적으로 움직였기에- 이는 다행히도 둘이 직접 전선을 마주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역설적이게도 헝가리의 외교적 노력은 소련과의 관계를 크게 흔들었는데, 폴란드는 소련에게 있어 숙적이자 자국 영토였고, 프랑스 정부는 사회주의를 반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맹임에도 오스만을 지원하여 제13차 러시아 튀르크 전쟁에서 패전 요인을 제공한 통칭 '믿을 수 없는 작자'이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정부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2월 후반부터 점차 안 좋은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3월 중반에 이르러서는 정부가 아니라 혁명군에게만 물자를 조달하는 등 두 정부 사이의 신뢰와 협정은 크게 위협받았다.

보헤미아 전역

1924년 3월 1일 ~ 5월 20일 동안 이루어진 데브레친 공세, 클라우젠부르크 전투로 헝가리의 후방이 오스트리아군에게 노출되었다.
1924년 봄과 여름동안 지속된 남방과 북방의 공세로 인해서 오스트리아군은 방어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헝가리군의 붕괴에도 헝가리는 존속할 수 있었다.
1924년 10월 남방 공세가 생각 외로 주요 요충지의 오스트리아군을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되었고, 이후에 호르티 미클로시에 의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보헤미아 지역의 민중은 크게 셋 중 하나였는데 주데텐란트에서는 친 오스트리아 자경단이 주축을 이루었고, 보헤미아 일대에서는 독립을 원하는 과격파와 자치권 확대만을 원하는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모라비아의 경우에는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부인하는 헝가리의 이중적 태도에 환멸을 느껴 중립 상태에 놓여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주데텐란트의 치안은 큰 변함없이 루돌프 폰 아우엔 독일 국민당 대표를 중심으로 자경 활동을 시작했다. 24년에 이르러서는 자경 활동을 넘어서 보헤미아 온건파를 지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군을 도와 보헤미아 지역을 확보했다. 특히 카를 1세가 내전 이후 체코인들에게 합중국화를 약속했기 때문에 과격파의 인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카렐 크라마르를 포함한 과격파들은 1924년 2월에 이르러서 지지 기반을 잃고 붕괴했으며 카렐과 몇몇 인물만이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망명할 수 있었다.

트란실바니아 전역

트란실바니아 일대는 헝가리에 의해 지속적인 탄압을 받던 루마니아인들이 많아서 헝가리인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내전 초반 그들은 헝가리인들의 동원 명령을 거부하였고 일부는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일부는 민병대를 조직하여 무력 시위를 전개했지만, 트란실바니아 일대는 예로부터 동부 전선의 최전방을 담당했기 때문에 많은 헝가리인 부대가 위치했기에 손 쉽게 진압당했다. 몇몇 경우에 헝가리 인은 민간인을 반군이라고 공표하고 인종 학살에 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 인근에서 지속적인 교전이 있던 1923년 3월 동안 동부 전선에서 대부분의 병력이 헝가리 전선으로 차출당하자 치안 공백이 발생했다. 이에 산악 지방을 중심으로 민병대가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게릴라 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24년에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지원을 약속받고 특히, 같은 민족인 루마니아에게 물자를 지원받아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4월에 이르면 헝가리 군보다 보급 상황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1924년 5월에 이르러서는 클루지나포카 전투에서 헝가리 군을 격파하면서 트란실바니아 일대에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슬로바키아 전역

슬로바키아인들은 헝가리인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독립을 보장받았으나 헝가리의 귀족들은 그 사안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어느 사안이든 슬로바키아인들은 탐탁치 않았는데, 그들은 오히려 제국의 틀 안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자치권을 가지는 합중국화에 더 열려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이트라의 일반 군대가 헝가리 군의 징집 요청을 거부했으며 1923년 3월 프레스부르크 공방전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헝가리군을 격파하자 슬로바키아 임시정부 인사들은 헝가리의 편에 서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군이 임시수도인 노이트라로 진주하는 것을 환영했고 제74혼베드보병여단도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 무장 해제된 뒤, 1달이 지나 재편되어 전선에 배치되었다.

헝가리는 프레스부르크를 잃은 뒤 슬로바키아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그럴만한 여유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임시정부를 설득하려고 애썼으나 1년 동안 그들의 노력은 무용이었다. 오히려 보헤미아 지방에서 안전이 보장된 1924년 3월에는 카를 1세가 직접 노이트라를 방문하면서 슬로바키아인의 참전을 독려했다. 이는 성공적이었는데 이로 인해 1개 군단이 추가로 편성될 수 있었다.

슬로바키아에 잔존한 헝가리인들은 코시체에서 저항을 유지했는데, 이는 갈리치아에 주둔하던 일반 군대가 남하하면서 4월에 괴멸되었다. 5월, 클루지나포카 전투가 시작되기 며칠 전, 슬로바키아의 모든 영향력은 오스트리아에 의해 확보되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남하하여 헝가리의 심장인 부다페스트와 임시 수도인 데브레센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다음 달에는 갈리치아에 후퇴했던 일반 군대와 KK가 합류하면서 3개 군단이 슬로바키아에 주둔했다. 이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한 헝가리 임시회의는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소비에트 헝가리의 정권 장악

1924년 여름에 이르러서 헝가리의 입지는 자국 내에서도 본토로 국한되었다. 그나마 동맹이었던 세르비아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아 그람(자그레브)을 탈환하면서 크로아티아-보스니아에서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남방 전역에 국한된 성적이었다. 헝가리 군은 반군에 의해 트란실바니아에서 사실상 어떤 활동도 못하고 있었고, 밀란 호자가 지휘하는 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편에 붙으면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결국 헝가리 최고 의회에서 폴란드나 소련의 적극적인 참전을 요구해야했다.

7월 12일은 헝가리 군에 전환점이 된 날이었는데, 소련의 지원을 받은 쿤 벨러와 그의 혁명군이 부다페스트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의회에 침입하여 헝가리 총리를 비롯한 정부 인사를 감금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장악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한 쿤 벨러와 일당에 대해 헝가리 군은 새롭게 들어선 정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병은 헝가리 귀족 장교에 의해 지휘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들은 귀족들의 복권이 보장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군과의 교전을 일절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세력에 대항하여 호르티 미클로시를 중심으로 세게드에서 헝가리 군정사령부가 세워졌다.

7월 30일까지 몇몇 부대는 혁명군 소속 사병들에 의해 장악될 수 있었지만, 몇몇 새 정권의 명령을 거부한 군은 미클로시의 편에 붙으면서 헝가리는 양분되었다. 그럼에도 8월 한 달 동안 소련의 지원과 폴란드의 참전으로 그들의 전선은 유지될 수 있었다.

폴란드의 갈리치아 침공

폴란드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뒤에 자신들의 민족성을 위협하던 소비에트 연방이 있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그들은 최대한 빨리 그들의 민족적 영토를 장악한 다음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고 이 난잡한 전쟁에서 손을 털 생각이었다. 따라서 폴란드 군의 침공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내전으로 지친 오스트리아 군과 헝가리 군에 비하면 상당한 규모였다.

8월 3일을 기점으로 폴란드는 -독일 제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갈리치아의 국경을 넘어 3개 군단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주력이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 전선으로 빠진 갈리치아의 제국군을 손쉽게 격파하고 밀고 들어갔다. 프셰미실의 요새는 매우 견고했지만, 포위된 채로 어떠한 역할도 주로 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8월 20일에 이르러서 제국군을 슬로바키아 국경 너머로 밀어내며 갈리치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헝가리가 바라던 것과는 달리 그 다음 주부터는 오스트리아의 주의를 끌어 병력을 분산시켰을 뿐,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않았다. 이는 전적으로 더 이상 독일과의 마찰은 피하고 싶었고, 그 이상 진격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란드 정부는 9월 1일 갈리치아 전역을 확보하고 폴란드의 갈리치아 병합을 두고 국민투표를 진행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전쟁이 더 이상 장기화되는 게 싫었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과 접촉했다. 9월 7일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대표단이 포젠에 모여 협상을 시작했다. 20일, 종내 갈리치아는 상기한 여러 열강들의 묵인하여 폴란드에 병합되었고 폴란드는 10월부터 헝가리와의 밀약을 깨고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헝가리의 사회주의자들의 공분을 샀지만, 폴란드가 2달 동안 참전함으로써 전선의 부담을 덜었고 결과적으로 헝가리 군이 양분된 상황에서도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월부터는 다시 그들 스스로 감당해야했다.

남방 전역의 끝

해안 엄호를 위해 출항하는 오스트리아의 전함, SMS 테게토프

1923년 6월을 끝으로 슬라브족이 주도하는 남방 전역은 사실상 동군연합의 주체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어려웠다. 헝가리와 세르비아의 관계는 1924년, 헝가리군이 쿠데타로 양분되면서 완전히 단절되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미클로시가 이끄는 헝가리 왕국군이 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사이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를 통해 헝가리로 전해지던 군수품은 오로지 세르비아에게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 발 맞추어 아 그람을 넘어 북부로 공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은 그들이 점령한 슬라브인 영지에서 최대한 끌어모은 3개 군단을 이용하여 제국의 자유 도시였던 트리에스테, 크라인 공국의 중심지였던 라이바흐, 오스트리아의 영토 내부의 그랏츠를 향해 10월 15일에 진격했다. 이들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폴란드의 전쟁 이탈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변수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 수행 능력은 방어전과는 전혀 다르게 공세전에서 부족했음이 곧바로 드러났다.

아 그람과는 달리 크라인 공국은 오랜기간 오스트리아의 영지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제14군단은 남방 전역 이후, 세르비아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 빠르게 치고 빠지며 소모시키는 한편 크라인 공국의 방비를 강화했다. 9월에 이르러서 아 그람에 세르비아의 병력이 집중되자 그들은 -폴란드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증원을 요청했다. 이는 폴란드가 더 이상 진격할 의지가 없음이 회담에서 공표된 9월 15일에 승인되어 10월, 세르비아군이 공세를 시작했을 때는 제13군단이 증원되어 참호와 요새를 채웠다.

두 군대는 10월 16일, 이스트리아로 가는 길목인 피우메에서 격돌했다. 오스트리아군은 그들의 해안 도시를 지키는 일에 해군을 동원하는 것에 성공했고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세르비아 군은 일주일 동안 돌파를 강행했지만, 그 누구도 시가지로 진입하지 못했다. 대신 화력에 의해 세르비아군은 상당한 피해를 감내해야했다. 10월 17일에는 제13군단의 외부방어선을 돌파한 세르비아의 주공이 라이바흐와 마르부르크 외곽에 도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2주 동안 세르비아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들의 포병대의 숙련도가 많이 부족했기에- 오스트리아의 참호선을 넘을 수 없었다. 결국 11월 6일, 두 지점 사이에 있는 칠리를 점령하기위해 분견대를 파견했지만, 이들 또한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에 부딛혀 움직일 수 없었다.

공세를 시작한지 1달이 다 되어가는 11월 13일에 생각보다 빨리 세르비아군은 돈좌되었다. 결국 그들은 아 그람 일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는데, 벌러톤 호 남부에 주둔중인 오스트리아 제16사단아 그람을 향한 공세를 펼치면서 세르비아의 퇴각을 힘들게 했다. 다행히 그들의 진격 시도는 아 그람 외곽에서 좌절되었으나 이 때문에 세르비아군은 더 이상 공세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12월 4일에 이르러서 세르비아도 전쟁에서 이탈하기로 결정하면서 이탈리아의 중재를 받아 베니스 회담이 개최되었다. 세르비아가 내전 동안 성공을 이룬 부분은 본래 헝가리인이 통치하던 트란스라이타니아에 국한된 곳이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대해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독일 제국은 처음부터 세르비아인들의 전쟁 이탈을 반겼으며, 프랑스 또한 이들이 발칸 반도에서 친 독일 세력인 불가리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열강들의 동의 하에 오스트리아 또한 이들의 독립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1919년 11월 16일 국군 사령관으로 부다페스트에 입성했다. 그는 관리들로부터 인사를 받고있다. 그는 불같은 연설에서 헝가리 귀족들이 볼셰비키주의자들을 지지함으로써 헝가리를 배신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미클로시 호르티의 복권

12월까지 버틴 헝가리 군은 부다페스트 인근에서도 포성이 울릴만큼 위태로웠으나 그럭저럭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헝가리인들의 독립에 대해 상당수가 지지하고 있었기도 했고, 분리된 호르티의 헝가리군이 어떠한 행동도 없이 관망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클로시 호르티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갈리치아슬라보니아, 세르비아가 이탈한 전쟁에서 승기는 이미 오스트리아에게 기울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서 행동을 취해야했다.

12월 22일, 미클로시 호르티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제국과 접촉하여 오스트리아의 편에 참전하는 대가로 헝가리 일대의 통치권을 약속받았다. 또한 1925년 1월 1일, 프랑스와 밀약을 맺어 헝가리 왕국의 독립과 구성국의 불가분을 인정받는 대가로 헝가리 소비에트를 전복할 것을 약속했다. 이는 프랑스가 헝가리 소비에트의 계속되는 패배와 사회주의자들의 급진적 사상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맥락과 헝가리를 중앙유럽에서 오스트리아를 견제할 국가로 변모시키고자 했던 프랑스의 의도를 충족시켰다.

1월 16일 미클로시의 하수인에 의해 쿤 벨러가 암살되었고, 그 다음 날, 군정사령부는 세게드에서 전 병력을 동원하여 부다페스트로 진격했다. 그 중간에 있던 케치케메트에서 사소한 교전이 있었지만, 호르티의 동조되었던 기존 헝가리 왕국군이 혁명군을 제압하면서 군정사령부에 합류했다. 1월 20일 호르티 군이 부다페스트 방어선의 후방을 열어젖히고 시가지를 장악했다.

1월 30일, 헝가리 소비에트의 잔당이 중부 헝가리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오스트리아 군과 헝가리 군의 휴전이 공표되었으며, 헝가리는 소비에트를 무너뜨리고 호르티에 의해 헝가리 왕국으로 복고했다. 다시 복권된 헝가리 귀족 중 일부는 매국 행위로 군사 법정에 세워졌고 일부는 호르티의 편에서 평화 협상에 선발되었다.

결과와 영향

1925년, 프랑크푸르트 협약으로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분배 계획
프랑크푸르트 협약으로 분해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와 변경된 유럽 국가들의 국경

프랑크푸르트 협정의 체결

1925년 2월 초, 내전의 전후 처리를 놓고 독일 제국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의 대표단이 모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베니스포젠에서 합의한 바에 대해 동의했고, (주데텐란트를 포함한) 독일계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로 남는 것은 빠르게 확정되었다.

문제는 보헤미아 지방과 헝가리에 대한 대우였다. 물론 오스트리아는 두 지역이라도 제국 내에 유지하여 제국의 틀이라도 유지하고자 했지만, 헝가리와 프랑스, 세르비아, 루마니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헝가리는 독립국으로 인정되었다. 어찌 되었든 헝가리는 패배했음에도 독립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의 구성국은 루마니아와 프랑스 간의 대립이 뚜렷했는데, 많은 경우 프랑스가 협상에서 유리했다. 끝내 트란실바니아는 자치주로 헝가리에 남게 되었다. 부코비나 일대는 따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가 전무했기에 그대로 독립국 헝가리에 병합되었다.

마지막 안건은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3국의 문제였는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일대는 체코 공화국으로 독립되고, 슬로바키아 또한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국이 되기로 임시로 결의되었다. 그러나 2월 14일, 제국이 모조리 뜯겨나간 오스트리아 대표와 동맹인 독일 제국이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오스트리아 치하의 자치주로 격하시키기 위해 회의를 재소집했다. 15일까지 이틀 동안 이루어진 마지막 회담에서 절충안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독립국이되 오스트리아와 느슨한 국가 연합의 형태로 존재하는 방안이 제출되었지만, 제국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재확인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국의 흡수되는 편을 선택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정치적 피해를 감내하는 하나의 방안이었고, 독일인들의 통합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역사적, 민족적 소명을 충족시키는 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독일계 오스트리아에 속한 오스트리아 대공국, 주데텐란트, 크라인공국 등과 리히텐슈타인까지 독일에 병합되었다.

16일,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위와 같이 합병되자, 헝가리는 슬로바키아를 다시 자신의 권역에 들이기를 바랐다. 프랑스가 독일 제국의 확장을 용인하는 대가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의 확장을 용인해야 했다. 따라서 슬로바키아는 다시 독립국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영향

결과적으로 헝가리의 기존 세력의 무리한 계획과 헝가리 사회주의자들의 급진적이고 무계획한 독립 투쟁으로 발발된 전쟁은 그들의 몰락으로 끝났다. 그러나 내전 중에 갈리치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달마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과 같은 영지들이 외세에 의해 독립을 선언하고 떨어져 나갔으며, 헝가리 또한 오스트리아 내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합중국화는 물론 재결성도 힘들게 되었다. 나아가 제국 전역에 막대한 인명, 재산 손실로 제국의 구성국들은 피해를 회복하는데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 기회를 통해 중앙 유럽에서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를 각각 견제할 역사적 적성국을 다시 독립국으로 탄생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제국을 무너뜨림으로써 독일의 한 팔을 잘라내는 것에 성공했다. 폴란드 역시 이 기회를 통해 별 힘을 들이지 않고 갈리치아를 합병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의 경우, 더 고단했지만 다시 독립국의 지위에 올라섰고 10년 전 제3차 발칸 전쟁에 본디 되찾았어야 하는 보스니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슬라브인의 국가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또한 독립국이 되면서 세르비아인들은 이들을 장악하여 아드리아 해 전체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발칸의 중견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분주할 것이었다.

독일 제국의 경우, 거대한 하나의 동맹을 잃으면서 유럽 패권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또한, 발칸 반도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등 피해가 많았지만, 오스트리아 일대를 합병하여 독일인의 국가를 탄생시키며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선에서 만족할 수 있었다.

같이 보기

각주

  1. 슬로바키아 국민당/(Milan Hodža)
  2. 루마니아 국민당/(Iuliu Maniu)
  3. 독일 국민당
  4. 국가 자유당/(Karel Kramá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