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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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ᐳ 1 개요ᐯ 1 개요
독일 제국(독일어: Deutsches Kaiserreich 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은 1871년부터 1976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다. 독일 지역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탄생시킴으로써 현대 독일의 모태가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독일의 통일로 성립되어, 장기 19세기 말의 대표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써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라틴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대영제국에 이어 두 번째 규모의 식민제국이 되었다. 이후 유럽에서 열강의 군사적, 경제적 협력체인 국제 연맹의 수장으로 각지에 영향력을 미쳤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기존에 권위 중심적인 군주제 국가에서 완전한 입헌군주제 국가인 독일 연방으로 바뀌었다. 도이체스 라이히(Deutsches Reich, 독일국)라는 명칭은 이 때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연방의 형태로서 다수의 왕국, 대공국, 공국, 후국(공령), 자유시 및 -일정 기간 제국령-으로 이루어졌으나 프로이센 왕국이 제국 면적과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ᐳ 2 역사ᐯ 2 역사
ᐳ 3 정치ᐯ 3 정치
독일 제국의 상부 구조는 표면상으로는 마치 입헌군주제 국가들처럼 입헌 국가의 틀을 수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제군주제를 따르는 전형적인 전제 국가의 모습을 다분히 띠었다. 황제는 이론상 무한의 권력을 지녔으며, '프로이센 군대'는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별도의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의회는 양원제로서 제후들로 구성된 연방참의원(상원)과,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제국의회(하원)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정부의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것은 아니었고, 군주가 자의적으로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연방제를 채택한 연방 국가였었으나, 프로이센의 크기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프로이센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기 쉬웠다.
ᐳ 3.1 독일 황제ᐯ 3.1 독일 황제

Deutscher Kaiser / Kaiser von Deutschland
제국은 공식적으로 프로이센의 영구 의장국 아래 구성국의 연합으로 정의되었다. 연방(Bundespräsidium)의 의장직은 프로이센 왕의 세습적으로 귀속되었다. 1871년 1월 1일부터 프로이센의 국왕은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의 칭호를 추가적으로 획득했다. 따라서 제국의 군주는 프로이센 왕의 직책에 귀속되었다. 이러한 프로이센 왕에 결합된 연방 의장직과 독일 제국의 군주라는 직책은 제국의 헌법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영구적임이 확실했다.
헌법 제 11조에 따르면 황제는 선전포고 (그리고 화친)을 선언하고, 해외에서 제국을 대표하고, 조약과 동맹을 체결하며, 대사를 승인하고 영접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비방위적 전쟁이 선포되는 경우에는 연방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연방의회와 제국의회는 모두 조약을 승인해야 했으며, 비준을 위해 법률적 절차의 승인도 있어야했다.
황제에게는 다음과 같은 다른 권한이 있다.
- 연방의회와 제국의회를 소집한다 (제12조). 연방의회의 소집은 의원의 3분의 1이 요구하는 즉시 소집 되어야 했다(제14조).
- 제국법을 집행하고 공표한다(제17조).
- 황실 관리의 임명 및 해임(제18조).
ᐳ 3.2 제국수상ᐯ 3.2 제국수상
황제는 제국 수상(Reichskanzler)의 도움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수상은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황제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수상은 연방의회(분데스라트)를 주재하고 그 국정 수행을 감독했다. 수상은 자신을 대표할 권한을 연방 참의원에게 위임할 권리가 있었다. (헌법 제 15조)
황제가 정한 법령과 조례는 수상의 공동 서명에 의해 유효함을 인정받았다. (헌법 제 17조)
ᐳ 3.3 연방의회(분데스라트)ᐯ 3.3 연방의회(분데스라트)
연방 의회 또는 연방 참의원 (분데스라트)는 다양한 국가의 대표들로 구성된다 (헌법 제 6, 7조). 독일 헌법에서는 하나의 의회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는 상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영어로 번역될 경우 연방 의회가 된다.
각 구성국은 지정된 투표수를 할당받았다. 구성국은 투표권의 수만큼 연방 참의원에 대의원을 임명할 수 있지만, 각 국가의 대의원은 하나의 블록으로 투표했다. 각각의 구성국은 대의원 정원이 다르게 배정되어 있었으며, 더 크고 영향력있는 국가가 더 많이 보유했다. 투표는 직접 해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 대의원은 구성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특정 주에만 영향을 미치는 법안의 경우 해당 주에서만 투표가 허용되었다. 연방의회 의장은 동수를 깨뜨리고 의결할 수 있었으며, 대의원은 동시에 양원의 구성원이 될 수 없고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1871-1919년 연방참의원의 배분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구성국 | 비고 | 투표권 | 총합 |
1871 | 프로이센 왕국 | 1866년에 합병된 주 포함 | 17 | 58 |
바이에른 왕국 | 6 | |||
작센 왕국 | 4 | |||
뷔르템베르크 왕국 | 4 | |||
바덴 대공국 | 3 | |||
헤센 대공국 | 3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 2 |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 2 | |||
17개의 다른 소 구성국 | 각각 1표 | 17 | ||
1911 | 알자스-로렌 제국령 | 3 | 61 | |
1926 | 니더외스터라이히 대공국 | 6 | 84 | |
오버외스터라이히 대공국 | 3 | |||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 2 | |||
주데텐란트 공국 | 2 | |||
10개의 다른 소 구성국 | 각각 1표 | 10 | ||
1947 | 룩셈부르크 대공국 | 3 | 98 | |
리투아니아 대공령 | 2 | |||
모조비엔 공국 | 2 | |||
로트링겐 공국 | 2 | |||
오버운트니더슐레지엔 공국 | 1표 추가 | 2 | ||
4개의 다른 소 구성국 | 각각 1표 | 4 | ||
1979 | 6개 구성국 탈퇴 | -10 | 96 |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 4 | |||
벨기엔 왕국 | 4 |
ᐳ 3.4 제국의회(라이히스탁)ᐯ 3.4 제국의회(라이히스탁)
의회, 즉 제국의회(Reichstag)의 구성원은 보통선거(25세 이상의 모든 남성 시민의 참정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됨)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비밀 투표는 헌번 제 20조에 의해 보장되었다.
과도적 조치에 따라 총 382명의 의원이 배정되었는데, 바이에른 의원 48명, 뷔르템베르크 의원 17명, 바덴 의원 14명, 마인 강 남쪽의 헤센 의원 6명 등이다(제20조).
법안은 연방참사원 의 결의에 따라 황제의 이름으로 제국의회 에 상정되며, 연방 하원의원 (또는 연방참사 원에 의해 임명된 특별위원) 이 옹호한다 (제16조).
ᐳ 3.5 구성국ᐯ 3.5 구성국


ᐳ 3.6 식민지ᐯ 3.6 식민지


ᐳ 4 인구ᐯ 4 인구
독일 제국이 수립되던 1871년에 약 4100만명 규모였던 독일 제국의 인구는 이 시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서 1910년에는 6500만 정도로 불과 40년 사이에 1.5배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성장의 원동력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다른 국가와 비교해서 상당히 높았던 출산율, 그리고 두번째로는 지배하고 있던 폴란드 일대에서 경제적 풍요를 찾아 상당한 이민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발전과 더불어서 도시화 역시 두드러진다. 2차 산업혁명 동안 대규모로 부설된 철도를 포함해 독일의 섬세한 교통망은 도시로의 접근을 쉽게 하였고, 루르와 같은 핵심 지역의 중공업 산업 발전으로 상당한 노동력의 수요가 생겼다. 그 결과 1871년만 하더라도 독일 제국 내 인구의 36% 가량만이 도시에 거주하였으나, 불과 20년 만인 1880년이 되면 도시화율이 40%를 기록하며, 1910년에는 60%를 기록한다.
지방의 크기에 따른 총 독일 인구의 인구 분포 (1871–19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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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크기 | 1871 | 1875 | 1880 | 1885 | 1890 | 1895 | 1900 | 1905 | 1910 | 1915 | 1920 | ||||||||||||
- 2,000 | 63.9% | 61.0% | 58.6% | 56.3% | 53.0% | 49.8% | 45.6% | 42.6% | 40.0% | 38.0% | 35.7% | ||||||||||||
2,000 - 4,999 | 12.4% | 12.6% | 12.7% | 12.4% | 12.0% | 12.0% | 12.1% | 11.8% | 11.2% | 10.7% | 9.2% | ||||||||||||
5,000 - 19,999 | 11.2% | 12.0% | 12.6% | 12.9% | 13.1% | 13.6% | 13.5% | 13.7% | 14.1% | 14.6% | 14.7% | ||||||||||||
20,000 - 99,999 | 7.7% | 8.2% | 8.9% | 8.9% | 9.8% | 10.7% | 12.6% | 12.9% | 13.4% | 13.9% | 16.3% | ||||||||||||
100,000 - | 4.8% | 6.2% | 7.2% | 9.5% | 12.1% | 13.9% | 16.2% | 19.0% | 21.3% | 22.8% | 24.1% | ||||||||||||
도시화율 | 36.1% | 39.0% | 41.4% | 43.7% | 47.0% | 50.2% | 54.4% | 57.4% | 60.0% | 62.0% | 64.3% |
ᐳ 5 경제ᐯ 5 경제
ᐳ 5.1 초기 독일제국 (~1914)ᐯ 5.1 초기 독일제국 (~1914)
독일 제국 수립 초창기인 1873년을 기준으로 독일 내에서 농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 가량이고,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가량이었다. 하지만 20년 후인 1895년이 되면 농업의 GDP 내 비중은 32%로 감소하며, 중공업이 36% 가량으로 농업을 제치고 독일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군으로 올라서게 된다.
ᐳ 5.1.1 무역과 제조업ᐯ 5.1.1 무역과 제조업
전통적인 경제 주도국이었던 영국의 세계 무역 비중은 1880년에서 1913년 사이 38.2 %에서 30.2 %로 감소한 반면, 독일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17.2 %에서 26.6 %로 증가했다. 1890년에서 1913년 사이에 독일 수출량은 3배가 되었고 1913년까지 세계 제조 생산 분야에서 독일의 점유율은 13.6%의 영국을 누르고 14.8%를 기록했다. 1913년, 영국의 제조업은 3위로 떨어지며 미국과 독일은 세계 철강 시장을 지배했다. 1914년에 독일의 철강 생산량은 1,760만 톤으로 동시기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철강 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1914년 독일의 석탄 생산량 또한 2 억 7,800 만 톤에 이르렀으며, 영국의 2 억 9,200 만 톤에 뒤지지 않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4,700 만 톤, 프랑스의 4,400 만 톤 및 러시아의 3,600 만 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기계, 철강 및 기타 산업 분야에서 독일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을 피하고 대신 무역 협회에 의존했습니다. 독일은 지배적인 기업가 정신, 강력한 관료체계, 그리고 정부의 우호적인 정책으로 인해 세계적인 경제 주도국이 되었다. 이러한 협회는 경쟁을 규제하고 소규모 회사가 훨씬 큰 회사의 그늘에서 기능할 수 있도록 했다.
ᐳ 5.1.2 화학과 약학ᐯ 5.1.2 화학과 약학
루르에서 석탄과 철강 등을 주력으로 중공업이 발달하면서 루르 및 슐레지엔에서 제조업이 성정함에 따라 경제는 계속 산업화 및 도시화되었다. 이와 함께 대학과 각종 실험실에서 화학 연구의 리더쉽을 바탕으로 독일은 19세기 후반 세계 화학 산업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BASF 및 Bayer 와 같은 대기업은 인공 염료 및 의약품의 생산 및 유통 방식을 주도하여 1914년까지 화학 제품의 국제 거래량 전체의 90 %를 점유하면서 독일은 세계 화학 시장을 독점했다.
ᐳ 5.1.3 식민지 경제ᐯ 5.1.3 식민지 경제
독일령 식민지의 경제는 주로 1차 산업이 지배적이었다. 제조업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고 독일 본토나 유럽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원자재를 생산했다. 식민지들은 주로 1900년경에 고도 성장을 이루고있는 자전거, 자동차 및 전기 산업 등 많은 산업군에 의해 요구되는 고무와 같은 자재였으며 면화와 같은 기타 작물이 추가로 생산되었다. 섬유 생산을 위해서는 동물성 가죽 및 상아 뿐 아니라 소위 식민지 제품인 커피, 코코아, 사탕 수수, 후추, 담배 등이 재배되었다. 수출을 위한 바나나 재배는 1908년 카메룬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많은 독일의 식민지는 불안정했다. 또한, 식민지는 자체적인 관세를 부여했고, 많은 양의 원자재를 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 경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채굴할 수 있던 다이아몬드는 상업적 이익을 창출했다. 1905 년 이후 식민지 전쟁과 새로운 식민지 정책이 끝났고, 보호 지역의 인프라 확대와 경제 활동의 확대로 식민지의 재정 상황은 상당히 개선되었고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향해 발전했다. 1904년, 아프리카 식민지의 대외 무역은 수입에서 40,672,000 마르크와 수출에서 20,821,000 마르크에 이르렀다. 1908년, 수입은 84,264,000 마르크, 수출은 37,726,000 마르크에 도달했습니다. 1912년에 아프리카 식민지는 수입은 128,478,000 마르크, 수출은 103,748,000마르크의 무역 실적을 내었다.
그럼에도 제국의 식민지들은 전체적인 독일 대외 무역에서 무시할만한 역할을 했다. 식민지 무역은 1914년 독일 대외 무역의 2.5% 미만을 차지했다. 식민지 무역은 장려되지 않았으며, 식민지는 외국 세관 정책으로 취급되었다. 식민지 수입은 독일 총 수입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식민지에서 독일 제국으로 수입된 제품은 대부분 국내 수요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구리와 다이아몬드를 제외하고는 세계 무역 시장에서 독일 제국의 위치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식민지들의 경제는 대부분 고려되지 않았다.
ᐳ 5.2 독일제국 중반 (~1930)ᐯ 5.2 독일제국 중반 (~1930)
ᐳ 5.2.1 화학 산업ᐯ 5.2.1 화학 산업
19세기 후반부터 독일의 화학 산업은 다른 국가에 비해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산업 원자재를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바스프(BASF)와 바이엘(Bayer), 아그파(Agfa)와 같은 굴지의 기업과 뛰어난 화학자들의 성과로 염료, 섬유 탄산염, 황산의 제조 공정을 성공적으로 산업화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질산염, 합성고무, 메탄올, 액화석탄 제조에 성공적인 성과를 보였다. 이러한 기술은 전적으로 독일에 귀속되어 있었으며, 독일은 화학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화학 분야에서의 활동은 독일의 고질적인 전략자원 부족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895년 독일의 화학자, 아돌프 프랑크와 니코뎀 카로는 탄화칼슘과 질소 기체를 반응시켜 비료로 사용되는 시안화칼슘을 얻었다. 이런 프랑크-카로 공정의 산업화는 1905년부터 시작되었다. 1918년에 이르러서는 35개의 시설에서 매년 325,000 톤의 질소를 고정했다. 그러나 프랑크-카로 공정(시안화 공정)은 많은 양의 전력을 소비했고 하버법보다 노동 집약적이었다. 이를 발전시켜 프리츠 하버에 의해 새로운 질산염 생산 공정이 가능하게 되면서 독일의 빠른 인구성장을 지탱할 농업의 효율성을 증대했을뿐만 아니라 나아가 포탄과 같은 화약의 주 원료인 질산염의 해외 의존도를 극적으로 떨어뜨렸다. 암모니아는 1913년 독일 BASF의 오파우 공장에서 산업 규모로 하버 공정을 사용하여 처음으로 제조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하루 20 톤의 암모니아를 제조했다. (연간 7,200 톤의 암모니아를 제조했다.) 이후 1914년 독일 정부는 원자재 해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에리히 폰 팔켄하인 참모총장는 질산칼륨 계약을 통해 하버법의 대규모 산업적 적용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하버법 공정을 따르는 생산 공장 건설에 대한 재정 지원, 이 공정으로 생산되는 질산염의 정부 구매 보증을 포함한 질산염 공급을 약속받았다. 이후에 오파우의 대규모 공장의 확장 외에도 로이나(Leuna)와 비터펠드에 BASF의 추가 공장이 건설되었다. 1925년에 이르러서는 30개소 이상의 공장에서 공정을 통해 하루 약 85만 톤 이상의 질산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오늘날 암모니아 연간 생산량은 875,000 톤이다.) 이를 통해 독일은 화약과 합성비료 분야에 가해지던 원자재 부족 문제를 해결했다. 경제적 효율성 문제에 대한 고민은 많은 개선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공정에 가해지는 조금의 경제성에 대해서 정부는 많은 압박을 받아야했다. 특히, 공정에 투입될 수소를 생산하기 위해 다량의 전력이 필요로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독일 내에서 충당할 수 있었지만, 비용 문제는 오랫동안 독일 정부의 예산을 압박했다. 대개는 노르웨이의 수력발전을 통해서 이러한 비경제성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는 국가에서 장려되지는 않았다.
또한, 프란츠 피셔와 한스 트롭쉬는 1920년에 피셔-트롭쉬 공정을 개발하면서 석유 자원을 강한 수입 부담에서 해방시켰다. 이러한 FT공정을 통해서 이론상 독일 전역에서 채굴되는 석탄의 약 30.2%를 차지하는 갈탄을 석유의 대체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BASF 및 Bayer가 공동으로 채결한 협약을 통해서 이러한 공정을 산업규모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또한, 산업 규모로 확장하며 대규모 탄광기업인 브라바크(Brabag)가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앞선 선례를 가진 질산칼륨 계약과 거의 동일하게 국가에 대한 액화 석탄의 공급을 약속받았다. 이 과정에서 육해군의 이해관계에 맞게 수소화 공정과 FT공정의 적용 비율을 조정했다. 이러한 조정은 두 공정법의 상호보완성 때문이다. FT법을 통해서는 양질의 디젤을 주로 얻을 수 있었고, 수소화 공법을 통해서는 양질의 가솔린을 추출하는데 유리했다. 여기에서 독일 해군은 피셔-토롭시 공정에서 생성되는 양질의 디젤을 통해 함대를 기동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이러한 산업 계획의 한 축으로 디젤 기관과 관련된 기술 또한 MAN와 메르세데스-벤츠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산업체에 의해 빠르게 성장했다.
석탄석유화를 통한 연료 생산은 유가가 적어도 배럴당 30∼35달러보다 위에 형성되었을 때 경제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 20세기 전반에서 유가는 이보다 낮은 선에서 유지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이득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는 독일 내 수입 석유에 관한 보호관세를 설정한다고 해도 만만치 않았다. 1930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이 이듬해 전유럽에 영향을 주며 각국에서 보호관세를 높이면서 독일의 합성연료는 수출에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 제국이 열강들로부터 원유를 구입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독일의 합성연료 잉여 생산량은 전적으로 일본에게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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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학계에서는 이외에도 산업 필수자원 중 하나인 고무의 합성법을 개발해내었다. 1909년, 프리츠 호프만이 이끄는 독일 엘베르펠트 의 바이엘 연구팀 은 최초의 합성 고무인 이소프렌 중합에 성공했다. 하지만 산소와의 접촉에서 내구성이 약화되는 문제가 빈발하여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1925년 화학자 발터 보크에 의해 스티렌-부타디엔 고무를 개발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는 천연고무와 비슷한 성질을 가져 산업 전반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1920년 말까지 독일은 고무, 석유, 질산염에 대해서 상당한 해외의존도와 이에 따른 부담을 화학 산업에서 상당량 덜어낼 수 있었다. 또 다른 산업 필수자원이었던 알루미늄은 전기분해법이 개발된 이후로 값싸게 얻을 수 있었고, 국내에서 상당량 합성하여 상용할 수 있었다. 구리나 (니켈, 텅스텐, 크로뮴 등을 포함한) 희귀 금속에 대해서는 대체 금속이 있다면 이를 제조하는 것으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특히 구리의 사용처 일부분은 알루미늄을 통해 대체할 수 있었다.
ᐳ 5.2.2 조선 산업ᐯ 5.2.2 조선 산업
빌헬름 2세는 독일 황립해군이 세계 굴지의 해군력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랬다. 따라서 8번 이상의 함대법을 공포하며, 해군 규모를 확장시켰다. 이와 함께 영국-독일 해군력 경쟁에 의해 다량의 군함을 건조할 수 있어야했다. 대부분의 사업은 황립 조선소였던 카이저리히베르케에 투자되었다. 3대 해군 조선소였던 빌헬름스하펜, 킬, 단치히 조선소와 군항은 꾸준히 규모를 확장했다. 평균적으로 4개 이상의 도크가 각각의 조선소에 신설되었다. 하지만, 과반의 군함 건조는 민간 조선사에 발주해야했다. 민간 조선사는 해외 조선업의 동향과 큰 상관없이 국내에서, 특히 해군의 주문을 충족하면서 사업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20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군함의 예상 발주량을 높이 평가한 민간 조선소의 대부분은 도크 규모를 확장할 수 있었고, 국가에서는 많아진 발주량에 맞추어 민간 조선기업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철강 산업체부터 시작하여 운송 산업체, 조선 산업체에 이르기까지 조선 산업에 필요한 일련의 공정 과정을 묶음으로서 단가를 낮추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점에서 민간 조선소는 자금 부담을 상당히 덜 수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 국가은행의 총재인 얄마르 샤흐트에 의해 상당 수의 민간 조선 산업체에 채권 발행권이 생기면서 엄청난 부흥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채권 활용은 성공적이었고, 함대법에 정립된 해군 체계가 완성되면 그 이후 기간부터 국가은행에서 매입할 예정이었다.
블롬 운트 포스, 불칸 슈테틴, 불칸 베버, 쉬샤우베르케, 게르마니아베르프트, 호발츠베르케 등과 같은 대형 조선소는 군함 건조로 숙련공을 상당량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독일 조선업의 경쟁력을 상당히 끌어올렸다. 그 외에도 본래 민간 선박을 중심으로 수주하던 FSG와 같은 민간 조선소 또한 군함 수주에 뛰어드는 등 많은 산업체가 해군 아래에서 일했다. 이러한 구조는 각 지역 조선소, 철강 기업의 협력을 긴밀하게 만들었다.
ᐳ 5.3 오스트리아 합병 (1925)ᐯ 5.3 오스트리아 합병 (1925)
ᐳ 5.3.1 합병 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제ᐯ 5.3.1 합병 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제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프라하와 같은 중심도시를 제외하고는 서쪽 지역이 동쪽 지역에 비해 더 산업화되어 있었다. 19세기 말, 제국은 미국,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기계 제조 산업을 구성했고, 또한 미국과 독일에 이어 세계 3위의 전기 가전, 전기 산업 및 발전소 설비 제조 수출국이었다. 이러한 산업화는 주로 프라하와 비엔나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도시들을 중심으로 서부지역은 다양한 제조업 방면에서 번영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서 오스트리아 지역은 제1차 산업 혁명 분야에서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동부 지역은 제2차 산업혁명에서 파생된 산업에서 서부지역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양분화 -분업화- 는 제국 전역에 더 빠른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당대 가장 중요했던 교역 상대국은 독일(1910년: 전체 수출의 48%, 전체 수입의 39%), 그 뒤를 영국(1910년: 전체 수출의 거의 10%, 전체 수입의 8%)이 이었다.
그러나 1914년 발발한 제3차 발칸 전쟁에 참전하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되었다. 막대한 인력을 국가 예산으로 운영하고 예비군으로 징병하며, 전투로 손실시켰기 때문에 경제 발전은 영국, 미국, 독일과 같은 경쟁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수치를 기록했다. 또한, 추가적으로 트란실바니아 일대에 가해진 루마니아 군의 공세로 해당 지역의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러한 경제적 피해는 전후 보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몇몇 고위 관리들과는 달리, 자원이 풍부한 루마니아 일대는 열강들의 반대로 손에 넣을 수 없었고, 전후 배상금을 지불할 세르비아는 국토 전체가 황폐화되어 사실상 없어진 것과 같았다. 오히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양분하면서 전쟁 피해 복구에 더 많은 지출을 감내해야 했다.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제성장은 마이너스에 가까웠다. 그러나 점차 상승세를 회복했고, 이후 1915년에 발발한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는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물자가 오스만 제국으로 가는 철도 편에 운임을 받았고, 자체적으로 오스만과 러시아 양국에 각종 무기와 탄약을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이러한 전쟁 특수에 편승해 1920년까지 적백 내전과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꾸준히 군수 물자를 러시아에 지원하며 경제를 본래 궤도로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로 경제적인 안정기와 함께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제국의 소수민족에게 민족주의 봉기를 유도하며 다시 위기에 빠져들게 했다.
ᐳ 5.3.2 내전 후 오스트리아의 경제ᐯ 5.3.2 내전 후 오스트리아의 경제
국내 소수민족과 마자르족의 긴장이 지속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이 발발하면서 오스트리아의 경제는 정상궤도에서 급격히 탈락했다. 제2차 산업혁명 기간동안 오스트리아(시스라이타니아)를 능가하는 산업 수준을 확보한, 헝가리 지방(트란스라이타니아)이 제국의 테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력은 절반보다도 더 떨어졌다. 이 뿐만 아니라, 내전을 직면하게 되면서 -비록 독일 제국의 지원이 있었지만- 전쟁 자금에서 막대한 손실을 기록했다. 일부는 전쟁이 오스트리아 경제의 실업 충격을 막았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이는 많은 인력이 실질적인 경제 행위에서 벗어났음을 뜻했다. 대다수의 인력은 전쟁터로 보내졌고 절반은 부족한 오스트리아의 군수 산업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다만 충족되지 못한 식량은 오스트리아의 국가 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제국 내에서 헝가리의 농업 규모는 제일 막대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상실한 오스트리아는 식량을 외부에서 수입하는 것에 적지 않은 자금을 지출해야 했다. 그럼에도 식량 보급은 내전 기간 동안 전방과 후방을 가릴 것 없이 빈약했다.
내전 동안 막대한 피해는 경제 인프라와 인력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 철도와 도로는 대부분 재정비를 필요로 했고, 상실된 인력은 제국의 차등 시민으로 대체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제국 내에서 매우 부유한 편이었던 보헤미아 지방 또한 독립하며 그들의 경제 규모는 급속히 축소되었다. 이에 더해 내전 기간에 무리하게 빌리거나 찍어낸 재화에 의한 전쟁 부채가 그들의 경제 안정화를 강하게 거부했다. 오스트리아의 지도층은 파괴적인 상황에 직면한 오스트리아의 전반을 이끌고 가기보다 같은 민족 국가인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어 경제 충격을 완화하고 국가가 안정시키는 것에 긍정했다. 실제로도 그 지도층은 오스트리아를 안정시킬 수단과 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만약 더 시간을 끌었다면 군주제 마저 무너질 위기였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결국 같은 해, 독일 제국의 일원이 되어 합병되었다.
ᐳ 5.4 대전 직전기 경제ᐯ 5.4 대전 직전기 경제
이전부터 지속되어오던 주기적 경제 불황에 이어 1931년부터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여파가 독일 제국의 경제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경제 충격을 받은지 2주만에 실업률이 10%대를 돌파하면서 빠른 경제 성장이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3주만에 국가은행은 즉시 대책을 수립하여 통화를 개혁했다. 그들은 신뢰담보 재화인 파피어 마르크를 채택함으로써 금본위제, 은본위제에서 탈피했다. 이와 함께 다른 식민제국과 같이 독일 식민지와 함께 마르크 블록을 중심으로 내부 무역을 강화했다. 파피어 마르크는 태환이 가능한 재화였지만, 금본위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 가치의 변동성이 강했고 신뢰성이 매우 빈약했다. -다만, 독일의 시민사회에서는 신뢰성이 보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해외 무역에서 마르크의 가치는 하락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역 대국인 대영제국이 블록 경제를 실시하면서 대독 무역량이 하락하면서 충격이 완화되었고, 이전부터 다량의 원자재를 국내에서 자체 수급이 가능하도록 제국이 꾸준히 노력해왔기에 경제 타격은 빠르게 완화되었다.
이후 독일판 뉴딜 정책이라고 불리는 군함 조선사업이 이듬해,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의해 제한적으로 운영되면서 경제가 일시적으로 침체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불필요한 재정 지출을 줄이고 미국과 같이 대규모 토목 사업에 인력을 투자하면서 경제 충격을 완화시켰다. 1936년까지 겨우 플러스 성장을 지킨 독일은 이후에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에 따른 군수품 수출이 증대되었고, 지속적인 러시아군의 성장에 상당한 요구를 충족시키며 유럽 제1의 군수사업 규모를 과시했다. 이러한 경제 기반을 통해 서서히 정상 궤도로 올라가려한 경제는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추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