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보기 도움말: 데스크톱, 크롬, 제이위키 벡터 스킨 베이스 | 제작: Ernst | 세계관: 크리크 & 빌레
![]() '미하엘' 폰 슈타우펜베르크 Johannes Leopold Wolfram 'Michael' von Stauffenber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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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60년 1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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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 |
사망일 | 2048년 4월 2일 (87세) |
사망지 | ![]() |
국적 | ![]() ![]() ![]() ![]() |
별명 | 신동(Wunderkind) |
종교 | 기독교 |
가문 | 폰 슈타우펜베르크(von Stauffenberg) |
정당 | 불완전존속당 (Uvolben) |
부모 | 크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부) 레나 엘스너(모) |
배우자 | 예시카 회르비거(1992-2001) |
자녀 | 헤르만 폰 슈타우펜베르크 |
친척 | 에겔라이만 폰 슈타우펜베르크(백부) |
형제 | 하소 폰 슈타우펜베르크(형) 아멜리에 폰 슈타우펜베르크(매) 하페 폰 슈타우펜베르크(제) |
학력 | 지휘지도교도단 과정 수료 1987(26~27) 육군기계화학교 졸업 1985(24)~1987(26) 바이에른육군사관학교 졸업 1983(22)~1985(24) 뉘른베르크 육군부사관교육센터 수료 1982(21~22) 뮌헨군사대학원 졸업 1980(19)~1982(21) 뮌헨군사대학교 졸업 1977(16)~1980(19) 뉘른베르크시립김나지움 졸업 1969(8)~1976(15) |
복무 | ![]() ![]() |
복무 기간 | 1987년 12월 2일 ~ 1999년 12월 2일, 2004년 8월 2일 ~ 2010년 6월 5일 |
최종 계급 | ![]() ![]() |
근무 | 우폴베니아 국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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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 |
주요 참전 | 제3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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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내역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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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유년 시절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1960년 11월 20일에 바이에른주의 슈타른베르크 외곽에서 독일 연방군 중령으로 복무하고 있었던 크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1932년 ~ 1976년)과 그의 아내이자 독일 연방군 지원의무병 출신이었던 레나 엘스너(1929년 ~ 1975년) 사이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유년 시절 동안 슈타른베르크에서 유치원 과정을 마친 이후 그의 선생이었던 요하나 안나 헤이케의 추천으로 뉘른베르크로 이주하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헤겔 그룬트슐레에 입학하였고 그룬트슐레에서 항상 수석이었으며 각종 교내 경시에서 손위의 학생들을 제치고 최고상을 수여받았다. 이에 3학년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했다. 그는 또래보다 한 살 일찍 그룬트슐레를 졸업했다. 그가 졸업할 때까지 그의 가정은 항상 화목했다.
학창 시절
김나지움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프리드리히 헤겔 그룬트슐레를 조기 졸업하고 4학년 담당 선생님이었던 요하나 클라이펠의 추천으로 바이에른 전역에서 유명했던 뉘른베르크 시립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는 그 김나지움의 조기 졸업 시험을 통과한 첫 사람이었다. 그가 김나지움에 다닌지 7년째 되는 해인 1976년의 6월, 김나지움 졸업을 한 해 앞두고 소비에트 연방군을 필두로 바르샤바 조약군의 서독 침공이 시작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라고 명명된 군사 작전에 의해 시작 된 전쟁은 그와 그의 가정을 흔들어 놓았다. 굳센 애국자였던 그의 집안은 곧바로 군인으로서 적에 대항하여 저항했다. 그의 아버지는 호프라는 도시에서 바이에른으로 접근하는 적을 저지하다 전사했다. 크라우스 선임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국가를 부르며 가족사진을 주먹에 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하네스의 어머니인 레나 엘스너는 에를랑겐의 의무소에서 복무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형이었던 하소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의 동생들을 데리고 뮌헨으로 피난가던 중 괴한의 총격에 치명상을 입었다. 요하네스는 그의 형이 눈을 감는 순간에도 그의 형제와 곁에 있었다. 뮌헨에 도착해서는 곧장 방공 대피소로 들어갔지만 운 없게도 그 도시에 가해진 마지막 폭격에 그 대피소는 불에 휩싸였다. 그는 연기를 마시고 의식을 잃은 두 동생을 데리고 방공호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의 막내 남동생은 몸이 약해서 항상 호흡보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고 여동생은 양쪽 다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 국가는 국가공훈자의 자녀들이었던 그들을 치료하는데 비용을 지원했지만 요하네스의 형제들은 얼마 안 돼서 그의 부모를 따랐다. 그는 전후 처리가 끝난 뒤, 예정대로 뮌헨 시청에서 김나지움 교육과정의 수료을 승인받았다.
그는 전쟁을 겪으며,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그의 부모와 같이 열혈적인 애국자였고 그들을 따라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요하네스는 그의 백부(큰 아버지)이자 생존한 군인이었던 에겔라이만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아래에서 자랐으며, 새로 설립된 뮌헨 군사 대학교로 진급하길 바랬다.
대학·대학원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의 보호자가 된 에겔라이만 폰 슈타우펜베르크 중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 뮌헨 군사 대학교을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그는 기계화 중점 과정과 기갑 중점 과정을 동시에 전공 과정으로 배우며 기갑부에서 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는 동아리 활동으로 바이에른 전역 기갑경시대회(Bayernpanzerwett)에 9차례 참가하여 5개의 대상, 3개의 금상, 1개의 은상을 수상했다. 요하네스는 그를 눈여겨본 교장 카를자우어 크로이만의 연줄을 통해 당시 즈볼러 제3기갑 사관학교의 학장이었던 하인츠 클라인 중장을 알게되었다. 이 인연을 통해 국방군의 고위 인사들 사이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대학교 2학년부터 게브하르트 겐트너의 참모실에서 서류 정리와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하인츠 클라인이 일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요하네스는 겐트너의 집무실를 통해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그들과의 모임에서 같은 나이의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와 만나게 되었다.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와의 만남은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당시 폰 하르덴베르크는 바이에른에서 슈타우펜베르크가 그랬듯이 저지대 국가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 유망주였다. 이듬해 대학교 3학년으로 진급한 뒤, 독일 군사 교육대상자 총회(Generalversammlung der Studenten der militärischen Ausbildung; GvSMA)의 정회원으로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6개월 이후 하급 명예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러한 자리에서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와 자주 군사 교리에 대한 논의를 했다. 1980년 뮌헨 군사 대학교의 4학년 생활을 끝내고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으며, 국방청(NVgA)의 권유로 뮌헨 군사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는 논문 집필 중에도 여전히 전화든 편지든 종종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와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그는 그와 논의한 내용들을 엮어서 《젊은 군학생의 대화록(Dialoge junger Militärstudenten) 》을 출판했으며 3년간 총 21개의 논문을 집필했다. 대부분의 집필 논문은 기계화 교리와 정보전 교리였다. 그는 기계화, 기갑의 두 전공과 더불어 부 전공으로 정보, 교육을 이수하며 뮌헨 군사 대학원을 석사로 수료했다. 그는 졸업 후에 박사 과정을 제안받았으나 늦기 전에 입대하여 군대에서 배우기 위해 거절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게브하르트 겐트너는 참모실에 정보 보직과 숙식를 지원했으며 그가 뉘른베르크 육군부사관교육센터(Nürnberg Unteroffizier Ausbildungszentrum der Heer; NUAusbZH)에 들어가는 것을 도왔다.
부사관교육
게브하르트 겐트너의 제안에 뉘른베르크 육군부사관교육센터(NUAusbZH)에서 부사관 교육을 받기로 결심했으며, 그와 동시에 뉘른베르크에 새로이 건설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그의 생활은 군의 지원에 교육에 임하기에는 풍요로웠다. 교육센터에서 약 4개월 동안 군사 교육에 대해 공부했으며 보병과와 육군항공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부사관 교육 기간에 바이에른판처베트(Bayernpanzerwett)의 해설자 자리로 바이에른 방송(Bayerischer Rundfunk, BR)에서 제의해왔지만 군사 교육 중이었음으로 군에서 거절했다. 다음 분기에는 그는 해설자로 설 수 있었다. 부사관 교육을 우수로 수료할 즈음에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작성했는데 그것이 《바람에 날린 재(Wind geblasene Asche) 》이다. 그는 1982년 하사(Unteroffizier)로 임관되었다.
사관학교
그는 부사관 교육과정에서 상위 3% 이내에 들어 사관학교로 진급하게 되었으며 바이에른육군사관학교(Bayerische Militärakademie der Heer, BMkH)로 발령받았다. 그는 졸업하면 소위(Leutnant)로 발령받을 예정이었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사관학교에서는 꽤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경쟁 상에 불리했으나 페널티를 극복하고 조기 졸업자 명단에 올랐으며 2년 만에 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독일 군사학회(Deutsche Gelehrtengesellschaft der Militärwissenschaft, DGgMw)의 명예 회원 및 바이에른 장교회(Bayerische Offiziersversammlung der Heer, BOV)의 정회원으로 위촉되었다. 이러한 집단에서 그는 국방청의 인맥을 늘려나갔고 곧 그는 국방청에서 주로 거론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이제 바이에른의 대표 장교였다.
군사학교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기계화 교리에 대한 심도있는 관철을 위해서 전문 장교 학교인 육군기계화학교(MISH)에서 추가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그 기간동안 국방군병기청(DAZhDw)와 함께 페넥, 비젤 등의 신형 궤도장갑차(IFV)의 시범 운행등에 참여하였다. 또한 비젤의 설계에 관하여 많은 부분을 기여했다. 2년 간의 활동을 끝으로 1987년 26세의 나이로 주요 과정을 모두 수료했고 명실상부한 기계화 교리의 선구자가 되어있었으며 중령(Oberstleutnant)이 되어있었다. 수료한 이후 2개월 간 그는 주요 학회나 바이에른판처베트와 같은 군사와 관련된 행사에 초청되느라 바빴다. 특히나 이 시기에는 곧 일어날 전쟁의 준비로 서서히 바빠질 즈음이었다. 또한 그는 줄곧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발령을 거부해왔다.
교도단
그는 국방청에서 정보 업무 부관으로 일하며 전쟁 전조를 알아챘다. 이에 대한 사실은 가장 큰 언론사 중 하나인 플라츠 데어 나치온(Platz der Nation)에 투고되었고 이는 곳 언론사에서 미화하여 게재했다. 그는 다가오는 전쟁에서 부하들을 인솔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고 한다. 그는 즉시 지휘지도교도단으로 재교육을 신청했고 그는 즉시 발령받아 지휘지도교도단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4개월 동안의 지휘지도 교육을 받았으며 수료한 이후에는 준장(Brigadegeneral)에 임관되었으며 제5군의 참모장으로 발령되었다. 발령 이후 며칠만에 즉시 소장(Generalmajor)으로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