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 축구 국가대표팀
Wubon National Football Team
별칭
바다의 왕자, 파란 선구자들
FIFA 코드
WUB
협회
월본축구협회 (WFA)
연맹
아시아 축구 연맹 (AFC)
지역연맹
동아시아 축구 연맹 (EAFF)
감독
윤정환 (尹晶煥)
주장
이민성 (李敏聖)
최다출전자
오우현 (吳佑賢) / 146경기
최다득점자
유성일 (柳盛逸) / 177골
홈구장
도유 윤진종합경기장 (68,000석)
라이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한월전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 태평양 더비
첫 국제경기 출전
VS 중화민국 (0:2 승)
월본 도유 (1917년 6월 17일)
최다 점수차 승리
VS 아프가니스탄 (17:0 승)
아프가니스탄 카불 (1994년 1월 6일)
최다 점수차 패배
VS 브라질 (0:11 패)
브라질 상파울루 (1965년 6월 5일)
월드컵
출전 14회
4강 1회(1990) , 16강 4회(1994, 2002, 2010, 2018)
아시안컵
출전 17회
우승 5회(1964, 1980, 1988, 2004, 2011)
올림픽
출전 8회
(1956, 1988, 1992, 1996, 2000, 2004, 2008, 2016)
FIFA 랭킹
26위 (2021.12)
Pride of Asia, Wubon!

개요

월본축구협회 산하의 월본의 축구 국가대표팀. 아시안컵 최다 우승(5회)이라는 위업을 세웠기에 아시아에서 정상급의 실력을 가졌다고 인정받고 있으며, 실제로 월드컵 4강 1회, 퐁당퐁당 16강 4회로 세계 축구계에서도 통할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팀이다. 월본은 "아시아 축구계의 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데, 실제로 별칭도 바다의 왕자고, 슬로건 역시 Pride of Asia, Wubon!이기도 하다.[1]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긴 뒤 4강까지 오르는 돌풍(밀라노의 기적)을 일으켰으며, 동시대 선전한 한국 대표팀과 함께 아시아 축구팀 돌풍의 문을 연 팀이라고 평가받으며 아시아 팀들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후에도 연속 출전하며 아시아 축구에서 가장 정상급의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축구 발전이 느렸던 1930년대부터 선수를 쳐서 꾸준히 나간 것이긴 하지만 14회 월드컵 출전을 기록하여 세르비아, 우루과이, 벨기에 등의 국가와 비슷한 수준의 출전을 기록했다.

월드컵 전적은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항목 참조.

역사

태동기 (다이치 개신~1930년대)

월본 축구는 다이치 개신 이후 처음으로 그 기록을 드러냈다. 1891년 프랑스인 주자크 네케르(juzacques Necker)에 의해 처음으로 월본에 축구가 소개되었으며, 그 이후 축구는 다이치 개신으로 인한 급격한 공업화로 증가한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여가로 주목받았다. 실제로 노동자들에 의해 1892년 도유축구단[2]이 창단되었으며, 도유축구단이 그 이후 10여년간 성장하자 1900년에는 도신설종합축구단이, 1903년에는 주곤축구단, 단청종합축구구락부가, 1904년에는 도유월본구락부, 북양도축구단 등이 창단되며 월본 축구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월본 축구는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되다가 점차 축구 경기가 인기를 끌며 축구단 간 더비가 회사, 지역을 대표하는 시합으로 여겨지며 회사와 지역에서 축구단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되어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회사가 지원한 축구단은 현재 기업구단의 뿌리가 되고 지역이 지원한 축구단은 현재 시민구단의 뿌리가 된 것이다.

그 이후 도신설종합축구단과 주곤축구단간의 남북더비, 도유축구단과 도유월본구락부간의 도유매치, 도유축구단과 단청종합축구구락부간의 동서더비가 인기를 끌며 현재까지 내려져 오는 더비 매치의 씨앗이 된다. 정부도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축구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게 되고, 시민들도 새로운 여가의 증가와 애향심으로 인한 지역 구단 응원으로 축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1910년 현재 월본축구협회의 뿌리가 되는 월본제국축구관리회의 설립이 이뤄진다.

정식 축구 국가대표팀의 구성은 1910년대부터 논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클럽 간 의견 격차와 행정 미비로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하다가 1917년이 되어서 마침내 첫 국가대표팀 소집이 이뤄지게 된다. 첫 국가대표 경기는 중화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1917년 6월 17일 도유에서 이뤄졌으며 월본이 2대0으로 승리하였다. 그 이후 월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와 시합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당시 식민지 상태였던 국가들의 팀과도 경기를 하여 현재의 한월전, 태평양 더비 등의 유명 더비를 만들어 나갔다.

이후 월본은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도 참가 신청서를 내며 참가했으나[3] 브라질과 유고슬라비아에게 5대0으로, 볼리비아에게 3대0으로 대패하며 세계의 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선전했던 결과라고 평가받는다. 오히려 브라질이 "저런 아시아 약체에게 겨우 5-0으로 이겼다"며 자국민들에게 비난을 들었을 지경이였다.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아프리카-아시아에 배정된 1장의 티켓을 두고 이집트와 경쟁하였고, 이집트와의 예선을 0대2으로 승리하며 연속으로 월드컵에 진출하게 된다.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헝가리와 아프리카-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하여 올라온 월본의 대결은 헝가리의 압승으로 끝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예상대로 헝가리가 27분 만에 3골을 넣어 경기가 손쉽게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 이후 월본 수비진과 윤병덕 골키퍼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내 헝가리의 추가골은 나오지 않았고, 결과는 헝가리의 3대0 승리였다. 월본은 비록 패배했지만 "고작" 3-0으로 막아내며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아시아 축구의 서막을 세계에 알렸다. 이 기세를 몰아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 신청을 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예선에서 이기고 이번에도 헝가리와 1라운드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5대0으로 대패하였다. 그러나 월본 내 축구팀들은 여전한 인기를 자랑하여 축구 열기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었었다.

시련의 시기 (1940~50년대)

월본 축구는 1940년대 중해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심화되자 쇠퇴하기 시작한다.

1940년 초까지는 팀간 경기가 지속되었지만 중해전쟁이 시작되자 경기는 중단되었고 선수 중 일부가 징병되기도 하였다. 결국 월본 내전이 일어나게 되자 축구는 완전히 월본에서 중단되며 1945년 종전까지 단 한 경기도 개최되지 못한다. 월본 축구의 전설인 성우진도 이 시기에는 징집을 피해 도피했을 정도로 축구 인프라는 붕괴되었다. 1945년 종전 후 축구팀들이 복귀하나 국가 인프라 붕괴와 재건으로 인해 금세 흐지부지되었다.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도 위기를 맞았으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선수들의 위주로 자발적인 대표팀이 조직되었으며,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1948년 하계 올림픽에도 참가하며 '월본'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출전하는 등 시련의 시기를 이겨나갔다. 그러나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은 전쟁의 책임을 물어 출전을 금지당했으며, 이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은 사정상 불참할 수밖에 없었고 월드컵의 복귀는 1958년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 이후 민태훈의 노력으로 도신설종합축구단을 위주로 클럽 축구 부흥이 다시 일어났고, 이에 힘업어 성우진도 축구계에 복귀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그 이후 1956년 홍콩 아시안컵에 출전하여 2승1패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시련의 시기를 탈출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월본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재참가하며 무려 20년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다. 예선에서 이스라엘이 첫 참가 신청을 했는데, 껄끄러운 상대와 붙기 싫었던 아시아의 국가들이 참가 신청을 했다가 다시 기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월본은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별로 없었기에 이스라엘과 단 둘이서 예선을 치루게 되었다.

그 이후 월본은 이스라엘과 예선을 치루어 승리하면서 20년만에 월드컵에 복귀하게 되고, 스웨덴, 멕시코, 헝가리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들과 3조에 배정된다. 비록 스웨덴과 헝가리에 연달아 패하며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민태훈의 월본 사상 월드컵 첫 골로 멕시코와 1대1로 비기면서 사상 첫 월드컵 승점을 얻어내 월본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발전의 시기 (1960~80년대)

1962년 칠레 월드컵에는 아시아 예선에서 치루어 탈락하여 참가하지 못했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는 북한의 출전으로 인해 기권하며 1960년대의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대신 아시안컵에서 선전을 이어나가며 축구 발전을 계속해 나갔다. 1960년 대한민국 아시안컵에서도 2승1패로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1964년 월본에서 개최된 아시안컵에서는 3전전승으로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68 이란 아시안컵에서도 3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축구 강호의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는 6개팀으로 예선이 치뤄졌다. 당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같이 예선을 치렀고, 아시아 축구 연맹 소속이던 월본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꺾고 본선에 갔지만 첫 경기에서 우루과이에 0:2로 패했다. 그나마 스웨덴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무승부를 거두며 나름대로 선전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예선 역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같이 예선을 치렀고, 결승은 월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홈 앤드 어웨이로 결정되었다. 두 팀은 두 경기 모두 비기고, 홍콩에서 중립경기로 본선 진출 팀을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호주가 2대0으로 승리하여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였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이란에 밀려 예선 탈락하며 진출하지 못했다. 이렇게 1970년대는 월본이 차근차근 세계 무대에서 경험을 쌓아가며 실력을 기르고 있던 시기였다. 1972년 태국 아시안컵에서는 월드컵에 집중한다는 명목으로 대학, 실업 선수들을 출전시켰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후 1976년 이란 아시안컵에서는 정식 선수들을 출전시켰으나 결승전에서 패배하여 준우승의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합쳐서 두 팀이 배정되어, 최종 예선 1, 2위에게 본선 진출권이 주어졌다. 예선 결과 월본이 최종 예선 1위를 차지하여 본선에 직행하였다. 그러나 조가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잉글랜드라는 죽음의 조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유로 1976 우승, 1980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동구권 최강자였고, 프랑스는 전설의 플라티니를 주축으로 이 대회 및 다음 대회 연속 4강, 유로 1984 우승컵을 차지한 우승 후보였다. 잉글랜드는 이들 중 커리어는 가장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 조별리그에서 3전 전승으로 올라갈 만큼 저력이 있는 팀이었다. 그래도 올림픽 우승팀 체코슬로바키아와 비기는 선전을 펼쳤으나 나머지 둘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한국에 패배하며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1980년대 아시안컵에서는 두번의 우승과 1번의 3위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게다가 1988년 월본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하면서 기쁨은 두배였다.

아시아 첫 4강, 두번의 16강 (1990~2000년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월본은 개막전부터 오우현의 골로 아르헨티나에 1:0으로 일격을 가한 밀라노의 기적을 일으켜 전 세계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고 루마니아도 이기며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소련에 대패하기는 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16강에서 콜롬비아를 연장 끝에 2:1로 꺾으며 북한에 이은 아시아 2번째 8강 진출을 이뤄냈다.

대회 직전까지만 해도 월본의 선전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 편성 부터가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 동유럽의 절대 강자 소련, 만만찮은 동유럽의 다크호스 루마니아였으니 탈락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우현이라는 위대한 스트라이커를 앞세운 월본은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첫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잡더니, 뒤이어 루마니아에 2:1 승리를 거두는 대 이변을 일으키자 축구 관계자들은 월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비록 수비력 불안과 결사적이었던 소련의 공세로 마지막 경기에서 소련에 0:4 참패를 당했지만 순위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월본은 죽음의 조에서 당당히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16강 콜롬비아전. 전후반 90분 내내 득점없이 연장전을 맞이한 월본은 맹렬한 공세를 펼치며 오우현이 연장 후반 1분과 4분에 연속골을 터트리는 괴력을 선사했다. 콜롬비아가 연장 후반 15분에 1골을 간신히 만회했으나 이미 시간은 거의 다 흐른 뒤. 이로서 월본은 24개국 체제가 확고해진 이후에 처음으로 非유럽·중남미팀으로서 8강에 합류하는 신화를 썼다.

8강 상대는 축구종가 잉글랜드. 비록 선제골은 내줬으나 월본의 공격력은 막강했고, 후반 16분 PK골과 20분의 역전골로 유럽의 강호이자 축구종가인 잉글랜드마저 격침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내달았다. 그러나 월본의 수비 불안은 결국 발목을 잡아, 리네커에게 후반 38분 페널티킥을 내주며 연장과 승부차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월본은 승부차기에서 7대6으로 잉글랜드를 물리치고, 4강에 진출한다! 이로서 월본은 8강에 이어 처음으로 非유럽·중남미팀으로서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서독과 연장전 끝에 패하고, 3-4위전에서 이탈리아에게도 패배하며 월본은 그것으로 신화를 멈췄다. 그러나 이러한 월본의 신화로 인해 FIFA와 세계 축구계는 아시아 축구의 잠재성을 목격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월본은 16강에 올라 선전했다. 월본은 벨기에, 네덜란드, 모로코라는 어려운 조를 만났다. 이 조의 톱시드는 벨기에였는데, 1982년 아르헨티나 승리 - 1986년 4강 - 1990년 16강 및 유로 1980 준우승의 활약을 거둔 강팀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로 1988 우승국으로 이 당시 선수들 및 신예들이 조화를 이루며 우승 후보군에 들만한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모로코마저도 1986 월드컵에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던 아프리카의 강자였다.

월본은 첫 경기에서 강호 네덜란드에 1:2로 패배하였으나 점수 차나 경기에서도 상당히 선전했다. 선취골을 넣었으나 역전당한 경기였다. 네덜란드 언론도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했고 우리도 고전했다고 호평했을 정도였다. 뒤이어 월본은 모로코를 2:1로 이기고 벨기에도 1:0으로 이기면서 첫 진출에서 16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월본 축구의 레전드였던 "아시아에서 온 폭풍" 유성일 선수가 벨기에전에서 마라도나에 비교되는 수비수 4명과 골키퍼를 드리블로 멋지게 제치고 골을 넣는 멋진 장면은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후 16강전에서 스웨덴에게 3대1로 패배하며 월본은 16강에서 그 진격을 멈추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독일, 유고슬라비아, 미국이라는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다. 월본은 미국을 2:1로 이기며 선전했지만, 하필 같은 조에 독일과 유고가 포진해 있던터라 1승2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독일에 2:0으로 졌고 강호 유고슬라비아에 1:0으로 패했지만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로 당시 유고팀 감독은 월본전이 끝나고 월본이 강팀이었기에 겨우 이겼다고 인터뷰를 했으며 월본을 아슬아슬하게 이긴 상황을 기뻐할 수 없다고 선수들을 꾸짖었다.

2002년 한국·월본 월드컵

2002년 한국·월본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진출, H조에서 벨기에, 아일랜드, 카메룬과 한 조가 되었다. 벨기에와 2대2로 비긴 뒤 아일랜드와도 1대1로 비겨 2무에 몰렸지만 카메룬을 3대0으로 이기며 1승2무로 조2위 16강행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16강에서는 스페인을 만났다. 스페인이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의 골로 순항을 이어갈것 같았지만, 월본은 후반 45분경에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스페인의 발목을 끈질지게 붙잡았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갔으나, 스페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렇게 8강에 올라간 스페인은 4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한국에게 졌다 비록 16강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나 월본은 아일랜드전, 벨기에전, 스페인전에서 뒤지고 있다가 극적인 동점을 만드는 경기를 세 번이나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과 더불어 대회 최고의 인기팀으로 꼽혔다.

2006년 독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월본은 16강 진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아시아 팀으로 분석되었다. 실제 조편성도 당시 톱시드 약체 멕시코, 토고와 더불어 아프리카 약체인 앙골라, 그리고 포르투갈과 같은 조에 편성되었는데, 포르투갈 전만 잘 버틴다면 당시 원정에서 약한 멕시코를 상대로 유럽파 선수들이 대거 포함된 월본의 우세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양상은 반대로 흘러갔는데, 1차전인 멕시코 전에서 1대3으로 완패를 당했다. 아무리 월본이 아시아 최강이라 하더라도 월드컵의 관록이 있던 멕시코에 완전히 밀린 경기였으며, 2차전인 포르투갈 전 역시 0대2 완패로 조별리그 탈락을 확정짓고 쓴잔을 마시게 된다. 그래도 마지막 경기에서 앙골라에게 2대1로 이기며 1승을 챙겼다.

90~00년대의 아시안컵

다만 월드컵에서는 영광이였지만 아시안컵에서는 1990년대가 영광의 시기라 하긴 애매하는 평가를 받는다. 준우승-8강-3위이라는 영광이라고도 비극이라고도 하기 애매한 성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1980년대가 아시안컵 영광의 시대로 걸맞는 평가가 많다. 2000년대에는 꽤 성과를 냈다. 2000 레바논 아시안컵에서는 3위를 했지만, 2004년 중국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하며 16년만에 우승을 하였다. 그러나 2007년 동남아 아시안컵에서는 8강에서 멈추며 찝찝하게 끝났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현재 (2010년대 ~ 현재)

2010년 남아공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유럽예선을 1위로 통과한 난적 덴마크와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에투가 버티고 있는 카메룬을 둘 다 잡는 위엄을 선보였다. 네덜란드에게 0-1로 패하긴 했으나, 네덜란드는 이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고 전통의 강호로 평가받는 만큼 나름 선전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회 전의 여론을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좋은 결과였다. 특히 덴마크는 아예 3-1로 압살했는데 그나마 실점도 페널티킥이었다. 이후 조 2위를 차지하며 16강 진출, 파라과이와 16강전을 치르게 되었다. 20년만의 8강 진출을 노리는 월본과 사상 첫 8강 진출을 노리는 파라과이 둘 다 8강에 진출해야 할 명분이 충분했고, 덕분에 아주 뜨거운 경기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작 경기가 시작되니 120분 내내 전 세계의 축구팬들을 잠들게 만든 경기라는 조롱을 들었다. 심지어 UEFA의 회장인 미셸 플라티니마저 정몽준 FIFA 부회장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월본은 조별예선에서 보여준 선수비 후역습의 전술을 그대로 들고 나왔는데 문제는 이 전술에 제대로 당한 덴마크를 교훈삼아 파라과이 역시 같은 전술을 가지고 나왔다. 그대로 양 팀의 수비력은 대단했으나, 공격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월본은 덴마크전과 마찬가지로 프리킥 찬스를 얻으려 했지만 파라과이는 초반 2연속 프리킥 골에 무너진 덴마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수비템포를 조절하고 월본의 카운터에 대비하여 몇 차례 찬스를 제외하곤 적극적으로 공격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결과는 아주 루즈한 무승부 경기였다. 끝내 두 팀의 승부는 연장전에서도 가려지지 않았고 이번 대회 최초로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첫 턴을 가져간 파라과이의 바레토, 바리오스, 리베로스가 차례로 골을 넣었고 월본도 김민찬과 유민선이 골을 성공시켰지만 세번째 키커인 강선민이 그만 크로스바를 때리는 실축을 날리면서 위기를 맞이한다. 월본의 네번째 키커인 이민성도 골을 성공시켰으나 파라과이는 나머지 키커인 발데스와 카르도소가 모두 골을 넣으면서 다섯 번의 슛을 모두 성공하면서 결국 월본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파라과이를 8강 진출시켜 줬다. 파라과이도 엄연히 당시 남미 예선을 통과한 남미팀이며 우승팀 스페인과 8강에서 0-1 한골차 접전을 펼쳤을만큼 강팀인 만큼 재미없든 말든 어쨌든 졌잘싸 즉 졌지만 스코어에서 크게 발리지 않고 잘 마무리 짓는 실리축구는 했다고 볼 수도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월본은 처음부터 희망이 있는 조에 배정되었다. 나이지리아, 아르헨티나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신생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였다. 첫 상대는 3팀 중 상대적으로 약체로 평가받는 나이지리아였지만, 졸전 끝에 0대0의 지루한 경기로 끝내야 했고, 2차전 상대는 과거 밀라노의 기적 당시 상대였던 아르헨티나였다. 0-0으로 경기 내내 잘 버텼고 후반 막판에 10명이 수비에 가담하며 월본의 전형적인 수비축구를 구사했는데, 메시가 극적으로 환상적인 결승골을 넣어 월본은 1패를 기록했다. 밀라노의 기적의 복수를 24년만에 당했다 이제 월본은 1무 1패를 기록해 16강 진출이 간당간당하였다. 마지막 3차전 상대는 탈락이 확정된 가장 쉬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제 여기를 이겨야 1승을 챙겨 2위로 진출 가능성이 있는데, 되레 전반전에 얻은 김민찬의 귀한 선제골을 지키지 못하고 동점골로 1대1 무승부를 기록해 2무1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H조에 배정되었는데, 죽음의 조에 든 이란, 한국과는 달리 폴란드, 콜롬비아, 세네갈과 한 조에 배정되며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상당히 운이 좋은 배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월본은 콜롬비아에게 1-2로 승리하며 유리한 위치를 점했고, 세네갈에게도 역전에 재역전을 반복한 경기 끝에 2-2로 비기면서 1승 1무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1-0으로 패배하는데, 이 경기 막판에 세네갈vs콜롬비아 경기에서 콜롬비아가 이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월본 선수들은 볼돌리기를 하며 경기를 천천히 끌었고, "1승을 챙기고 싶었던 폴란드와,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16강 진출이였던 월본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폴란드도 이를 사실상 방조하였다. 결과적으로 콜롬비아가 세네갈에게 이기며 월본은 페어플레이 점수에서 앞서 세네갈을 제치고 16강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는 "볼고그라드의 수치"라고 불리며 국내외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어쨌든 16강에는 진출하였으나 16강에서 만난 벨기에한테 2대3으로 역전패를 당하며 8강 진출은 또 좌절되었다. 16강전에서 월본은 자신들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초반 경기를 밀리면서도 후방에서의 정확한 패스와 빠른 측면자원을 이용한 공격이 돋보였고 결국 후반전에 그 강점을 이용해 득점까지 성공하였다. 하지만 펠라이니 투입 이후 벨기에의 피지컬을 이용한 공격에 결국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래도 월본 국내에서는 아쉽긴 하지만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운 성적이기에 나쁠것은 전혀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로서 1994년 이래 이어지고 있는 8년 주기 16강 진출퐁당퐁당기록도 이어지게 되었다.

2010년대의 아시안컵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는 결승전에서 호주와 대결하게 되면서 태평양 더비가 성사되었다. 월본에서 엄청난 관심을 모은 이 경기는 2대1로 끌려다니며 패배하는 듯 했으나 종료 직전 연달아 터진 두 골로 2대3 역전하여 우승을 이뤘다. 도하의 기적 항목 참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졸전과 달리 2015년 호주 아시안컵에서는 3위를 기록하며 금세 빠른 회복을 보여주었다. 어째 3-4위전만 가면 다 3위한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이후에는 2019 UAE 아시안컵에서 적어도 4강을 목표로 하며 팀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천천히 아시아 최강이라는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팀을 정비중에 있었다. 그 뒤 2019 아시안컵에서는 조별 예선에서 3전전승(북한을 6대0으로 뭉겠다.)을 거두고 16강 이라크전 1대0 승리, 8강전 한국전 1대0 승리, 4강전 이란전 3대0를 거두며 착실하게 강팀의 면모를 보이며 올라왔지만 결승전에서 개최국 카타르에게 3대1 기습적인 패배를 당해 준우승에서 고배를 삼켰다. 그래도 목표였던 4강은 달성한데다 라이벌 한국, 호주보다 더 좋은 호성적이기에 국내 반응은 그리 나쁘지는 않다.

라이벌

대한민국 : 한월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대표적인 호적수로, 한월전은 동아시아 최고의 더비 매치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과 월본 모두 한국계이기에 프랜들리 더비 성격을 띄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경전도 많이 일어나는 더비이다.

한월전의 시초는 꽤 오래전부터 나타났다. 192~30년대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경성축구단과 친선전을 몇 차례 가진 기록이 있는데, 월본이 11전 6승 2무 3패로 우세였다. 그 이후 1940년대부터 전쟁 여파로 인해 한월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가 1950년대부터 재개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월본이 24전 13승 4무 7패로 우세했으나 1980년대부터 한국 축구 실력이 향상되기 시작하자 명승부가 여러번 나오는 등의 발전이 이뤄졌다. 현재까지도 아시안컵이나 월드컵 예선에서 만나면 아주 뜨거운 더비가 이뤄지고 있다.

총 전적은 74전 38승 11무 25패로 월본의 우세.

호주 : 태평양 더비

2000년대 들어서 주목받기 시작한 더비다. 호주의 축구 실력이 2000년대부터 급격히 상승하고 있고, 호주축구협회는 이에 따라 월본축구협회와 함께 공조하여 양국 및 아시아의 축구 발전을 위해 호주-월본간 더비를 공식화하고 인기몰이를 위해 노력중이다.

총 전적은 24전 11승 5무 8패로 백중우세. 그러나 월드컵 예선에서는 월본이 호주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편이다.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와의 라이벌 더비 매치는 1960년대까지는 실력과 인기를 동반한 더비였지만, 현재는 급격히 몰락해 이름만 남은 더비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부터 시작해 이웃국가로서 꽤 빈번한 라이벌리를 가지게 되었고, 실제로 월본과 인도네시아는 역사적인 문제[4]도 있기 때문에 축구 더비의 열기가 매우 뜨거웠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인도네시아 축구가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더비로서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부터는 완전히 월본의 일방적인 우위가 자리잡으며 인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1년에 1번 경기가 있을까 말까 하다가 2000년대부터는 10년에 서너번 정도 하는 중으로 완전히 축소되었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월본의 축구 발전 시기를 상징한 더비였기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명맥은 잇고 있는 중이다. 가장 최근의 경기는 2019년 8월 25일 인도네시아 겔로라 붕 카르노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이며, 월본이 7대0으로 승리하였다.

총 전적은 38전 26승 5무 8패로 월본의 압도적우세.

주요 선수

과거

  • 성우진 : 월본 축구의 아버지. 1918년 출생하였다. 이후 축구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동네에서 축구를 즐겼으며, 이후 관계자의 눈에 띄어 도유종합축구구락부에 1931년 입단하고 그 뒤로 좋은 활약을 하였다. 이후 1934년 이집트와의 예선 승리를 주도하여 이탈리아 월드컵에 진출하였으나 헝가리에 3대0로 패배하며 탈락하였다. 그러나 혼자 월본의 유효슈팅을 2개나 만들어 내면서 분전했다. 그 뒤로도 1938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와의 월드컵 예선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프랑스 월드컵에 진출하였으나 이번에도 헝가리에 대패하며 승리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이후 전쟁으로 인하여 축구선수 활동을 중단하였으나 1955년 복귀하여 노장으로서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재부흥을 이끌었으며,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40세의 나이로 활동하며 월본 월드컵 사상 첫 승점을 얻어냈다. 이후 은퇴하였고,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공훈을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후 2009년에 사망하였으며 장례는 축구협회장으로 치루어졌으며 여러 정계 인사와 스포츠계 인사들이 추도하였다. 현재는 월본 국립청룡원에 안장되어 있다.
  • 민태훈 : 1950년대부터 활동하여 전쟁으로 인해 침체된 월본 축구를 다시 살린 선수. 1938년 출생하였으며 1955년 도신설축구종합단에 입단하며 데뷔하였으며 이후 1958년 스웨덴 월드컵부터 1974년 서독 월드컵까지 출전하며 월본 축구의 부흥을 이끌었다. 특히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마지막 경기였던 멕시코전에서 월본 사상 월드컵 첫 골을 넣으며 무승부를 이끌었고 사상 첫 월드컵 승점을 얻어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 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월본축구협회 상임고문을 거쳐 2012년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자유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스포츠 발전에 힘썼다. 2020년부터 정계를 은퇴하고 다시 축구계로 복귀, 현재는 서번 유나이티드의 상임고문직을 맡고 있다.
  • 이상열 : 1980년대부터 활동하며 월본을 월드컵 연속 진출 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1961년 출생하였으며 1980년 주곤 청룡에 입단하였고 이후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2골을 넣으며 에이스 역할을 하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 고군분투 하였으나 한국에 패배하여 예선 탈락하였다. 하지만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오우현과 함께 공격수 투톱을 이루며 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1999년 은퇴한 뒤 해설가로 데뷔하였다. 현재는 ABN 소속 스포츠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 오우현 : 1969년 출생, 월본 축구 최다출전자이자 현재의 월본 대표팀을 정착시킨 선수이다. 월본 역대 축구선수 중 하나로 불리며, 오우현의 골로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0:1로 이기는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1991년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 입단하였으며 1994년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리버풀에 입단하여 활약했다. 이후 2004년 아시안컵에서 월본을 우승시키고 국가대표 은퇴하였으며 2006년 마지막으로 활동하고 있던 구단인 FC 레드불 잘츠부르크에서도 퇴단하며 축구선수 은퇴하였다. 이후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도유 FC의 감독으로 활동했으나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임하였다. 이후 2015년부터 리버풀 엠버서더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우현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축구 유망주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 유성일 : 1974년 출생, 월본 축구 최다득점자이며 월본 축구 사상 최고의 공격수이다. 1994년 오우현과 함께 활약하며 16강 진출을 이끌며 화려하게 20세의 나이에 데뷔하였다. 이후 1995년 이탈리아 세리에 리그 AS 로마 입단, 1998년 바르셀로나 입단을 거쳤다. 바르셀로나에서 좋은 활약을 하며 아시아에서 온 폭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2002년 첼시 이적, 2005년 아우크스부르크 이적을 거쳐 2009년 은퇴하였다. 현재는 월본축구협회 유스위원장직으로 있다.
  • 유민선 : 1975년 출생하였으며 이후 1994년 청하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며 프로데뷔 하였다. 이후 청하 유나이티드의 에이스로 활약한 뒤 1999년 네덜란드 아약스로 이적하였다. 2002년 한월월드컵에서 16강을 이끌었고 2010년 팀을 16강에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를 은퇴하였다. 2003년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과 라이벌로 관심을 받으며 맨체스터 더비를 이끌었다. 이후 2011년 선덜랜드로 이적하였으며 2013년 축구선수 은퇴하였다. 현재는 JBCN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있다.

현재

  • 이민성 : 월본 축구의 리빙레전드. 1988년 출생하였다. 1994년 TV 프로그램 축구소년 일대기에서 처음 모습을 보인 이후 축구 신동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유소년 축구감독의 소개로 스포츠 매니지먼트사와 함께 유럽으로 갔으며, 1997년 FC 포르투 유스에 입단하였다. 이후 2005년 FC 포르투 성인팀에 올라와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프리메이라 리그를 폭격한 뒤 2008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였고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로도 수많은 팀으로부터 이적 제안을 받았으나 본인은 "나는 아틀레티코의 레전드다"라고 선언하며 아틀레티코에 잔류했다. 월드컵 무대에는 2006년 월드컵 데뷔하였으나 팀은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그 뒤 2010년에는 2골을 넣으며 팀 16강을 견인하였고 2011년 아시안컵 결승골을 넣기도 했다. 2018년에도 팀을 16강으로 이끌었으나 벨기에에게 패배하여 4강에 오르지는 못했다.
  • 흑치현철 : 월본의 정상급 센터백. 1992년 출생한 뒤 고교 졸업 후 2010년 앨런 덴마크 수페르리가의 FC 쾨벤하운에 입단하였다. FC 쾨벤하운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고, 2014년 이탈리아의 AS 로마로 이적하였다. 이후 AS 로마에서 성장하였고 현재도 리그에서 상위 수준의 수비수로 꼽히고 있다. 신장은 193cm.

역대 전적

월드컵

④⑯

FIFA 월드컵 역대전적 서열 : 18위

연도 결과 순위 승점 경기 득점 실점
1930년 조별리그 14위 0 3 0 0 3 0 13
1934년 조별리그 15위 0 1 0 0 1 0 3
1938년 조별리그 14위 0 1 0 0 1 0 5
1950년 출전 금지
1954년 불참
1958년 조별리그 16위 1 3 0 1 2 1 8
1962년 예선 탈락
1966년 기권
1970년 조별리그 12위 2 3 0 2 1 1 3
1974년 예선 탈락
1978년
1982년 조별리그 21위 1 3 0 1 2 2 6
1986년 예선 탈락
1990년 4강 4위 10 7 3 1 3 9 11
1994년 16강 12위 6 4 2 0 2 5 6
1998년 조별리그 20위 3 3 1 0 2 2 4
2002년 16강 12위 6 4 1 3 0 6 3
2006년 조별리그 22위 3 3 1 0 2 3 6
2010년 16강 9위 7 4 2 1 1 4 2
2014년 조별리그 24위 2 3 0 2 1 1 2
2018년 16강 15위 4 4 1 1 2 6 7
2022년 ? ?
합계 출전 14회 / 4강 1회 45 46 11 12 23 40 79

자세한 사항은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항목 참조.

아시안컵

★★★★★
②②②②②
③⑧
아시안컵 역대전적 서열 : 1위

연도 결과 순위 승점 경기 득점 실점
1956년 준우승 2위 4 3 2 0 1 6 5
1960년 준우승 2위 4 3 2 0 1 2 4
1964년 우승 1위 6 3 3 0 0 5 1
1968년 4강 3위 4 4 2 0 2 11 5
1972년 조별리그[5] 5위 4 3 2 0 1 4 5
1976년 준우승 2위 6 4 3 0 1 6 3
1980년 우승 1위 9 6 4 1 1 13 6
1984년 4강 3위 6 6 2 2 2 5 4
1988년 우승 1위 9 6 3 3 0 5 1
1992년 준우승 2위 6 5 2 2 1 8 3
1996년 8강 5위 9 4 3 0 1 7 3
2000년 4강 3위 10 6 3 1 2 9 6
2004년 우승 1위 14 6 4 2 0 13 6
2007년 8강 7위 5 4 1 2 1 7 5
2011년 우승 1위 14 6 4 2 0 16 7
2015년 4강 3위 10 6 3 1 2 10 8
2019년 준우승 2위 18 7 6 0 1 12 6
2023년 ? 출전 확정
합계 출전 17회[6] / 우승 5회 149 31 49 16 17 139 74

  1. 물론 다른 국가들에게서 "니가 뭔데 감히 아시아의 자랑이냐!"는 항의를 받기도 하지만, 아시안컵 역대전적 서열 1위기도 한데다 4강 및 16강 진출의 위업 덕분인지 실력 면에서는 깔게 없는게 사실이다.
  2. 현재의 도유 FC의 뿌리가 되는 구단이다.
  3. 여기에는 뒷사정이 존재하는데, 원래 월본 축구계는 월드컵 개최 소식을 듣고 참가를 검토했으나,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과 아시아 축구의 저발전 등으로 인해 참가 신청이 무시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FIFA 회장 쥘 리메가 유럽 국가들에게 월드컵 참가를 부탁했으나 유럽 국가들은 거절하고 있던 상태였고, 더운 밥 찬 밥 가릴때가 아니였던 FIFA는 월본의 참가를 승인하며 월본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초대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전월본제국의 인도네시아 침공 및 식민지 문제 등
  5. 월드컵에 집중한다는 명목으로 대학, 실업 선수들을 출전시켰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현재 월본의 유일한 아시안컵 조별리그 탈락 기록이다.
  6. 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