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위셔트
영어: William Wishart
파일:William Wishart.jpg
윌리엄 위셔트의 모습
인물 정보
본명 윌리엄 마스덴 위셔트
(William Marsden Wishart)
왕호/별칭 모험백 윌리엄
(Graff the Adventure)
생몰연도 1695년 7월 11일 ~ 1765년 2월 5일 (71세)
재위 기간 니우시레타 백작
(1736 ~ 1765)
니우시레타의 1대 백작
(1736 ~ 1765)

윌리엄 위셔트(영어: William Marsden Wishart)은 니우시레타의 초대 백작이며, 지금의 보르지아 왕국왕실을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시레타 섬에 정착을 시도한 몇 안되는 유럽인 이주민들 중 한명 이었으며, 이주민 사회에서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었다가 시레타 섬의 군주로서 추대되었고, 이에 본인 스스로가 신백작(新伯爵, Nieuw Graaf)을 자처하면서 독립주의 성립을 주도했다.

괴짜 탐험가

1695년 네덜란드 호란험에서 태어난 그는 상인 집안이었던 풍조를 따랐으며,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원으로서 당시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와의 무역 관계 감소, 일본의 쇄국 정책으로 정체를 겪고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밀리기 시작하자 이러한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아시아의 중계 무역지를 넓히는데 힘을 쓰기 시작했다. 이에 윌리엄 위셔트는 무역로 확장에 자원하고서는 선원 200여 명, 함선 3척을 거느리고 태평양으로 후추 무역의 투자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출하였는데, 이는 그가 단순히 동인도 회사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해서 자원한 것이 아닌, 그 나름대로 믿고 있던 이상향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는 1731년부터 1735년까지 약 4년간 각각 아프리카 황금 해안과 희망봉, 네덜란드령 동인도을 거쳐 폴리네시아 지역으로 진입하였고 마침내 1735년 8월에 사모아 제도시레타 섬을 발견하고서는 정박을 시도했다. 그는 이곳에 상관을 설치하고서는 원주민들과의 평화적 교류를 시도했으며 이들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우호자(Faauoga Taru Mai)로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시레타 섬을 과거 이곳에 본인보다 먼저 도착했던 탐험가인 토머스 시레타의 이름을 따서 니우시레타(Nieuw Sireta)라고 명명짓었다.

폴리네시아의 백작

원주민들과 선원들의 갈등을 조율하고 화합을 중시한 그는 양측 모두 선망이자 존경 받는 인물로 거듭하였다. 그는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원주민들과의 협상을 통해 니우시레타의 대표자가 되었으며, 자신을 따르던 선원들에게 이주를 종용하였다. 대부분의 선원들은 본토에서의 생활 보다 이곳에서의 이상향을 건설하는 것이 옳다 판단하였고, 그를 지도자로서 추대하였다.

그는 일부 선원들에게 서신을 보내 네덜란드로의 복귀를 시도했고, 네덜란드의 연방 의회에 니우시레타의 주 인정을 요청했고 영국의 급성장으로 인하여 경제적인 혼란을 겪고 있던 네덜란드 본토로서는 변방에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지역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기에 1736년, 그를 형식상으로 니우시레타 백국의 대의장(Raadpensionaries of Nieuw Sireta County)으로 인정하고 백작 작위를 수여하였다.

공식적인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은 그는 혼란한 네덜란드의 본토 상황을 뒤로 하고서는 시레타 섬의 서구화를 추진하였다. 그는 먼저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주장하면서 가톨릭교도와 신교도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에 대한 포고령을 내렸다. 또, 시레타 섬 원주민들의 종교 개종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화합 정책은 그의 백작 재위기 동안 이주민과 원주민들의 갈등을 최소화 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해냈다. 이후 유럽 양식의 청사와 건축물을 세울 것을 지시하고 본국에서 넘어온 동식물의 재배를 시도하였다. 한편, 그의 종교 정책의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의 망명을 많이 시도했다.

1744년에는 미와탕기 조약(The Treaty of Miyatangi)을 원주민 세력과 이주민 세력의 동등한 관계에서 체결토록 지시하였으며, 원주민들은 니우시테라의 보호를 받고 자주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는 내용을 담아서 양측에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1]

사망과 평가

1765년, 자신만의 이상향을 건설해 나가던 윌리엄 위셔트는 지금의 왕궁인 니우아젠타 궁(Nieuw Azenta Paleis)[2]의 건축을 시찰하던 도중, 과격 백인우월주의자였던 발타자르 스탠퍼드(Balthazar Stafford)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나의 부덕함이 내 목숨을 자초했으리라, 그를 탓하지 마라."(Mijn deugd zal mijn leven hebben gebracht, geef hem niet de schuld.)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시레타 섬 전역에 애도와 슬픔을 가져 왔고, 원주민 사회는 그에게 화합자(Lotogatasi Taru Mai)라는 별칭을 지었다. 그를 따르던 이주민들은 모험백(Graff the Adventure)이라 부르면서 사후 그를 추대하였고, 발타자르 스탠퍼드를 임시 법정에서 일방적으로 사형을 선고하여 교수형을 처하도록 했다. 백작의 지위는 그의 장남인 윌리엄 2세가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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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그러나, 이러한 조약문을 왜곡하여 이후에 과격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원주민 사회를 강제로 개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시레타 내전을 시도한 안타까운 빌미가 되기도 했다.
  2. 1960년대의 혼란으로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