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상 시대 (윤파란 세계관)

조선국(1937~1941)
朝鮮國 | State of korea
대한민국(1941~1945)
大韓民國 | Republic of korea
국기 국장
화평재건
和平再建
한국 침공 이전 이전
멸망 이후
대한민국
자유대한민주정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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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4월 21일 ~ 1945년 3월 17일
상징
국가 우리의 기상은 이 고토에
국화
벛꽃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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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침공 1937년 1월
정부 수립 1937년 4월
왕정 축출 1941년 8월
서울 진공 작전 1944년 6월
항복 및 멸망 1945년 1월

지리
수도
서울시
최대 도시
서울시
면적
220,903km²
위치
유라시아 대륙
인문환경
민족
한국인
공용어
한국어,일본어
국교
없음
종교 분포
없음
군대
신국가건국군
연호
서력 기원
정치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공화제
입법부
한국통감부
경제
통화
대한민국 원





개요

일본군이 1937년 한국을 침공한 뒤 세운 괴뢰정부로, 일본에 협력하여 국가원수로 앉아있던 사람이 윤호상이었기에 통칭 윤호상 시대라고 부른다.

상세

1937년 한국을 침공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손에 넣게 된 일본 제국은 한반도 지역의 원할한 통치를 위해 괴뢰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한다. 당대에는 이미 타국을 침공하여 합병하는 것이 국제법상 불법이었으며 한국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의 명분과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을만한 정권을 세우기로 하는데, 이때 일본의 눈에 띈 것이 아직까지 잔존하고 있던 왕당파 세력이었다.

겉으로 '왕당파 세력들이 일본을 이용하여 공화파 정권을 전복시키고 왕조를 복원하였다' 라고 주장하면 국제사회의 비난도 피해가고 한국인들의 저항도 억누를 수 있을거라 생각한 일본은 황족이자 마지막 황태자이기도 했던 '이연성'을 포섭하여 재빠르게 정부를 구성하고 '조선 국왕'으로 즉위시키고 왕당파 세력들에게 나름대로의 감투도 주었다. 이들 중 한명이 바로 윤호상으로 이는 일본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알아서 자발적으로 협력한 것이었다.

그들의 기대, 그러나 실상은...

비록 일본군에 의해 세워진 정부였으나 윤호상을 비롯한 왕당파 세력은 기존 임시정부를 뼛속까지 증오했던 탓에 진심으로 자신들의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믿고 있었다.

명목상 정부 요직을 차지했던 왕당파 세력들은 자신들의 뜻을 펴 볼려고 했으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직위에 불과, 실권은 모두 현지에 파견된 일본군들이 가지고 있었다. 당장 동시기 중국에서 대놓고 괴뢰정부라고 언론에서 깠을 정도로 이들의 괴뢰정부라는 한계는 명확했고, 이에 실상을 깨닫고 실망한 몇몇 왕당파들은 야반도주를 하여 중국으로 도망치기 까지 한다.

그러나 괴뢰정부의 문화부장관을 지내기까지 한 윤호상은 사람들이 탈주를 할 때까지도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다고 믿었고, 되려 탈주한 사람들을 국왕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반역자들로 매도하기까지 한다..

허나 이런 윤호상의 굳은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마는데...

일본의 배신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개시하고 일본에 대한 국제적 여론이 극도로 험악해짐에 따라 일본군이 아시아 곳곳에 세운 괴뢰정부들의 평판도 땅에 떨어지는데,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충칭에 있던 한국 망명정부를 지지하는 여론이 늘어나자 일본은 한반도에서 세력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이 세운 정부가 진짜 정통임을 강조하기 위해 괴뢰정부의 국체를 바꾸는 짓거리를 벌인다.

그것은 다름아닌 1937년 내려진 '대한민국'의 간판을 다시 내거는 것으로, 충칭 망명정부에 대항해 자신들이 '진짜' 대한민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국기도 다시 태극기로 바뀌며 기존에 즉위했던 조선 국왕도 다시 끌여내려지고 군주정은 다시금 공화정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윤호상은 그제야 일본의 실체,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지만 이제와서 울고불고 해봤자 할 수 있는건 없었다.

그동안 왕당파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탈주를 한 탓에, 남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 윤호상이 그대로 '자칭' 정통 대한민국의 주석으로 취임한다. 윤호상은 일본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감을 표출, 일본이 임명한 정부 내각 등용을 거부하는 등 계속해서 일본의 말을 일부로 듣지 않았고 일본은 윤호상도 축출하고 또 다른 이를 주석 자리에 앉힐 계획을 세우고, 그 시간에 연합군(한국.중화민국.미국)은 한국에 대한 진격을 검토하고 있었다.

멸망

1945년 2월 15일, 연합군의 '서울 진공 작전'이 개시되었다. 말그대로 한반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고토를 탈환하는 작전으로 한참 전력을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로 내보낸지라 한국 주둔 일본군은 말그대로 종이호랑이나 다름없었고 연합군은 성공적으로 상륙을 성공시킨 뒤 인천을 점령하고 서울로 쾌속 진격을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폭격에 정신을 못차린 일본군은 혼비백산 본국으로 철수를 시작하고 윤호상은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 경기도 광주로 도주하던 중 미군에 생포당한다. 일련의 군사 작전으로 사실상 윤호상 정권은 종말을 고했으며, 윤호상은 전후 서울에서 열린 전범재판에서 일본에 대한 부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