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윤파란 세계관)

대한민국
大韓民國 | Republic of Korea
국기 국장
자주독립
한국 독립 전쟁 이전
멸망 이후
대한제국
윤호상 시대
위치
width: calc(100% + 5px)
1919년 9월 11일 ~ 1937년 1월 2일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무궁화
역사
[ 펼치기 · 접기 ]

한국 독립전쟁 1919년
건국 1919년
제 1차 한일전쟁 1927년~1928년
한국 침공 1936년

지리
수도
서울시
최대 도시
서울시
면적
220,903km²
위치
유라시아 대륙
인문환경
민족
한국인
공용어
한국어
국교
없음
종교 분포
없음
군대
한국국민군
연호
서력 기원
정치
정치 체제
공화제(주석제)
입법부
대한민국 의정원
경제
통화
대한민국 원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정치체제이자 한반도에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이다. 1937년까지 존속했다.

상세

한국 독립 전쟁 당시 공화파 세력들이 충북 지역에 세운 임시정부가 모태이다. 제정 정부가 항복하고 붕괴한뒤, 서울에 입성한 임시정부는 임시 대통령을 추대하고 새로 의회를 세워 헌법을 제정해 정식 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체제에 반발한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인해 정식 헌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임시방편으로 임시 약법을 제정해 국정을 꾸려나가야 했다.

임시정부의 사실상 여당은 한국 독립 전쟁 당시 세워진 한국독립당으로, 한독당은 임시정부 수립부터 붕괴까지 여당 자리를 놓친적이 한번도 없다.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국민군은 사실상 한국의 국군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국독립당은 사실상 정부나 마찬가지였다. 국가원수도 명목상 임시대통령 등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최고권력자는 한국국민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원장이었던 김구는 건국부터 멸망까지 이 자리를 놓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역사

정부수립

이승만 탄핵 사태

초대 임시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쿠데타를 모의한 사실이 발각되어 대통령에서 탄핵된 사건이다. 이후 박은식이 대통령직을 역임하긴 했으나, 얼마 안있어 사임하고 대통령직을 없어버렸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일련의 사건들은 종전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강력한 대통령중심제 국가가 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1차 한일 전쟁

한국 독립 전쟁 이후에도 일본 제국은 한반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사사건건 한국과 충돌하곤 했다. 1925년 만주 지린성에서 벌어진 한일양국군의 충돌은 뒷날 일어날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렇게 양국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1927년 4월, 동해를 순찰하던 일본 해군 군함이 의문의 폭발로 인해 침몰하는 사고가 터졌다. 훗날 조사로 보일러실이 폭발한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으나 일본 제국은 이를 한국군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렇게 결국 양국간의 전면전이 터진다. 초반엔 일본군이 우위를 점했으나 한국군의 모험을 건 기습 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슬슬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1928년 한국이 시코쿠를 점령하고 규슈 쪽으로 북진하기 시작하자 일본 측에서는 결국 평화 협정(사실상의 항복)을 제안한다. 그렇게 전쟁에서 사실샹 승리한 한국은 일방적으로 한국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해 남만주 지역의 이권을 모조리 독점하는 등 막대한 이익을 가지게 되지만 이는 되려 일본 군부 내 극우세력의 폭주를 불러와 역으로 훗날 한국이 침공 당하는 계기가 된다.

만주 사변

1931년 일본이 1928년 맺은 평화 협정을 께뜨리고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자, 한국은 북쪽과 동남쪽이 모두 일본 세력으로 둘러싸여 지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 된다. 당시 일부는 곧 일본이 한국을 재침공할거라 걱정했고,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현실이 된다.

한국 침공(혹은 제 2차 한일전쟁)

일본 제국은 1차 한일전쟁에서 패배한뒤에도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일본은 극우 군부 강경파가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지난 전쟁 패배의 설욕을 씻기 위해서라도 한국을 재침공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으며 당시 한국 정부는 경계를 하긴 했으나 지난 전쟁의 승리로 인해 설마 진짜로 전쟁이 일어나겠어? 하는, 자만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전쟁의 패배, 더 나아가서는 중일전쟁의 직.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멸망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1936년 12월 9일, 일본은 부산과 평안남도 제물포 두 곳에 동시에 상륙하여 침공을 개시한 것이었다. 전방에서 뒤를 찌를거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한국정부는 연이여 패배에 패배를 반복, 결국 침공 한달만에 서울을 함락당하고 만다. 처음엔 수도를 평양으로 옯겨 계속 항전할 의지가 있던 한국정부였으나, 곧이어 평양까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주석 김구는 60만 장병과 그외 정부 관료들과 함께 대탈출을 감행, 한반도를 빠져나가고 그렇게 한반도 전역이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후 일본군은 한반도의 원할한 통치를 위해 괴뢰정부를 수립한다.

정치 체제


대한민국 국가원수
임시대통령
제1대 제2대
이승만 박은식
육해군대원수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동휘 안창호 송병택 양기탁
주석
제1대 제2대
이동녕 김구
대한제국 · 대한민국 대통령

건국 직후인 1919년부터 박은식이 사임할 1924년까지는 대통령제, 일종의 과도기였던 1924년~1927년까지는 과두정에 가까운 정부위원회, 김구가 명목상으로도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는 동시기 중국 국민정부와 비슷하게 주석제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누가 국가원수 자리에 오르든 그는 얼굴마담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한국국민군사위원회 위원장인 김구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승만이 당시 불만을 품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1927년 이후로는 김구가 명목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임시정부 멸망 직전까지 김구는 꽤나 방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의정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회 역할을 했던 기관으로, 총 150명의 의원을 뽑았다. 1937년 한국 침공으로 해체되었다.

행정구역

1시 7부 13도로, 수도는 서울시였으며 인천부, 부산부, 광주부, 평양부, 개성부 등의 지방 대도시들이 있었으며 제국 시절에서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