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청조 멸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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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난
義和團之亂 | Boxer Rebellion

날짜
1899년 2월 19일 ~ 1901년 9월 7일
장소
청나라 화북지방 일대
원인
의화단의 폭동 및 서양인 학살
교전 세력
청나라 조정 (서태후파)
의화단
대한국
황제 및 동남자보
  • 팔국연군

대영제국
프랑스 공화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지휘관
부준
서태후
육현
유록
동복상
섭사성
송경
마옥곤
단군왕
마복흥
마복상
이병형
광종
윤경
허병오
김제순
양일훈
어연창
조경세
광서제
이홍장
원세개
영록
허응종
장지동
유곤일
에드워드 시모어 경
클로드 맥도널드
알프레드 가젤리
로베르 니벨
알프레트 폰 발더제
애드너 채피
후쿠시마 야스마사
병력
30만명 한국군 23,800명
연합군 41,000여명
피해규모
청 관군 2만여명
의화단원 다수
한국군 사상자 120여명
연합군 사상자 수백여명
결과
한국군과 연합군의 승리, 신축조약 체결
영향
광서제 복위

개요

의화단의 난은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반외세, 반기독교 기치를 내건 의화단과 이들을 등에 업은 서태후의 청나라 조정이 황제복위를 외치는 한국군은 물론 이권 침해에 반발한 8개국 연합군과 벌인 전쟁이다. 명분과 실력 두가지에서 모두 패배한 서태후 조정은 한국군과 연합군에게 수도인 베이징까지 유린당했다. 이후 청나라는 신축조약을 체결하였고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게된다.

전개

서태후의 역습

광서제의 변법자강운동을 보수파의 쿠데타를 통해 좌절시킨 서태후는 반대로 한국 정부와 공모한 원세개의 쿠데타로 축출되어 승덕 피서산장에 연금되었고 광서제는 한국으로 납치되었다. 절대권력을 갖게된 원세개는 서태후편에 서있던 보수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으며 한편 반외세, 반서양 성향을 갖고있던 의화단이 청에서 서서히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서태후를 비롯해 원세개의 서슬퍼런 숙청으로부터 살아남은 보수파 권신들은 의화단을 이용하기로 하고 광서제의 실종을 빌미로 보국공 부준을 몰래 황제로 선포하여 부준의 밀서를 보내 의화단을 끌어들일 준비를 마친다.

의화단은 차근차근 규모가 커져갔고 부준의 밀서를 통해 명분까지 얻었다. 이에 원세개 정권은 의화단을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나 오히려 의화단의 수는 더욱 늘어났고 1월 중순 승덕에 주둔하던 원세개의 군대는 뒤늦게 서태후와 부준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수만명의 의화단에 쫓겨 북경으로 축출당한다. 의화단은 1900년 2월 19일, 북경을 비롯한 직예성 일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고 의화단 운동의 막이 오른다.

직예성의 의화단원들은 역적 원세개 타도를 외치며 그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원세개는 이미 천진의 한국 공사관로 도주한 뒤였다. 그러나 원세개를 따르던 신료들은 엿새만에 모두 의화단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2월 30일, 서태후와 부준은 자금성으로 환궁했고 부준은 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연호는 보경(保慶)으로 정해졌다.

의화단이 봉기를 일으키자 서구 열강은 공사관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북경에 군대를 진입시켰다.

8개국 연합군 결성

한국군의 참전

사실 이 전쟁에서 한국은 위치가 매우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 팔국연군에 소속된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는 팔국연군을 배척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의화단 진압 내내 그들과 충돌하지 않았고 오히려 같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이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취한 이유는 팔국연군에 속한 국가들과 한국의 목적이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상이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광서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에 참전 명분은 황제를 몰아낸 반역자를 처치하고 황제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국연군은 각 국가가 의화단의 폭동과 학살로 인해 이권상 피해를 보자 이를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마디로 한국과 팔국연군은 참전한 이유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실제로 신축조약에서 한국측의 요구로 삽입된 내용은 ‘대청국의 온존’과 ‘황제의 친정체제 인정’ 뿐이었다. 물론 신축조약을 조정한 대가로 화북지방 일부와 내몽골, 대만 섬의 영유권은 모조리 한국 차지가 되었지만 한국은 팔국연군처럼 최대한 자신들에게 조약을 유리하게 짜맞추려는 이권다툼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

6월 17일 톈진의 다구 포대가 함락된 직후 한국군도 인천에서 출발한 수송함들이 약 5천여명의 군인을 싣고 천진에 도달했다. 그 후 천진에서 팔국연군과 함께 싸우고 있던 3천여명의 한국군과 합류하였고 천진의 의화단과 청 관군들을 격파하며 시내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한편 1만여명에 이르고 기병대와 차량, 신형 화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인 동북군은 산해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놓인 도시들의 청관군과 의화단을 무찌르며 신속하게 산해관으로 향했다.
6월 23일, 동북군은 산해관에 도달하였고 그 포 25문을 배치한뒤 청 황제의 어기를 흔들며 성문을 열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이때 광서제는 산해관에서 10km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문을 열면 즉시 북경으로 향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비대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자 선봉대가 성문으로 접근하였으나 아무도 없었다. 의화단의 난동으로 산해관조차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던 것. 이에 격전을 각오했던 동북군은 너무나도 손쉽게 산해관을 넘었고 광서제는 국가적 요충지인 이곳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동북군은 이틀동안 진황도에 머문뒤 당산으로 향했다.
천진은 7월 14일 한국군과 팔국연군의 손에 떨어졌다. 한편 팔국연군이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해 진격을 주저하는 동안 한국군은 당산 방면의 동북군과 합류하기 위해 일주일간 보급을 하며 휴식하다 증원군 3천명과 함께 21일 북경으로 진격했다. 영국은 한국군에게 북경으로의 진격을 자제할 것을 부탁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천진군 도원수 윤경은 ‘우리에겐 우리의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천진군은 약 6만명의 청나라 관군과 그보다 더 많은 의화단원들을 격파하며 열흘만인 31일 자금성으로 들어왔고 이튿날인 8월 1일에는 동북군도 광서제와 함께 북경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