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동방)


대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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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제3대 황제
광종 열황제 | 光宗 烈皇帝
출생 1849년 8월 13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사망 1927년 12월 2일 (78세)
대한국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능묘 위릉(威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손
1858년 4월 9일 ~ 1861년 2월 9일
(문조 26년 ~ 문조 29년)
대한국 황태손
1861년 2월 10일 ~ 1877년 2월 9일
(문조 29년 / 건창 원년 ~ 문조 45년 / 건창 17년)
대한국 황태자
1877년 2월 9일 ~ 1889년 12월 31일
(건창 17년 ~ 원화 13년)
대한국 황제
1890년 1월 1일 ~ 1920년 12월 31일
(건안 원년 ~ 건안 31년)
대한국 태상황
1921년 1월 1일 ~ 1927년 12월 2일
(연강 원년 ~ 연강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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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全州 李氏)
행(﨨)
부모 부황: 헌종 성황제
모후: 효정성황후
부인 효신열황후
후궁
10명 [ 펼치기 · 접기 ]
선귀비 엄씨, 화비 한씨, 은비 윤씨, 영비 정씨, 귀인 기씨, 귀인 윤씨, 귀인 임씨, 숙용 김씨, 숙원 황씨, 숙원 안씨
자녀 12남 12녀 (13남 14녀)
묘호 광종(光宗)
시호 통천무평정이극민태명순강사직공의경현정곤입효열황제
(統天武平正夷克愍太明順康使直恭懿敬賢定坤立孝烈皇帝)
칸호
ᠣᠩᠭᠣᠨ ᠠᠭᠤᠵᠢᠮ

온곤 우짐
연호 건안(建安, 1890년 ~ 1920년)

개요

원건성세
元建盛世

대한국 제3대 황제.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열황제(烈皇帝).

배우자/자녀

  • 정후: 효신열황후(孝神烈皇后) 서씨
  • 후궁: 정목귀비(貞穆貴妃) 엄씨
    • 온양왕 이후 (1871~1918)
    • 화순공주 (1873~1966)
    • 온산왕 이웅 (1875~1920)
    • 성왕 이화 (1879~1952)
    • 명순공주 (1880~1979)
  • 후궁: 장순명비(章純明妃) 한씨
    • 완순공주 (1874~1942)
    • 석읍공 이학 (1877~1915)
    • 정왕 이균 (1880~1945)
    • 경순공주 (1882~1919)
    • 제순공주 (1885~1961)
    • 송평왕 이제 (1887~1927)
  • 후궁: 성화은비(成和恩妃) 윤씨
    • 영순공주 (1877~1969)
    • 진접왕 이유 (1879~1895)
    • 순복공주 (1879~1966)
    • 건왕 이한 (1883~1944)
    • 흥왕 이곽 (1885~1963)
    • 완왕 이벽 (1888~1980)
  • 후궁: 순명영비(純明榮妃) 정씨
    • 명성공주 (1896~1990)
    • 경왕 이계 (1899~2001)
    • 명화공주 (1902~1940)
    • 명효공주 (1904~1986)
  • 후궁: 소용 임씨
    • 헌순공주 (1872~1947)
  • 후궁: 숙용 김씨
    • 융왕 (1875~1943)
  • 후궁: 숙원 황씨
  • 후궁: 숙원 안씨

평가

뛰어난 통치력을 통해 선황의 유산을 잘 물려받아 한국을 팽창, 제국의 길로 이끌었다. 이 시기 한국은 청나라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해 서구 열강들을 제치고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배타적 영향력을 확인하였으며 한러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본격적인 열강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울러 인구와 자원, 새로 얻은 광활한 영토를 기반으로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유능한 수상들을 발굴하는 등 번영의 시기를 열었다.

하지만 통치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점점 쌓여가는 국민들의 불만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고 억제하는 정치를 편 폭군의 일면도 있었으며 1910년대 후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음에도 권력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명시하지 않아 태자와 수상간의 미묘한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 등 국가 운영 체계가 조금씩 망가져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렇게 쌓인 국가적 모순은 12.10 운동으로 폭발해 한국의 존망이 걸린 사건으로 비화하였으며 황제 자신은 사건에 대해 전혀 통제하지 못한채 무방비한 상태로 있다가 뒤늦게 태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후대 황제와 그 치세의 유능한 수상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었으며 이로인해 진보적 학자들 사이에서는 광종 황제 치세의 팽창과 번영이 속 빈 강정이 될 뻔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