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천녕 황왕
歷代 天寧 皇王
864-1281
정통 황왕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달고왕
864~875
효문왕
875~899
경강왕
899~934
헌문왕
934~938
문혜왕
938~957
차강왕
957~976
신강왕
976~989
8대 9대 10대 11대 12대 13대 14대
경의왕
989~1031
차문왕
1031~1033
천원왕
1033~1039
문성왕
1039~1065
위수왕
1065~1087
신문왕
1087~1100
의공왕
1100~1105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21대
선륭왕
1105~1149
헌공왕
1149~1168
열운왕
1168~1185
성현왕
1185~1205
선혜왕
1205~1211
공상왕
1211~1225
정효왕
1225~1247
22대 23대 24대 25대
충희왕
1247~1264
필간왕
1264~1272
차간왕
1272~1278
신애왕
1278~1281
추존 황왕
익평왕, 승열왕, 대안왕, 구후왕
비정통 황왕
영원군, 칠양군, 홍인왕
역대 후녕 황왕, 역대 신녕 황왕, 역대 천녕 신황, 일우신주 이질금, 현대 천녕 황왕
42대 탐라군왕
초대 진해정윤
익평신성대왕

翼平神聖大王

청해진 대사 재직 당시 표준 영정
시호 익평왕(翼平王)[1]
별호 신성황왕(神聖皇王), 무종대왕(武宗大王)[2]
연호 청천(淸天, 848?~857?)[3]
생몰연도 787?~857 (71세?)[4]
성씨 장(張)
궁복(弓福), 궁파(弓巴)[5], 보고(保皐)[6]
출생지 신라(新羅) 무진주(武珍州) 완도(莞島)
사망지 천녕(天寧) 복성주(福成州) 대야현(大野縣)
역임 직책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 ?-828)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 828-851)[7]
감의군사(感義軍使, 839-851)[8]
진해장군(鎭海將軍, 839-851)[9]
탐라군왕
耽羅君王(848-857)
진해정윤
鎭海正胤(855-857)
  1. 865년, 달고왕이 추숭함.
  2. 천녕사(天寧史) 익평 총서 기준
  3. 연호를 사용한 정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분분함.
  4. 정확한 출생과 계통은 학계에서 분분함
  5. 삼국유사》 기이편 신무대왕 구절에서 유래됨.
  6.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장보고(張保皐)로 표기함.
  7. 흥덕왕이 청해진 설치 승인 및 대사 직책을 제수함.
  8. 달벌 전투에서의 공로로 신무왕이 제수함.
  9. 선왕 즉위에 대한 공로로 문성왕이 제수함.

天下乙 手厓 捄爲理羅
(천하을수애구위리라)
천하를 손에 담기 하리라.[1]

 
대야서기(大野書記) 청천전(淸天傳) 구절 中

익평왕(翼平王, 787? ~ 857)은 탐라국(耽羅國)의 군왕(君王)이자 천녕(天寧)의 실질적 건국자이다. 본래는 신라(新羅) 사람이었으나 당나라로 건너가 무관으로 승진하였고, 828년에는 다시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뒤 동중국해(東中國海)의 해적 격퇴 및 해상 무역을 주도했다. 이후 달벌 전투(達伐大戰)에서 활약하여 민애왕(閔哀王)을 몰아낸 뒤, 신무왕(神武王)을 왕위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허나 신라 왕실과의 혼인 문제로 암살의 위협을 겪은 뒤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탐라로 도망하여 독립 세력을 건설했다.[2] 그 뒤 일본(日本)의 부속 도서들을 흡수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857년, 구주(九州) 정벌을 위해 오노 성 공략전(大野城攻略戰)을 이끌었으나, 공성 과정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달고왕(達暠王)과 측근들이 정벌 전쟁을 수행함으로서 864년에야 천녕 건립에 결실을 맺었다. 이후 '익평'(翼平)이라는 시호로 추숭됨으로서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일대기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고인유언 견의부위 무용. 오수용렬 유명시종.)[3]

 
신무왕의 부탁을 받은 익평왕의 답변으로 알려진 구절.

해양 상업 제국의 무역왕
The Trade King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하버드-옌징 연구소 소장[4]

평민 출신에서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 대국을 건설한 인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후대에나 현대에나 익평왕의 일대기는 크게 추앙받고 있다. 실질적으로 천녕을 건설한 인물은 달고왕[5]이나, 직접 구주 정벌(九州征伐)을 계획하고 몸소 고령의 나이를 이끌고 실천하던 중 전사하였기에 영웅적인 모습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유년 시절

삼국사기(三國史記)》나 《대야서기(大野書記)》에서는 그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익평왕의 출신 가문은 신라에서 5두품 이하로 한미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출생 연도 역시 학계에서 분분하였기에 78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대체로 787년을 그의 출생 연도로 확정짓고 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타고 났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인 장보고(張保皐)도 활을 잘 쏘는 것과 관련이 있기에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참고 1]

위에서 언급한듯, 익평왕의 출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당나라 무관 재직 당시에 대한 기록을 보아 당시 신라(新羅) 서남해안 지역 섬에 목장을 운영하던 귀족들의 생활과 연관시켜 목동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 같이 당나라로 건너가 무관직을 수행했던 정년(鄭年)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바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본인이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 출신일 가능성도 높은 게, 완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곳에 청해진을 설치했다는 것이 개연성이 높은데다 당나라(唐國)에서 기아에 허덕이던 정년이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청해진의 익평왕을 찾았던 사연, 그리고 이후 문성왕(文聖王)이 장보고의 딸[6]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할 때 신라의 대신(大臣)들이 익평왕이 해도(海島), 즉 육지가 아닌 섬 사람임을 지적했던 점을 미루어봤을 때 완도 출신이라고 확정되고 있다.[참고 2]

당나라 무관 및 신라 귀국

일찍 동료이자 의형제였던 정년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가서 군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신라방(新羅坊)이라는 일종의 신라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당은 번장(蕃將)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관으로 기용하기도 하는 등 이민족 포용에 대해 개방적인 국가였다. 익평왕은 입대한 뒤 말을 타고 창 쓰는 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으로 출세하였다. 무령군은 산동 반도에 웅거한 고구려(高句麗)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李師道)를 정벌하려고 만든 부대였는데, 익평왕은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淄靑平盧藩鎭) 진압에 참전했다고 한다.

허나 모종의 일로 당나라 무관직을 포기하고 신라로 귀국하게 되는데, 귀국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로 분분하다. 먼저, 익평왕이 당에서 귀국해 흥덕왕(興德王)을 알현하여 '신라인이 당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매매되고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익평왕이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의 의미[7]를 감안하면, '같은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데 차마 나만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어서'가 이유였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함께 당에 갔던 친구 정년은 당군에 남았는데 훗날 정년이 당의 군축 조치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하고 나서 익평왕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을 보면, 익평왕이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년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사정은 알 수 없다. 일부 재야 학계에서는 이사도의 번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를 보고 실망했다.'고 이사도가 말해자 충격을 받아 무관직을 포기했다는 구전이 그 이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참고 3]

이 시기 익평왕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한 행적은 알기 힘드나, 엔닌의 기록을 볼 때 신라방(新羅坊)의 신라인 사회를 이용해 해상 상업에 뛰어들어 국제 무역을 시도했고, 중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해안 지역은 앞서 나온 이사도와 같은 번진들의 발호로 당나라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덕분에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예로 팔아먹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대로 단순히 이들이 동족인 신라인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것을 볼 수 없어서라는 도의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장보고로써는 이들 해적 때문에 바다를 통해 오가던 해상 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되면 장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상인으로써의 실제적인 계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참고 4]

청해진 설치 및 달벌 전투

夏四月 淸海大使弓福 姓張氏[一名保臯] 入唐徐州 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鎭淸海[淸海 今之莞島]
(하사월 청해대사궁복 성장씨[일명보고] 입당서주 위군중소장 후귀국알왕 이졸만인진청해[청해 금지완도])[8]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신라로 귀국한 후, 그는 흥덕왕(興德王)에게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해적들을 막겠다." 하니, 흥덕왕은 즉석에서 허락하고 대사(大使)라는 특별한 직함까지 내려주었다. 이에 익평왕은 한반도(韓半島)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莞島)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섬 장도에 청해진을 건설, 이를 기점으로 상권을 장악했다. 한편, 익평왕이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김헌창의 난(金憲昌之亂)이 있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권과 지방 통제력의 약화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혼란스러운 신라 정계 상황 속에서 해로 안전 확보를 위해 익평왕은 원래 보고한 목적인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익평왕이 청해진에서 1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했다는 기록이 현실적으로 흥덕왕이 제공하기 어려웠기에 기존 사병 집단 + 정규군이 혼합한 형태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일단 현재 학계의 입장은 익평왕이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여 이 병력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 인정하는데,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참고 5]

여튼 익평왕의 해상 패권 장악은 국제 사회에 다양하게 작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이 천태종(天台宗)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익평왕에게 보호를 부탁했으며, 당시 산둥 반도에 익평왕이 건립했다고 하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적산법화원은 당시 무역상, 장영(張詠) 등의 재당 신라인들이 운영했고 정기적으로 강경법회를 열어 재당 신라인의 결집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후 적산법화원은 당 무종(武宗) 시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훼철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해 익평왕이 안타까워 하는 《대야서기》에 구절이 남아있다. 이렇게 엔닌은 익평왕의 도움을 받은 내용을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익평왕 일대기 및 당시 고대 한중일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익평왕은 또한 교관선(交關船)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무역 수익을 올렸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6월 27일에 익평왕이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赤山浦)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兵馬使)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이란 인물이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동쪽의 일본과도 회역사(廻易使)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익평왕이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구주(九州)의 다자이후(大宰府)에서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

청해진이라는 독립된 환경에 막대한 수익을 바탕으로 익평왕은 신라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838년 2월에는 중앙 정계의 왕위 다툼 끝에 밀려나 청해진으로 도망 온 김우징(金祐徵)을 돕기로 약속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삼국사기》 및 《신당서(新唐書)》에는 바로 이 즈음에 정년이 당에서 귀국해서 익평왕을 찾아온 것을 익평왕이 직접 환대하면서 잔치를 열고 있는 중에 서라벌(徐羅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10]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익평왕은 '네(정년)가 아니면 이 반란을 진압할 사람이 없다.'며 5천 군사를 내주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고 한다. 3월에는 남원경(南原京)까지 진격했다가 잠시 소강상태를 거치고, 이후 838년 12월 다시 출정해 달벌(達伐)에서 이찬(伊湌) 김흔, 대흔, 대아찬(大阿飡) 윤린, 억훈 등이 지휘하는 신라 정규군 10만 명을 상대로 한 달벌 전투에서 크게 승리해 절반 이상을 참살하고, 이 소식을 듣고 도망친 민애왕을 끝내 찾아내서 처형하고 김우징을 왕위에 올렸다.

권력 다툼 패배와 탐라 정벌

그렇게 옹립시킨 신무왕이 1년도 못돼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에 익평왕은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고, 진해장군(鎭海將軍)에 임명되는 등 신라 조정으로부터 나름의 포상을 받았으나, 자신의 딸을 왕의 아내로 들이겠다고 했던 약속은 끝내 이행되지 못하였다. 이 내용은 신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에게 사돈 결의를 사전에 약속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남아있다. 허나 약속을 이행해야 할 신무왕이 금세 요절했으니 익평왕은 그의 아들로서 즉위한 문성왕에게 아버지의 약속을 이행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八年 春 淸海弓福怨王不納女 據鎭叛 朝廷將討之 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 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팔년 춘 청해궁복원왕불납녀 거진반 조정장토지 칙공유불측지환 장치지 칙죄불가사 우려부지소도)[11]

 
《삼국사기》 제11권 신라본기 제11(三國史記 卷第十一 新羅本紀 第十一)

실제로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분분하지만, 익평왕이 신라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딸을 왕비로 맞이해줄 것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무력 시위를 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에 신라 조정은 익평왕의 청해진 병력과 동고동락하면서 달벌 대전에서 활약했던 염장(閻長)을 첩자로 보내어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게 되었는데,[12]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두고 익평왕이 지방 호족과 결탁하여 조정을 위협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을 정도였다.[참고 6]

그러나 익평왕 역시 직접적인 무력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위협하거나 전복시키기에는 무리였다. 841년에 청해진의 무관이었던 이창진(李昌珍)이 내부에서 소요를 일으켜 일시적인 쇠락을 겪게 된 것이었는데, 무리하게 일을 도모했다가는 이창진의 뒤를 이어 내부의 불만이 다시끔 터질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결국 익평왕이 문성왕에게 전언하여 식읍 2천 호를 반납하고서 청해진의 근거지를 성주청(星主廳)으로 옮기며, 마땅히 신라의 복속되어야 할 탐라국(耽羅國)을 친히 정벌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었다. 이에 문성왕은 겉으로는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만류했으나, 끝내 수락하였으며 마침내 848년의 탐라국을 정벌하고 호공왕(好恭王)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명목상으로 제후(諸侯)를 칭하고 탐라 정벌에서 획득한 품목들을 조공함으로서 탐라 내 합법적인 독립 세력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호공왕의 딸과 익평왕이 혼인함으로서 청해진 세력과 기존 토착 지배 세력과의 온건한 융합을 시도하였으며, 무남독녀였던 익평왕은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달고왕을 낳는 등 힘을 과시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청해진이 쇠락하고서 함께 탐라로 넘어가지 않은 주민들은 문성왕에 의해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기반 세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후 익평왕은 해상 무역 기반이 전무했던 탐라국에서 새롭게 기반을 마련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 남부 부속도서들을 위협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구주 정벌과 최후

기존 기반을 상실하였음에도 교관선을 이용한 중계 무역 장악으로 동중국해(東中國海)의 해상 상업을 유지하였기에 익평왕은 이를 바탕으로 군세를 늘리기 시작했다. 이후 회역사대마도(對馬島)와 일지도(壱岐島)를 비롯한 일본 남부 부속도서에 주기적으로 시찰토록하여 현지 정보를 확보해 나갔으며, 다자이후가 관할하던 사절 접견 업무 기관인 홍려관(鴻臚館)을 통해 구주 정벌을 계획해 나가기 시작했다.

익평왕이 왜 구주 정벌을 계획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식수 확보가 어렵고 중계 무역 기항지로서의 역할을 행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던 탐라를 대신하여 다방면에 현지 시찰 작업을 거쳐 구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청해진 세력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초기에 실각한 귀족들이 다자이후로 좌천되는 곳으로 파악했고, 과거에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 등원광사)가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정보까지 확보했었기에 구주 지역이 중앙 사회에 피지배 지역이라는 인식을 통해 현지 세력과 함께 구주 전체를 일본 사회에서 분리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윽고 철저한 준비를 거친 익평왕은 854년 6월, 휘하의 청해진 출신 장수들과 회역사에서 활동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쓰시마국(對馬國)으로 뱃머리를 향하였고, 당시 국사(國司)[13]였던 쓰시마노가미(對馬守), 다테노노 마사즈미(立野正岑)가 죠야마(城山)에 위치한 가네다 성(金田城)[14]에서 1,000명의 츠와모노(兵, 병사)를 이끌고 항쟁했으나 우라베노 가와치마로(卜部川知麻呂), 나오노 우라노시(直浦主) 등의 지방 호족들에게 암살됨으로서 와해되고 말았다. 뒤늦게 가네다 성 수비를 위해 사키모리(防人)[15] 천 명이 도착했으나, 군세에 눌려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이키국(壱岐國)의 국사였던 이키노가미, 광근왕(広根王)[16]의 300명의 사키모리들을 격파하고 정벌하였다.

이후 하카타(博多) 연안을 통해 다자이후 정청의 근거지로 진출하려고 했으며, 이에 당시 다자이곤노소치(大宰権帥)[17]였던 고레타카 친왕(惟喬親王)이 오노 성(大野城)에서의 항전을 개시함으로서 오노 성 공략전(大野城攻略戰)이 시작되었다. 단번에 구주 북부를 제압하기 위해 노궁(弩弓)과 상양포(相陽砲)[18]를 이용하여 함락에 나섰으며 익평왕이 직접 말을 타고 전쟁을 독려했으나, 여러 차례의 정벌 운동으로 헤졌던 찰갑(札甲)이 수성 측 병사의 화살로 뚫리면서 고꾸라졌고 이에 전사하였다고 한다.[19]

각주

  1. 이두(吏讀) 표기로서 한문을 한국어 어순대로 재조정한 후 조사나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를 중간중간 삽입한 한국어의 한자 표기를 이른다.
  2. 명목상으로는 제후왕(諸侯王)으로 입조하였다.
  3. 의역하면 "옛 사람이 말하길 의로움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난 비록 평범하고 미천하지만 당신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4. 그는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일기에서 등장하는 재당 신라인(在唐新羅人)들의 역할에 주목했고, 자신의 논문에서 엔닌의 구법행을 도왔던 재당 신라인의 수장, 익평왕을 이렇게 평가했다. 흔히 익평왕을 일컫는 수식어인 '해상왕'(海上王)을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5. 달고왕 역시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아 정벌 전쟁을 완수하고 28세라는 이른 나이에 요절한 청년 군주로서 그의 인기도 대단히 높다.
  6.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장보고는 무남독녀였다고 한다.
  7. '바다를 깨끗히 청소한다.'
  8. 의역하면,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
  9. 다자이후 정청의 주장을 전해들은 익평왕은 이후 오노 성 공략전에서 성주를 책망하고 구주를 정벌하려는 근거를 드는 것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10. 김명희강왕(僖康王)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을 가리킨다.
  11. 의역하면, "8년(서기 846)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12. 협객을 아끼던 익평왕은 염장의 방문 역시 혼쾌하게 수락했으나, 이 날 연회에서 염장이 자신에게 계속 술을 드실 것을 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염장을 추궁함으로서 이실직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13. 일본 조정에서 율령제를 기반으로 지방의 율령국(律令國)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지방관으로서, 가미(守)라고 불렸다.
  14. 본래는 한반도와의 접경지 방비 강화를 위해 추진한 서쪽 지역 군비 확충의 일환으로써 수축된 성이었다. 8세기 초에는 사실상 폐성이 되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방어 능력이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15. 도코쿠(関東)에서 징집했던 병사들로서 3년마다 교대하였다. 구주 정벌 무렵에는 쓰시마국이키국을 제외하고서 사키모리 제도는 폐지되어 있었다.
  16.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타모치씨(板持氏)로 추정하고 있으나 근거는 없다.
  17. 본래 다자이후의 장관은 다자이노소치(大宰帥)이지만, 해당 직책은 친왕(親王)이 임명되고 이들은 실제 부임지로 가지 않았기에 다자이곤노소치가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18. 투석기의 일종으로서 터를 닦고 가건물을 건설하다시피 조립해서 사용하는 고정포대였다.
  19. 다행히 전사한 익평왕과 어린 나이였던 달고왕을 대신하여 전권을 휘두르던 정영(鄭瑛)이 전두지휘함으로서 성을 함락시켰고, 고레타카 친왕헤이안쿄(平安京)로 도망하게 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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