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명 에세르 인민공화국 임시 정부(Prozatímní vláda Esserovy lidové republiky), 혹은 전통적 명칭 '인민연맹(Lidová federace)은 에세르인들의 무장 연합 단체로 본래 에세르 민족의회에서 "인민연맹"으로 공식 인가된 다수 정당이었으나, 에세르 왕국이 민족의회를 해산시켜 발발된 7월 봉기 당시 붕괴된 왕정의 무정부 사태를 점차 해결하였고 신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지만 키르수스 정부가 이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에세르를 제국판무관부로 병탄하자, 공화국 연맹으로 망명하여 공련 정부의 지원 하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역사

인민연맹은 그란치프 제국에 1왕정이 멸망당한 이후 에세르 1왕정의 마지막 국왕인 카를의 외동아들이자 에세르 왕세자 카를 바츨라프가 다수의 왕당파들을 이끌고 그란치프에 대항하여 무장독립을 추구하는 단체로 조직한 데서 출발하였다.

2왕정 이전

그란치프 제국에 항거하여 설립된 인민연맹은 동시에 조직된 인민의회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반 세기가 지나자 인민의회를 이끄는 다수당이자 그 자체가 되었다. 인민연맹은 무장 노선을 포기하고 장기적 관점에서의 독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에세르인의 민족성을 고취하고 보전하기 위해 민족 유산들을 보전하고 교육하였다. 이윽고 인민연맹은 에세르 자치 정부의 정국을 주도하는 지역 수반직을 다수 맡아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하였다.

2왕정기(1664-1670)

에세르 2왕국이 키르수스의 군홧발 아래 수립되자 인민연맹은에세르인의 나라가 수립된 걸 축하하고 새 국왕이 즉위한 것을 환영했지만 왕정은 이들을 그란치프의 부역자로 여겨 이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왕과 친키르수스 내각은 제국 정부의 심기를 건들 것이 염려되어 당시 공화국 연맹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온 대부분의 인민연맹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체포하기 시작했다.

인민연맹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불과 건국 5년도 되지 않아 불법적인 교육으로 반키르수스 선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교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에세르의 역사와 문화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유로 비밀리에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납치되어 일부는 불구가 되거나 양쪽 눈을 잃을 정도로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에세르 2왕정 정부는 1670년 7월에 이르러 인민의회를 국내외의 항구적 평화를 이룩하는 것에 반대하고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해산하겠다고 발표했다. 7월 봉기의 절정에 다다르자 에세르 왕족들과 군 병력들, 경찰 병력은 수도 마가드에서 철수했는데, 인민의회와 인민연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3달간 수도로부터 점점 에세르를 장악해나감과 동시에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를 에세르 역사에서는 4개월의 혜성으로 부른다.

인민연맹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인민연맹 위원장인 러요시 오타카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이끌었던 신 정부는 키르수스에 대한 통상적 호혜와 왕정에 의한 우호관계를 모두 청산하기를 원했고, 공화국 연맹과의 국교를 체결하기를 희망하여 공련에 지원을 요청하는 대통령 친서를 보냈다. 또한 4개월간의 지배 기간 동안 신 공화국 정부는 키르수스어나 게파르토어 등의 외국어 교육을 전면 중단하고 키르수스 교민들의 외출을 금지했으며, 키르수스 기업가들의 사업 허가를 철회하여 활동을 불허하였다.

신 공화국 정부는 민중들에게 향후 대통령 선출이 보통ㆍ평등ㆍ기밀 3원칙에 의거한 선거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발표하며, 동시에 사회 전분야를 개혁하여 그동안의 외국과의 불평등적 관계를 모두 타파하고 수평적 관계를 이룩함과 동시에 공화국 연맹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하여 학술적ㆍ군사적ㆍ외교적 관계를 강화하고 국제사회에 함께 우뚝 설 것이라는 인민용 관보를 발표하여 민중의 압도적인 인기를 받았다.

그러나 이 사태를 지켜보던 키르수스 제국은 인민연맹의 통치를 불인정하며 에세르 국내로 진입하였다. 인민연맹이 정부수립 후에 군대를 계획하긴 했지만, 아직까진 정부가 지도하는 소규모의 군대(구 시민군)만이 방위를 맡았기 때문에 키르수스 제국의 공격에 완강히 저항했음에도 불구, 수도 바로 앞까지 밀렸다. 인민연맹 지도자들은 민중의 피해를 최대한 막기 위하여 공련에서 활동을 이어가겠다며, 국민들의 임시정부 참여를 독려하는 마지막 연설을 한 후 급히 공련으로 망명하였다. 에세르는 그렇게 키르수스에게 점령되었다.

키르수스는 왜 4개월 동안 에세르에 대해서 군사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나?

키르수스가 7월 봉기 직후 4개월 동안 에세르 국내에 진입하지 않은 것은 혼란 속 에세르인들의 외국에 대한 완강한 저항이 예상된 국내 상황 속에서 국내병력의 피해를 최대한 막기 위해 계획을 수립함과 동시에 키르수스는 이 기간 동안 인민연맹의 선접촉을 통해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공련과의 사상적 관계가 어느정도 결부되어 있음을 뒤늦게 파악하였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키르수스는 배후에서의 지속적으로 간접 영향력을 투과하는 대신, 직접 제국판무관부 통치로 병탄시키는 방향으로 에세르에 대한 전략을 선회하였다.

에세르인들은 겨울을 사계절 중에서 가장 버티기 버거워했기 때문에 날씨가 점차 급격히 추워지는 11월 즈음 공세하여 에세르인들의 저항과 제국군의 병력 소모를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인민연맹의 단기간 통치 속에 에세르의 혼란스런 정국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기후ㆍ인문적 특성이 고루 알맞은 11월에 이르러, 마치 설익은 사과를 잘 놔두다가, 기다림 속에 보기 좋게 익은 사과를 따먹듯이, 급속도로 에세르를 장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기(1670-)

키르수스와의 협상 불발과 더불어 공련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인민연맹은 1670년 12월 13일 공련 수도에서 에세르 인민공화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선포하였다.

에세르 인민공화국 임시 헌법 문서 참조.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