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렉트로닉 제임스 아츠
Electronic James Arts

1928년 세계스포츠진흥의회 의장 취임 당시.
출생 1860년 8월 6일
스위스 스위스 취리히주 힌빌구 빈민가
사망 1932년 4월 30일(향년 71세)
미국 미국 뉴욕주 뉴욕시 뉴욕국제센트럴호텔
국적 스위스 스위스
별칭 쿤스테
학력 힌빌초등학교 졸업
중졸 검정고시 합격
고졸 검정고시 합격
경력 빈민가 구두수선가게 알바
초대 일렉트로닉 아츠 사장 (1883~1889)[1]
초대 일렉트로닉 아츠 회장 (1889~1926)
일렉트로닉 아츠 명예회장 (1926~1932)
제3대 세계스포츠진흥의회 의장 (1928~1932)
직업 수선공
기업인
소속 일렉트로닉 아츠
배우자 제인 아츠
자녀 장남 일렉트로닉 M. 아츠
차남 일렉트로닉 A. 아츠
장녀 마릴로 케이슨
부모 아버지 일렉트로닉 메케인 아츠[2], 어머니 미켈레 아츠
상훈 스위스 스위스 국가문화훈장 1급(1890)

일렉트로닉 제임스 아츠(영어: Electronic James Arts)는 스위스의 기업인으로, 세계 최대의 스포츠 단체인 일렉트로닉 아츠의 창업자이자 스위스 문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별명은 쿤스테.

생애

유년기

몰락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놀림을 받다

일렉트로닉 제임스 아츠(이하 쿤스테)는 1860년 8월 6일, 스위스 취리히주 힌빌구에 위치한 빈민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일렉트로닉 메케인 아츠는 한 때 스위스의 국가대표를 맡았을 정도로 성공한 축구선수였으나, 쿤스테가 태어나기 몇년 전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억울한 누명에 휩싸여 하루 만에 자신의 구단에서 방출당했고, 결국 수많은 비난을 이기지 못해 국가대표도 은퇴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했다.

아버지가 선수직에서 은퇴한 이후, 하루 만에 집안이 급격하게 몰락해버리자 빈민가로 이사를 가 그의 어머니가 구두수선가게를 운영하며 생활을 전전하게 된다.

어머니의 수선가게 운영으로 돈을 벌어 간신히 초등학교에 입학한 쿤스테는 자신의 가난과 할아버지인 스웨덴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의 어눌한 말투를 물려받아 그 때문에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으며, 그들은 그를 스웨덴 사람을 조롱하는 멸칭인 쿤과 어눌한 발음이라는 뜻의 스테를 합쳐 쿤스테라고 불렀으며, 그 동시에 그가 성추행으로 나락을 간 국가대표의 자식이라는 것까지 밝혀지자 더욱 놀림을 받았다.

쿤스테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잘하던 아버지를 물려받아 축구에 재능을 보였고, 매일같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날이 지속되자 쿤스테는 아버지처럼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줌과 동시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로 한다.

쿤스테는 자신의 아버지 메케인을 졸라 축구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고, 처음엔 메케인은 자신의 아들을 지금의 자신처럼 만들기 싫어 지속적으로 거절했으나, 아들의 끈질긴 부탁으로 결국 그를 제자삼아 축구를 가르치게 된다. 이후 쿤스테는 축구에 집중하기 위해 초등학교만 진학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다.

청소년기

생애의 첫 실패

그렇게 끈질기게 아버지와 축구 연습을 했던 쿤스테는 14살이 되자 자신의 재능을 보이기 위해 당시 베른 FC 다음으로 스위스 내 구단 2위였던 취리히 FC의 유스팀에 들어가기 위해 테스트를 거치게 되는데, 하필이면 테스트에 쿤스테를 능가하는 여러 유망주들이 합격한 상태였고, 쿤스테는 그 자리에서 떨어지게 된다.

이후 여러 번 취리히 FC에서 시험을 봤지만 번번이 낙제하고, 결국 쿤스테는 19살에 축구선수라는 꿈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게된다.

청년기

나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후 쿤스테는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늙은 어머니의 구두수선가게를 물려받아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아직까지도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쿤스테는 23살에 구두수선가게를 축구공 생산업체로 개조하여, 자신의 이름을 따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겸으로 일렉트로닉 아츠를 설립하였다.

이후 아츠에서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노동자 제인 아츠와 결혼하였고, 지속적으로 아츠를 운영하였으나, 1880년에 터진 경제대공황으로 인해 기업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쿤스테는 기업 운영에 대한 슬럼프에 잠혀 자신의 고향으로 잠깐 휴식을 떠난다. 자신이 어린 시절 축구선수이자 스위스의 국가대표였던 아버지와 함께 축구공을 차며 뛰어놀았던 호숫가 근처의 작은 축구 경기장에서 일렉트로닉 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올림픽 경기에서 뛰시던 모습을 회상하며 올림픽을 뛰어넘는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어서 회사를 성장시키자고 결심하는데, 이 것이 바로 EAFA 스포츠컵의 탄생이었다.

이러한 의견을 가족들에게 말하자, 가족들은 처음엔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엄청나게 반대를 했었고, 거기다 회사 직원들과 노동자들도 대부분이 반대했었다고 한다. 애초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축구공이나 생산해내는 일개 소기업의 이러한 의견을 다른 국가들이 들어줄 리도 만무했고, 무엇보다도 19세기 후반 당시에는 축구협회라는 개념이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아 대부분의 국가가 오로지 실력이 아닌 충성심으로 올림픽 국가대표를 선발하던 시절이었고,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축구대회는 올림픽 밖에 없었어서 굳이 축구대회를 하나 더 만들 필요가 있냐는 의견이 나올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우연의 기회에서부터 이루어졌다.

대성공과 인생역전

1888년, 올림픽을 주최하던 축구연맹 겸 주식회사 국제올림픽연맹이 8년간 이어져오던 경제대공황과 이로 인한 회사 내 자금 부족으로 원래 2년에 한 번씩 열렸어야할 올림픽이 2번이나 개최에 실패하면서 결국 회사가 최종 부도 처리되어 전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가뜩이나 경제대공황 속에서 전세계인들의 유일한 희망거리인 올림픽마저 사라지자, 행복도가 6개월만에 급감하고 자살율도 미치듯이 상승하여 인구가 점점 줄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쿤스테는 오히려 이 것을 기회로 삼았다. 쿤스테는 전세계의 소식통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신문사 월스트리트 일간지에 자신의 회사와 EAFA 스포츠컵을 홍보하는 기사를 실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물론 월 일간지는 처음엔 쿤스테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한 귀로 듣고 흘러들었으나, 쿤스테의 스토커같은 지속적인 요청에, 결국 월 일간지는 훗날 EA 홍보 기사 하나로 월 일간지의 사장까지 승진하는 당시 신입기자 월 G. 에릭센을 스위스로 보냈다.

그렇게 스위스로 향한 에릭센은 처음엔 그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그저 일 때문에 쿤스테를 만나러 갔으나, 쿤스테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특유의 말솜씨를 이용하여 에릭센을 설득했고, 나름 일 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 에릭센은 일간지에 EA와 스포츠컵을 홍보하는 내용과 일렉트로닉 회장과의 인터뷰를 기사에 싣었다.

전세계의 반응은 그야 말로 우호적이었다. 가뜩이나 올림픽이 폐지되어 전세계인들이 즐길 만한 축제가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즐길 수 있는 축젯거리가 생겼다며 환호했고, 올림픽 축구종목에서 항상 금메달을 차지하던 유럽/남미 국가에서 스포츠컵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쿤스테는 일렉트로닉 아츠를 같은 해 12월, 스포츠 진흥 단체로 종목을 변경시키고, 산하에 대회를 개최하는 일렉트로닉 아츠 축구협회(EA Sports FootBall Association)를 설립하여 2년간 유럽/남미 국가들을 중심으로 가맹국들을 하나둘씩 늘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소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그렇게 1890년, 대부분의 유럽/남미 국가들로 이루어진 첫 스포츠컵이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렸다. 반응은 2년 전의 우호적인 것을 넘어서 성공적인 대흥행이었다.

자국에서 이름을 날린 유명 축구선수들과 올림픽 시절의 축구 국가대표들이 스포츠컵에 출전하면서 이 것을 보기 위한 전세계인들이 스위스로 몰려들었고, 올림픽보다도 흥행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당시 스위스는 물론 일렉트로닉 아츠도 엄청난 돈을 쓸어모으며 흥행에 성공하였다.

일렉트로닉 아츠는 흥행에 성공하며 중견기업에서 준대기업 과정도 거치지 않고 순식간에 대기업으로 성장하였고, 국제올림픽연맹보다 더 큰 스포츠 단체로 성장하였다. 일렉트로닉 회장은 스위스로부터 국가의 위상을 높인 공을 인정받아 스위스 국가문화훈장 1급을 수여받았으며, 당시 일렉트로닉 회장의 나이는 30살에 불과했다.

그는 EA 축구협회를 스포츠협회로 회사명을 변경하여 산하에 축구연맹, 농구연맹, 야구연맹, 배구연맹 등을 설립하며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도 도전하였고, 그 결과 축구 뿐만 아닌 모든 분야를 섭렵하는 최대의 스포츠 단체가 되었다.

국가문화훈장을 수여받은 이후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내 아버지인 메케인 아츠는 억울하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누명에 씌여졌고, 그 때문에 우리 집안은 몰락했다"라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냈고, 그의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병원에서 아들의 인터뷰를 지켜보며 억울함을 풀어내고 사망했다고 한다.

중년기와 말년기

그렇게 스포츠의 아버지라 불리며 세월을 보내가던 쿤스테는 중년기를 거쳐 말년기에 접어들며 일렉트로닉 아츠 회장직을 전직 축구선수인 장남에게 물려주며 기업인에서 은퇴하고, 이후 제3대 세계스포츠진흥의회 의장에 취임하며 남은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최후

1932년 4월 30일, 쿤스테는 진흥의회 의장 직으로 회의에 참석하러 미국 뉴욕에 방문하여 다음 날 호텔에서 의문사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1살이었다.

당시 전국의 신문사들은 해당 사건을 기사로 싣어내며, 전세계인들은 그가 사망하자 충격에 빠졌다. 당시에는 시신을 부검하는 과학적 기술이 없었기에 사건은 곧바로 쿤스테의 자살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64년이 1998년, 제28회 스포츠컵이 개최되기 한달 전, 암을 앓고 있는 한 노인이 병원에서 "내가 아츠 의장을 죽였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면서, 사건이 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 검찰은 쿤스테의 시체를 또 다시 부검하여 조사해본 결과, 그의 위에서 독약 등에서 사용되는 악성물질이 검출되면서 결국 암살 사건이라는 것이 판명되면서 64년만에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1. 축구공 생산업체 시절
  2. 전직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