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군주당 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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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군주당 분당의 경과
자유군주당 자유군주당 자유군주당
국가당
애국당 우리애국당
정의개발당 정의당
혁명군주당 (중도당으로 이동)
백성의지당 (자유당으로 이동)
귀족당 자유귀족당

자유군주당 분당(Split of Liberty Monarchist Party)은 율리우스 카이포스자유군주당의 최고지도자 겸 국왕이 되었으나 앨리스 소피아보른 의원의 실종 사건을 둘러싼 혁명당과의 충돌이 벌어지자 당 내에서 사퇴 압박이 높아진 가운데 결국 카이포스의 행보로 인하여 율리우스 에르도안 의원의 탈당과 함께 양 파벌의 대부분이 카이포스의 책임을 지기 위해 탈당을 선언한 사건이다. 이 것으로 인해 보수정당계 정계개편이 이루어졌으며 나중에 군주당과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로 분당될 때 1차 분당에 참여했던 일부 세력들이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로 들어오게 되었다.

발단

율리우스 카이포스는 유로아스피아 전쟁 전후 처리에서 국가를 어느 정도 재건하고 자유군주당을 대변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주도한 최고지도자였으며 당시 지지율이 60%에 육박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었다. 하지만 156년 1월 자유당이 좌경화되면서 군주당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연정마저 파기당했으며 157년 3월 에케로스 디오니소스 의원이 카이포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카이포스가 이를 인정하면서 디오니소스를 제명시켰다. 이에 당 내에서는 디오니소스 복당과 입당 금지 해제를 주장했고 159년 7월 보수당과 선거연합을 맺어 16대 총선에서 연립여당이 되었으나 160년 11월 앨리스 소피아보른 의원이 실종되었고, 수색대와 헌병들을 동원해 수사한 결과 소피아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되었다. 카이포스는 "이 사건의 배후는 당 내부가 아니면 반역을 일으킨 정당의 당원일 수도 있다"고 밝혀 혁명당을 비판하였다.

그 후 165년 7월 혁명당이 보수당을 군주당의 꼭두각시 (한국으로 치자면 2중대)라고 비난하자 보수당은 군주당과 힘을 합쳐 혁명당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보수연립은 혁명당을 "무능한 정당, 반역 정당"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하였다.

결국 165년 11월 중립을 지키던 율리우스파 중도파 의원 율리우스 에르도안이 "더 이상 카이포스식 군주당에 머무르기 싫다. 앞으로 군주당에 큰 안정이 찾아올 때까지 탈당으로 맞서겠다"고 밝혀 탈당을 선언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자유군주당의 분당이 시작되고 만다.

전개

165년 11월 에르도안의 탈당 이후 3,800여명의 율리우스파 급진파 당원들이 탈당하였고, 12월에는 47명의 반카이포스 (율리우스파 24명, 엠페로우파 23명) 의원이 탈당하고 이어서 12,000명의 당원, 소수 계파 (중도 ~ 중도좌파)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당원이 탈당을 선언하였다. 엠페로우파 급진파 의원 7명과 당원 1,400여명은 국가당을 창당하였고, 이어 급진파 의원 1명과 나머지 당원들은 애국당을 창당한다. 166년 1월 무소속 의원 7명과 함께 귀족당을 창당하였으며 166년 3월 소수 계파들은 군주당으로부터 백성을 지키자는 의미로 백성의지당 창준위를 구성하게 된다. 이후 176년 자유당에 흡수되었으나 193년에는 민주당의 비주류 계파인 후생모임의 일부가 된다.

양 파벌의 중도파 일부는 동조하면서 정의개발당 창준위를 구성하였고 나중에는 정식 창당하였다. 한편 반카이포스 잔당 세력들은 혁명당을 지지하겠다며 지식인들을 모아 혁명당의 위성정당인 혁명군주당 창준위를 결성하였다. 나머지는 무소속으로 잔류하거나 타 정당으로 입당하기도 했다.

결과

결과적으로 자유군주당은 의회에서의 영향력을 많이 잃어 제3당 안팎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했고, 어쨌거나 당 내부의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166년 보궐선거에서 60석이라는 의석 중 4석이라는 참패에 가까운 결과를 보게 되었고, 17대 총선에서도 개헌저지선인 30석에 못 미치는 12석을 기록해 제4당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율리우스 6세의 활약으로 18대 총선에서 무난하게 78석을 얻었고 보수당과 함께 전체 의석인 99%를 차지함에 따라 처음으로 보수정당이 의석 90%를 차지하는 여대야소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엠페로우파 35명이 탈당하면서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를 창당함에 따라 보수정당은 18대 총선에서만 1:2 구도로 나뉘게 된다.

국가당은 17대 총선을 앞두고 0.3%라는 기대에도 못 미쳤음에도 40개의 지역구에 후보들을 출마시켰으나 전부 낙선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당은 17대 총선 직전 지지율은 2.8%로 원내 진입 5%에도 못 미치는 결과를 나타내는데 그쳤으며 결국 국가당은 자진 해산되었다. 이후 군주당의 2차 분당 때 구 국가당 세력들이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로 대거 입당하게 되었고 일부는 무소속으로 남거나 군주당에 입당하였다.

애국당은 미니 총선에서도 후보를 내지 않았으나 여론조사로는 국가당보다 낮은 1.9%를 기록하였다. 17대 총선에서도 후보를 내지 않았는데, 18대 총선을 앞둔 175년 4월 명칭을 우리애국당으로 변경하고 총 4곳에서만 후보를 냈으나 역시 전원 낙선되었으며 애국당은 존폐 위기에 처했으나 21대 총선에서도 8곳에 후보를 내며 다시 한번 도전하려 했으나 역시 전원 낙선되었다. 이후 몰락의 길을 걷던 애국당은 통합군주당에 들어가 비주류 (엠페로우-애국당계)가 된다.

정의개발당은 17대 총선 직전 명칭을 정의당으로 변경하고 원내 진입에 시도하였으나 선거 직전 정의당은 돌연 해산을 선언한다. 인재 부족과 당의 부진을 이유로 해산하였는데 그리고 나중에는 정의당 계열들이 다시 한번 정의당을 창당시켰으나 1석 정도를 얻지 못하고 원내 진입에 실패하였다.

혁명군주당은 혁명당 해산 이후 유명무실해지자 차츰 중도화되었으며 196년 중도당과 흡수합병을 선언한다.

귀족당은 자유귀족당으로 명칭을 바꿔 원외정당을 계속 이어나가다가, 186년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합병하였다가 192년 다시 분당하였다. 다만 기존 성향과는 온건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군주당과 미래군주연합 직후 군주정당 통합을 주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