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 Erster Weltkrieg by Ernst |  데스크톱  크롬  벡터 스킨 지원
제4차 발칸 전쟁
발칸 전쟁의 일부

사바강 너머로 진격 중인 세르비아군
날짜1926년 6월 11일 ~ 8월 29일
장소발칸 반도
결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패배
사라예보 조약의 체결

교전국

헝가리 왕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간접 지원국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세르비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물자 지원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지휘관

헝가리 왕국 호르티 미클로시
헝가리 왕국 코사드 장키
헝가리 왕국 구스타브 제니
헝가리 왕국 엘레메르 고론디-노바크
헝가리 왕국 빌모스 나지 데 나지바손
불가리아 왕국 보리스 3세
불가리아 왕국 니콜라 토팔지코프
불가리아 왕국 콘스탄틴 솔라로프
불가리아 왕국 이반 루코프
불가리아 왕국 게오르기 토도로프
불가리아 왕국 니콜라 미호프
불가리아 왕국 콘스탄틴 루카쉬

이탈리아 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블라디미르 락사
블라디미르 메티코스
빌코 베기츠
세르비아 왕국 알렉산다르 1세
세르비아 왕국 다닐로 칼라파토비치
세르비아 왕국 밀로라드 페트로비치
세르비아 왕국 밀루틴 네디치
세르비아 왕국 블라디미르 추카바치
세르비아 왕국 두샨 트리푸노비치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삼국 동맹 1882년
러불 동맹 1894년
제1차 대양함대법 1898년
제2차 대양함대법 1900년
영불 협상 1904년
러일 전쟁 1904년 - 19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 1906년
제3차 대양함대법 1906년
영러 협상 1907년
제4차 대양함대법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 - 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 1912년
제5차 대양함대법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7월 위기 1914년 7월
제3차 발칸 전쟁 1914년 - 1915년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년 - 1917년
제6차 대양함대법 1916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적백 내전 1917년 - 1922년
제7차 대양함대법 1922년
방공 협정 192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년 - 1925년
러시아 내전 1924년 - 1926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1925년
제4차 발칸 전쟁 1926년 - 1927년
제8차 대양함대법 1928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930년 - 1931년
세계대공황 1931년 - 193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제2차 러불 협상  
제2차 영러 협상 1935년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1936년 - 1937년
스페인 내전 1937년 - 1939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룩셈부르크 위기 1938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할힌골 전투  
독-일 조약  
9월 폴란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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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발칸 전쟁(Fourth Balkan Wars)은 1926년 6월 11일 ~ 8월 29일에 헝가리-크로아티아 무역분쟁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발칸 반도에서의 네 번째 전쟁이다. 1925년 10월 8일부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세르비아 왕국아드리아 해에서 헝가리 왕국으로 향하는 물자에 관세와 운행료를 2배로 인상하면서 촉발된 무역분쟁을 시작으로 양 세력간 갈등이 커지며 발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부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헝가리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었고, 헝가리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안 좋았으며, 헝가리는 일리리아 일대에 영유권을 계속 주장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이후로 양국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헝가리는 불가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시토프스키 밀약을 맺어 일리리아 지방의 분할 점령을 약속받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후 세르비아가 이를 거절하고 선제 공격을 시작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이 전쟁으로 또 다시 분할 점령되었으며, 몬테네그로헤르체코비나 지방은 이탈리아에, 동부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에, 북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일대는 헝가리에 합병되며 멸망했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공화국은 달마티아와 내륙 지방이 각각 이탈리아와 헝가리에 할양되며 붕괴했다. 이로서 발칸 반도는 헝가리와 불가리아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이탈리아는 아드리아 해의 유일한 패자가 되었다.

배경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이 끝나고 헝가리 왕국은 해안선을 잃고 내륙국이 되었다. 또한, 주변국이 대부분 헝가리에 비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외교와 무역로 확보에 불리한 입지에 처했다.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열의 책임을 묻고, 합병한 오스트리아 시민들의 여론을 긍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헝가리를 배척했고, 루마니아 왕국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자치 및 독립을 요구했기에 갈등이 항상 존재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스스로도 내륙국이었고, 러시아는 헝가리의 사회주의 혁명 실패로 관계가 틀어졌고 무었보다 내전의 후유증이 심각했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는 헝가리에서 해안선을 가져간 장본인이었고, 헝가리의 오랜 탄압을 받았던 민족이었다.

1926년 5월까지 헝가리는 높은 관세와 통행료를 지급하며, 해외 물자를 공급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5월 23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대한 공통 관세를 추가로 부과했으며, 이는 기존에 지불하던 관세 및 통행료의 거의 2배에 달할 정도로 헝가리에게 고통스러운 조처였다. 사실상 무역금지를 선언한 것으로, 실제로 전략 물자나 군수품에 대해서는 무역로를 열어줄 수 없다며 군을 동원하여 검문소를 확장시켰다. 이러한 조치에 호르티 미클로시는 분개했고 당장 헝가리 정부는 항의했다. 그들은 프랑스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26년 당시 헝가리의 외교적 상황은 그야말로 고립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열로 힘의 공백이 생긴 일리리아에서 이탈리아 왕국은 세르비아가 가진 달마티아 연안을 장악하여 아드리아 해에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정립하고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헝가리와 세르비아의 무역 분쟁에 이탈리아가 개입할 수 있는 틈을 제공했다. 5월 30일, 이탈리아 외교단은 신속하고 비밀리에 부다페스트에서 호르티와 회담을 가졌다. 이탈리아는 만약 헝가리와 세르비아 사이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헝가리를 지지하고 아드리아 해에서 세르비아로 군수품이 들어갈 수 없도록 지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곧이어 6월 3일에는 이탈리아와 불가리아, 헝가리의 대표단이 시에나 밀약을 통해 세르비아와 슬라보니아 분할 및 공통된 전쟁 수행에 합의했다. 이러한 동맹 전력을 바탕으로 6월 4일, 헝가리는 세르비아와 슬라보니아에 1) 통행료 및 관세를 없애고 2) 지금까지 발생한 경제 손실에 대해 배상금을 지급하며, 3) 지정 항구에 헝가리 군의 주둔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전했다.

6월 10일,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끝내 헝가리의 최후통첩을 수용하지 않았고, 6월 11일부로 헝가리가 선전포고하며 제4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전투 서열

 불가리아군 전투 서열 [ 펼치기 · 접기 ]
제1군 제2군 제3군 제4군 제5군

레스코바츠
콘스탄틴 솔라로프
보병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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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 '레스코바츠' 보병사단
  • 제19 '니슈' 보병사단

벨레스
이반 루코프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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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 '마케도니아' 보병사단
  • 제14 '세레스' 보병사단
  • 제20 '카발라' 보병사단
  • 제23 '비톨라' 보병사단
  • 혼성기병사단

몬타나
게오르기 토도로프
보병대장

  • 제4 '프레슬라프' 보병사단
  • 제5 '다뉴브' 보병사단
  • 제5기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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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멘
소티르 마린코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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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팔체니 연대
  • 에타페 연대

디미트로브그라드
니콜라 미호프
중장

  • 제13 '하스코보' 보병사단
  • 제17 '부르고스' 보병사단
  • 제21 '슬리벤' 보병사단
  • 제22 '플로브디프' 보병사단
  • 제24 혼성보병사단
  • 제3기병여단
 헝가리군 전투 서열 [ 펼치기 · 접기 ]
제2군 제3군 제4군

즈레냐닌
구스타브 제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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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기병사단
    • 제5보병사단
    • 제9보병사단
  • 제13산악사단
  • 제23동원사단
  • 제27동원사단

페치
엘레메르 고론디-노바크
중장

  • III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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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보병사단
    • 제3기병사단
  • 제5기병사단
  • 제11행군여단

바치카팔란카
빌모스 나지 데 나지바손
소장

  • V 군단
    • 제12보병사단
    • 제15보병사단
    • 제4기병사단
  • 제8보병사단
  • 제8기병여단
  • 제10보병사단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군 전투 서열 ↓
I 군단 II 군단

포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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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보병사단
  • 제5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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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제브치
빌코 베기츠 소장

  • 제1혼성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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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군 제2군 제3군 제4군 제5군

베오그라드
밀로라드 페트로비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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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구예바츠
밀루틴 네디치
장군

  • 제2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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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다차츠
밀란 네디치
장군

  • 제7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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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보병사단
  • 슬라폰스키 브로트 방위대

로자예
블라디미르 추카바치
장군

  • 제13보병사단
  • 몬테네그로 보병사단
  • 제2 '마케도니아' 산악사단

모스타르
두샨 트리푸노비치
장군

  • 제17보병사단
  • 제1 '보스니아' 산악사단
  • 제3 '헤르체코비나' 산악사단

경과

세르비아의 선공

세르비아의 다닐로 칼라파토비치는 세르비아의 잠재적 적성국인 불가리아 왕국이 이 전쟁에 관여하기 전에 헝가리를 제압하거나 완충지를 확보해야했다.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 세르비아 인구의 대부분이 사는 북부 세르비아가 양면 공격으로 포위될 것이었고, 불가리아를 통해 헝가리로 보급품이 증원될 터였다. 또한, 헝가리는 약 1달 동안 정상적인 무역이 불가능했고 군수품의 경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 압류당했기에 그 군사적 역량이 크게 약화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세르비아의 예측은 어느정도 맞았지만, 헝가리군의 고질적인 장비부족은 상당히 과장된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세르비아로부터 군수품을 압류당하자, 독일에서 군수품을 구입해올 수 있었고, 러시아 내전이 막바지로 이르면서 다량의 무기를 러시아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로로 6월 말에 달해서는 무기는 충분히 보급될 수 있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에서 오스트리아측에 섰던 병력들을 이제 우군으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는 몇 년 전에 동원할 수 있던 병력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반면, 헝가리군 지도부는 세르비아가 제3차 발칸 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수세적인 방어자세를 취할 것이라 자신했다. 실제로 세르비아의 병력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에는 규모적으로 부족했고, 적극적인 공세보다는 참호를 파고 헝가리가 아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보기에 합리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헝가리군은 세르비아 전선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다. 헝가리 제2군의 규모는 겨우 3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1개 군단 규모였다.

정보부를 통해 헝가리의 병력 부재를 확인한 다닐로 칼라파토비치6월 12일 새벽을 기해서 세르비아군을 동원하여 보이보디나로 공세를 시작했다. 제10보병사단이

크로아티아 공세

불가리아 전선

제3차 세르비아 공세

차라 상륙작전

사라예보 공세

결과 및 영향

같이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