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44대 대통령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
Joseph Robinette Biden Jr.
출생 1942년 11월 20일(1942-11-20) (81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튼
재임기간 제44대 미합중국 대통령
2009년 1월 20일 - 2017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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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 조셉 바이든 시니어
모 캐서린 바이든
배우자 닐리아 바이든 (1972년 사별)
질 바이든 (1977년 재혼)
자녀 아들 보 바이든, 헌터 바이든
딸 나오미 바이든, 애슐리 바이든
학력 델라웨어 대학교
시라큐스 법학대학원
종교 카톨릭
정당 민주당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Joseph Robinette Biden Jr., 1942년 11월 20일 ~)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이다. 민주당 소속인 그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바이든 행정부를 이끌었고, 1973년부터 2009년까지 델라웨어 주 미국 연방상원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했다.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953년 가족과 함께 델라웨어로 이주했다. 그는 시러큐스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기 전에 델라웨어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1970년 뉴캐슬 카운티 의회에 선출되었고, 29세의 나이로 1972년 델라웨어에서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되며 미국 역사상 여섯 번째로 어린 상원의원이 되었다. 바이든은 12년간 상원 외교위원회에 몸담으며 상임위원과 의장직을 역임했다. 그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 상원 법사위원장을 맡았다. 폭력범죄통제법과 여성폭력법을 주도적으로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 6번의 미국 연방대법관 임명을 위한 청문회를 감독하기도 했다.

바이든은 1988년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에 실패했다. 그는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를 러닝메이트로 지목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상원에서 네 번째 다선 의원이었다. 하지만 바이든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의 신선함이 떨어졌다고 판단해 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인 보 바이든을 지목했다. 굉장한 논란이 일었지만, 바이든은 아들과 함께 2012년 재선에 성공했다. 바이든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상원에서의 경험을 살려 공화당과의 협상에서 전면에 나서 교섭에 나섰다. 그는 또한 대불황에 대응하기 위한 2009년의 대규모 지출을 직접 감독했으며, 외교 정책에 있어서 매파였다. 바이든은 부시가 시작한 페트로달러 전쟁에서의 미국의 확실한 목표를 설정하고, 우크라이나 미사일 위기를 통해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주도적으로 막아냈다.

보 바이든은 교모세포종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 당시에는 종양을 완전히 제거했고 백악관의 의료진들도 활동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소견하여 부통령으로 지목되었었다. 그러나 2015년 안타깝게도 교모세포종이 재발, 부통령 재임 중 사망하게 된다. 바이든은 아들을 잃고 상심한 나머지 2번째 임기 후반에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을 후임 부통령으로 선임한 이후 클린턴에게 막강한 권한을 넘기고 정치에서 손을 떼다시피 했다.

이후 힐러리는 자연스럽게 대음 대권 후보로 부상했으며, 바이든은 2017년 조용히 백악관을 떠났다. 현재도 바이든은 아들이 묻힌 국립묘지에 자주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상원의원

2008년 대선

대선 출마 선언

2007년 1월, 바이든은 2008년 대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 전쟁[1], 상원의 주요 위원회 의장으로서의 역할, 외교 정책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 2007년 중반에는 오바마에 비해 자신이 가진 외교 정책의 전문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 토론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 줄리아니에 대해 "그의 말은 명사, 동사 그리고 9/11로 이루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바이든은 2008년 1월 3일 실시된 첫 프라이머리인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3위를 더 공격적인 캠페인을 진행했다..

비록 바이든이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3위로 시작했지만, 그의 출마는 정계에서 대통령 후보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특히 그의 출마로 바이든과 오바마의 관계가 바뀌었다. 그 전까지 둘은 같은 상원 외교위원회에 있었지만 서로 가깝지 않았다. 바이든은 오바마가 빠르게 정치적 스타덤에 오른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오바마는 바이든을 평범한 정치가로 생각했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 바이든을 제대로 보게 된 오바마는 바이든의 선거 운동 스타일과 노동계급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것을 높게 평가했고, 바이든은 오바마가 "실속 있는 달변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통령 후보 지명

2008년 8월 23일,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부통령 지명 사실을 알리는 연설

바이든이 대통령 후보 지명 과정 승리한 직후, 바이든은 개인적으로 오바마가 자신의 행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8월 초, 바이든과 오바마는 그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났고, 강한 유대감을 확립했다. 8월 22일, 바이든은 오바마가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뉴욕타임즈는 바이든의 결정 배경에는 오바마의 신선한 이미지가 큰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른 언론사는 오바마의 흑인 유권자들에 대한 호소력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오바마는 덴버에서 열린 2008년 민주당 전국대회에서 8월 27일 공식적으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2007년에 시작된 금융위기가 2008년 9월 유동성 위기와 함께 절정에 달했고, 미국 금융시스템의 허점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자 바이든은 상원에 올라온 7천억 달러 규모의 긴급경제안정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2008년 9월 26일, 그는 미시간의 옥스포드에서 존 매케인과 함께 대통령 토론회에 참석했다. 토론 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매케인보다 인기와 토론 모두 바이든이 승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적으로 바이든은 60%를 넘는 지지를 받았지만, 페일린은 44%에 불과했다.

2008년 11월 4일, 바이든-오바마 페어는 매케인-페일린의 148인의 선거인단 확보를 뛰어넘어 392인의 선거인단, 53.7%의 대중득표를 획득해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초선

그는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서민 경제의 안전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주도했다. 2009년 1월 초, 상원외교위원회 의장으로의 마지막 활동에서 그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조지아의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1월 20일 바이든은 첫 델라웨어 출신 대통령이자, 존 F. 케네디에 이어 두 번째의 카톨릭 신자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을 선서했다.

5월 바이든은 페트로달러 전쟁의 전장인 이란 미군기지를 방문하여 "국제질서의 기초는 페트로달러를 중심으로 한다"는 미국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바이든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이란에 12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자는 것에 대해 내부적으로 질책했지만 막지 않았고, 그의 목표론은 가치가 있었다. 2009년 바이든은 페트로달러 전쟁의 목표를 "이란 정권의 축출 및 서구 민주주의 정착"에서 "이란의 페트로달러 시스템 이탈 저지"로 변경하면서 전쟁의 양상도 달라졌다.

이란 미군기지를 방문하는 바이든

바이든은 약 여덟 달에 한 번씩 직접 이란을 방문했으며, 이란 지도부에 미국의 입장을 확실히 전달하는 데 있어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2] 바이든은 2012년까지 두 차례 이란을 방문했으며, 결국 이란의 지도자 하메이니가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떠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조약에 서명하고, 미군이 이란에서 철수하며 전쟁이 끝났다. 2011년 체결된 테헤란 조약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140개 국가가 서명했다.[3]

바이든은 경기 부양책 중 하나인 인프라 지출을 감독했으며, 계속된 경기침체에 주도적으로 대응했다. 이 기간 동안 바이든은 예산의 낭비나 부패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했고, 2011년 2월 그 정책이 성공했을 때, 그는 부양책을 통한 사기 사건은 1%가 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9년 7월까지 실업률 상승에 직면한 바이든은 행정부가 "경제의 침체 정도를 잘못 파악했다"고 인정했지만, 대규모 확장재정을 통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유지했다.

바이든은 2010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을 위해 열정적인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선거에서 공화당이 선전한 것에 책임을 지고 에마누엘 비서실장이 퇴임했고, 행정부 내에서 공화당 의회와 교섭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이든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바이든과 의회의 관계는 더욱 긴밀 해졌다. 그는 러시아와의 핵 감축 협정에 대한 상원의 승인을 얻기 위해 물밑에서 움직였고 이 조약은 성공적으로 체결되었다. 2010년 12월, 바이든은 상원의 중도파 지도자 미치 맥코넬과 함께 부시의 감세 기조를 유지하면서 세금 정책을 개혁하는 패키지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정책은 2010년 감세, 실업보험 재승인 및 일자리 창출법으로 통과되었다.

2011년 5월까지, 여섯 명의 하원의원이 활동하는 "바이든 패널"은 전반적인 적자 감축 계획의 일환으로 부채 한도를 상향하는 초당적 합의에 도달하려고 시도했다. 부채한도 위기는 몇 달 동안 고조되었지만, 바이든과 맥코넬의 관계는 교착 상태를 깨고 바이든의 의도대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이든은 행정부에서 부채 문제에 대해 의회와 협상하는데 그 어떤 실무자들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한 공화당 참모는 "바이든은 대통령으로서 진정한 협상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맥코넬은 대통령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성공적인 거래의 열쇠였다."고 말했다.

바이든의 인기가 하락하자 윌리엄 데일리 백악관 비서실장은 2011년 말에 신선함이 떨어지는 오바마를 힐러리로 교체하는 것에 관한 여론조사를 비밀리에 실시했다. 그 결과 교체하는 것이 바이든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바마 교체론은 힘을 잃는 듯 보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대선이 다가오며 바이든의 인기는 떨어지고 있었고, 참모들은 신선하고 충격적인 반전이 필요하다고 바이든에게 간언했다. 그리고 백악관 관계자들은 나중에 바이든이 오바마 교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바이든은 이후 오바마를 개인적으로 만나 다음 부통령 후보로 지목되지 않을 것임을 알렸고, 오바마는 분노하며 다음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말했다. 2012년 민주당 프라이머리는 바이든과 오바마의 대결이었으며 힐러리는 바이든을 지지했다. 오바마에 대한 동정 여론이 강했지만, 바이든은 결국 대의원의 과반수를 확보했다. 이후 바이든은 9월에 열린 2012년 민주당 전국대회에서 자신의 아들인 보 바이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11월 6일 바이든 부자는 미트 롬니와 폴 라이언을 상대로 540명의 선거인단 중 353명과 대중투표의 51.2%를 확보해 승리했다.

2012년 12월, 바이든은 보를 총기폭력 태스크포스의 위원장으로 임명했으며 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원인을 해결하고 총기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달 말, 미국이 2012년 납세자 구제법안을 통과시킬 때 바이든과 맥코넬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납세자 구제법안은 부시의 감세 정책기조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되, 상류층에 대한 세율만 상향 조정한 것이었다.

재선

백악관을 거니는 바이든 부자

바이든은 2013년 1월 20일 취임식에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바이든은 2013년 말에 발생한 부채한도 위기에서 거의 역할을 갖지 못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2012년 바이든이 납세자 구제법안에서 민주당과 행정부를 대표해 협상할 때 너무 많은 부분을 공화당에 내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2014년 이라크가 테헤란 조약을 탈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무력 시위를 명령했으며 이는 곧바로 승인되어 이라크 위기로 이어졌다. 사담 후세인은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바이든은 몇몇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행정부를 이끄는 동안 이 지역의 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동안 라틴아메리카를 16번이나 방문했으며, 이는 어떤 대통령보다도 많은 기록이다.

또 바이든은 2014년 발생한 러시아의 무력 침공이 발생하자 지금 당장 B-2 폭격기를 발진하라고 명령했다. 바이든은 힐러리 국무장관을 불러 지금 러시아를 막지 못하면 이 정부 뿐만 아니라 미국 자체가 대러 외교에서 앞으로 수 십년간 뒤쳐질 것이라고 경고했고, 바이든의 의견은 많은 민주당 외교정책 전문가들의 견해와는 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진행되었다. 바이든은 사태 발생 이틀만에 직접 혼란한 우크라이나를 찾아 과도정부 대표단을 만나 우크라이나에 미군과 미사일기지를 건설할 것을 합의했다. 이른바 우크라이나 미사일 위기다.

직후 많은 사람들이 바이든이 자주 하던 말실수를 우크라이나에서 굉장히 크게 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바이든이 미국 정부와는 대치되는 입장을 보였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6시간 후 보 바이든 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나가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백악관 브리핑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에 관해 의회의 요청을 구하는 연설을 하자 국제사회는 임박한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보는 브리핑에서 "러시아가 크림반도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존중한다면 모두가 불행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상하원은 초당적 협력으로 빠른 시일 내에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위 법안"을 의결했고,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만이 남자, 푸틴을 고심하게 했다. 결국 푸틴은 크림 반도에서 철수했으며, 러시아 내에서 푸틴의 지지기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4] 바이든은 푸틴이 크림반도에서 철수 명령을 내릴 때까지 일주일 간 우크라이나에 머물렀고, 이것은 많은 미국 사람들에게 바이든의 이미지를 배짱과 카리스마 있는 사람으로 각인 시켰다.

그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아들인 보 바이든이 종종 2016년 민주당 프라이머리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그의 가족, 많은 친구, 후원자들이 2014년 중반부터 그가 다음 대통령 경선에 출마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특히 2015년 중반에 힐러리 클린턴의 호감도가 떨어지면서 바이든은 아들의 대통령 출마를 진지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5년 5월 보 바이든 부통령이 급성종양으로 사망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는 사라지게 되었다. 바이든은 아들을 잃은 상심으로 임기 후반 국정에서 사실상 손을 놔버렸다. 많은 정치인들이 보 바이든 부통령의 사망을 애도했으며, 바이든은 훗날 "매일" 자신이 아들을 부통령으로 지목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바이든은 오바마를 다시 부통령으로 선임하려고 했지만, 오바마는 정중히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바이든은 결국 힐러리를 선임했으며, 힐러리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딕 체니 수준의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게 되었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자 바이든은 2016년 6월 9일 힐러리를 지지한다고 밝힌 후 전국대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2016년 대선 내내 바이든은 트럼프에 대해서 다채로운 어휘를 사용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퇴임 이후

부통령을 퇴임한 후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는 암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지원했고, 2017년 회고록 약속해주세요 아버지를 집필했다. 2018년에 그는 상원의원 매케인이 미국의 이상과 초당적 협력에 관심이 많은 것을 칭찬했다. 한편 바이든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을 겨냥한 2018년 우편물 폭탄 테러 시도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바이든은 퇴임한 대통령이었으면서도 대중의 인기나 언론의 조명을 유지했으며, 정치, 외교, 기후변화, 경제 및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직에 대해 계속 언급했다. 2019년까지 바이든과 아내는 여러 저술활동을 통해 자산이 2.2백만 달러에서 8백만 달러로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의 아들 헌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가스회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우크라이나에 헌터바이든의 혐의점을 찾을 것을 종용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민주당 의원들은 국내 정치인 탄압을 위해 외국 세력과 결탁하려 했다며 탄핵안을 가결시키려고 준비했다. 바이든은 "우리가 싫어하는 상대와도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며 탄핵안 제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하원은 탄핵안을 가결했다. 물론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바이든의 이런 행보는 바이든의 정치적 위상에 흠집을 내기위한 트럼프의 체면을 구겼으며, 재야에서도 계속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민주당 지도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정치적 입장

평가

지지율

선거이력

어록

I spent more time with Xi Jinping than any world leader had by the time we left office. this is a guy who isn't as doesn't have a democratic with a small D bone in his body. this is the guy who was a thug who in fact has a million Uyghurs in reconstruction camps meaning concentration camps. this is the guy who you see what's happening right now in Hongkong. ...(중략)... when in fact they said we're going to set up a no-fly zone that can't fly through our zone. he said what do you expect me to do I was over there. I said we're gonna fly right through it we flew B-1 bombers through. it we got to make it clear. they must play by the rules. period period period
나는 내가 퇴임할 때까지 세계의 어떤 지도자보다 시진핑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뼛속에 민주주의의 ㅁ자도 새겨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재교육캠프라고 불리는 정치범수용소에 수백만 명의 위구르인을 가둔 깡패입니다. 바로 지금 홍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있지 않습니까?...(중략)...그들이 우리가 통과할 수 없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B-1 폭격기를 보낼 것이고, 우린 거길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합니다. 그들은 반드시 국제법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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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2000년대 초 당시 상원 외교위원회 의장이었다.
  2. 바이든은 이란 정부에게 페트로달러 시스템으로 돌아오면 전쟁은 끝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던졌다. 부시 행정부는 전쟁을 개전했지만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고, 미군은 이란에서 싸우고 있었지만 정확한 목표조차 수립되지 않아 그저 상륙지점을 중심으로 점령지를 확대해가던 상태였다.
  3. 조약에서 탈퇴할 경우 모든 조인국이 연합해 국제경제체제에서 퇴출 시킬 것을 명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참여했다. 러시아와 중국, 인도는 참여를 거부했다.
  4. 미국 역시 미군 주둔과 미사일 배치 계획을 백지화했다. 미국이 참을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 인지 확고히 보여준 셈이다.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아니라 반란을 사주해 친러정권을 수립하는 기존의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