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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 대중은 바보로 우롱되었으며 의식도 하지 못한 채로 하나의 장기말에 올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중략)...
그것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중요치 않다. 이들 대중을 자극시킬 수 밖이 없는 이유는 이들이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姜基東[1]- "朝鮮反帝同盟 理論"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어느 날에 도처 안쪽을 방문하여 그 중 가장 큰 선술집을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연달아 간행되는 부르주아 신문들의 호위판으로 인해 대두하는 세계적 전쟁의 흥분을 관찰했을 것이다. 하나같이 비이상적인 소식과 이들 소식이 서로 연이어 오는 불안정한 상황을 통해 격정이 고조되었고 우리가 알던 민중의 반전 상식은 죽어버렸다."
朝鮮反帝同盟 記錄紙

참전운동(參戰運動)은 조선국(朝鮮國) 내에서 1910년대 초반부터 전쟁을 반기는 제국주의적 사상이 도래되어 사회가 고조되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조선 사회민주당(朝鮮 社會民主黨) 계열 노동가들의 부르주아 재벌 타도 운동과 맞물려서 벌어진 일련의 사회적 혼란 혹은 그러한 당대의 활동들을 말한다. 이러한 기조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극도에 달했으며, 내부의 민권·참정권 운동과도 큰 맥락에 위치하였다. 뚜렷한 목적으로 보기에는 포괄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는지라 참전운동이러는 명칭 이외에도 "광무운동(光武運動)", "인민참정운동(人民參政運動)"이라고도 명명하기도 한다.

개요

20세기 초는 유럽에서는 애국심(愛國心)과 민족주의(民族主義)에 열풍이 강했던 시기로서 수많은 유럽의 병사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사명으로 대거 지원병을 나설 것을 자원했다. 또한 국가적으로도 모병과 애국심 고취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특히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시대를 거쳐온 이들로서는 전쟁에 대한 다소 낭만적인 생각과 동경심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는 더불어 조선 내에서도 청나라로부터 자주 국가로서 점진적인 청 중심의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많은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 계층을 비롯하여 애국심을 갖춘 이들이 양성되었으며,[2] 이들 역시 상당한 개화기에 문물을 빠른 시일 내에 습득함으로서 조선 사회를 구성하는 중심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로 수백년간 외부의 침입을 겪은 적 없는 조선의 지식인들과 대중들은 전쟁과 식민 제국 사회에 막연하고 동경적이었던 것에 대해 곧 일본(日本)처럼 제국주의(帝國主義)를 공공연히 지지하는 한편, 영국(英國)의 간섭에서도 벗어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3]

각주

  1. 강기동, 광무시대(光武時代)에서 활동했던 인물로서 능통했던 일본어를 바탕으로 일본의 사상이나 문학들을 번역하였고, 대조선군 기병대로 근무하기도 했다.
  2. 이는 청나라영국으로부터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을 자주 독립국임을 명시할 것을 통해 청나라의 조공 질서에서 벗어난 점도 참전운동의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
  3. 영국은 조선을 실질적으로 직접 통치를 한 경우는 없으나, 거문도(巨文島)를 아시아의 주둔 항구로 조차를 한다던지, 치외법권·최혜국 대우를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선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