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페르시아의 비잔티움 침공의 일부

전투 기록화
날짜1250년 1월 19일~ 1250년 2월 7일
장소비잔티움 제국 콘스탄티노플
결과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조지아 제국 성립

교전국
중페르시아 제국 비잔티움 제국
지휘관
페르펜노스 3세 요안니스 4세
병력
경보병 34000명
궁수 15000명
글렌크롬 200명
수비군 32000명
카타프락토이 2000명
바랑인 용병 4000명
시민 210000명
피해 규모
23000명 사망
204명 부상
공성무기 304대 파괴
글렌크롬 전멸
시민 180000명 이상 아사
군인 28000여명 사망
군인 3,832명 부상
1명 포로
테오도시우스 성벽 파괴
아야 소피아 성당 반파

개요

페르시아의 비잔티움 침공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양측 도합 총 24만여 명이 사망한 유럽 역사상 최대 사상자 전투이다.

상세

요안니스 4세는 이미 참모진으로부터 1250년 초에 페르시아 군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휩쓸고 있었다는 걸 전달받아 알고 있었지만, 넓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전부 평정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어 군사적 계획을 방어 위주로 수립한 뒤, 콘스탄티노플 인근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2월 7일에는 에벨리누스 안드레아쿠스 장군이 이끄는 32000명의 방어군이 시노페 인근에서 14일간의 전투 끝에 전멸한 뒤 희망을 버리고 20000명을 추가 징집하고 주변 주민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끌어들였다. 방어군으로 쓸 심산이었다.

전투 전 전황

의외로 비잔티움 제국 측에 불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잔티움군은 육군으로 콘스탄티노플 너머에 20000명의 방어군을 배치한 상황이었고, 해군으로 금사슬이라 불리는 해안 봉쇄도 단행했으며, 중페르시아의 해상 보급을 너무 잘 틀어막아 버려 중페르시아군의 중보병 부대를 아사 직전까지 끌고 가기도 했다. 마침 가뭄이 든 해라 중페르시아 제국의 약탈도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노페 방어전에서의 32000명 부대와 에벨리누스 안드레아쿠스의 손실은 장군을 죄다 반란혐의로 처형시키던 비잔티움군에게는 뼈아픈 손실이었고, 종내는 황제가 친히 부대를 지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페르시아군으로써는 좀 힘들어지는 상황이었다. 비록 소수정예로 꾸렸다고는 하지만 5만이 넘어가는 병사들의 보급을 해상 보급으로 때우고 있었고, 이 일도 비잔티움군의 해군에 막혀 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군대를 따라온 행상인들에게서 어음으로 돈을 지불해 가며 식량을 먹이는 상황이었다. 군대의 사기는 더욱 처참했다. 기록으로는 32도를 넘나드는 일교차와 떙볕 아래 병사들이 더위를 먹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며칠 전의 시노페 방어전으로 인해 이미 2000명의 병사를 잃은 상황이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막아라!

1월 16일, 비잔티움의 밀사가 콘스탄티노플로 편지를 한 통 전해 왔다.

그들이 지금 바다 건너 오려고 배를 스무 척 가까이 동원했다

바다 보급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원활하다. 그들이 장군 하나를 끌고 왔다.그자의 발을 자르고 손을 잘라가면서 성벽 구조를 알아보려고 했다.

비잔티움 멸망사,피터 윅스브리스 저,제일검(1998)

이 편지를 전해 받은 콘스탄티노플은 대혼란에 빠졌다. 만약 이들이 고문한 장군이 에벨리아누스 안드레아쿠스라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콘스탄티노플 방어군을 담당했으며, 기술자들과도 두루 친하던 사이였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요안니스 4세는 안드레아쿠스가 담당하던 서쪽 측면 방멱을 무너뜨려 바리케이드처럼 만들었다.

한편 요안니스 4세는 라벤나의 교황청에 돈을 요청해 그 돈으로 베네치아와 밀라노의 무장 선단을 고용해 무기와 식량을 사 왔고, 선단을 해군으로 이용해 보스포루스 해협을 틀어막았다. 밀사가 보낸 페르시아 선박 스무 척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비잔티움군은 방어 준비를 끝냈고, 1월 17일부터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방어 준비에 들어갔다.

전개

1월 18일, 페르펜노스 3세가 이끄는 4만의 부대는 저녁 늦게 콘스탄티노플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우리 땅이 될 것이다.
페르펜노스 3세

1월 19일부터 페르시아군은 준비해왔거나 현지에서 급조한 투석기와 망고넬을 이용해 돌과 불타는 천으로 묶은 볏짚 등을 던져 넣었고, 이틀이 지나지 않아 성 안에서는 불길이 훤히 보일 정도로 타올랐다. 이에 비잔티움군은 대포를 쏘거나 물에 독을 푸는 방법 등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주민 대부분은 징집되었거나 몰다비아 왕국으로 도망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식량 보급은 교황령이 보내 준 수송선단으로만으로 충분했으며, 대부분의 군인들은 이 공방전이 수십일 내에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절정

하지만 수송선단으로는 수만 명을 지속해서 먹여살릴 수 없었고, 식량과 재정도 슬슬 바닥나기 시작한 1월 31일 요안니스 4세는 후퇴를 결심했다. 그는 수송선단을 두 쪽으로 나눠 한 쪽은 민간인들을 사돈 관계였던 몰다비아 왕국으로 피신시키는 한편, 나머지 한 쪽은 남은 방어군을 산악지형으로 페르시아군을 막을 수 있는 캅카스로 보내 후일을 도모시키려는 것이었다. 트라키아 항구는 아직 포위되지 않았기에 , 다른 한 쪽이 대포를 쏘며 엄호하는 동안, 나머지 한 쪽이 대피시키는 방법으로 2월 3일 콘스탄티노플 방어군은 2,000명만 남기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철수시켰다. 시가지 대부분이 타올랐지만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무사했기에 남기로 결정했던 일부 피난민들은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버티고 있었다.

남쪽 성벽이 뚫리다

2월 5일 트라키아 항구에서 마지막 미사를 올린 대주교와 요안니스 4세는 몰다비아 왕국으로 향했으며, 이후로 자세한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남아있던 수비군 2,000명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분전했으니 결국 남쪽 성벽이 뚫렸고, 결국 모두 잡혔으나 풀려났다. 아후 페르펜노스 3세는 공병과 기술자들을 대거 파견해 콘스탄티노플 재건 작업을 시작했다.

영향

여담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