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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제국
주급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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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치주
퀘벡 자치주
État autonome du Québec
Autonomous State of Québec
주기 문장
Je me souviens
나는 기억하노라
주도 퀘벡
최대도시 몽레알
면적 1,542,056km2
인구 816만 4,361명 (2017년)
인구밀도 5.29명/km2
GDP $6,361억 7,363만 9,226
1인당 $76,126 (2016년)
시간대 GMT-05:00
주지사 필리프 쿠야르 (재선)
주의회 19석
17석
3석
1석
1석
프로빈스 지사 3석[1]
1석[2]
국회의원 5석
3석
1석
상징 주조 흰올빼미
주목 자작나무
주화 붓꽃
지역번호 438
ISO 3166-2 AE-QC

개요


미국의 자치주.

상세

미국의 모든 특별행정지역중 가장 그 규모가 크다. 미국에서 특별행정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1,200만명 가량인데 그중 거의 3/4 가량인 810만여명이 퀘벡에 모여살고있다. 또한 북부 지역중에서 그나마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중 하나로, 지리상 북부로 분류되는 4개의 주[3]의 인구중 92%가 퀘벡주의 거주자이니 그만큼 퀘벡주가 큰 주임을 알 수 있다.

영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다른 미국의 지역과는 달리, 퀘벡은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속한다. 누벨프랑스 식민지 이후 현재까지 프랑스의 정체성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주민 대다수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제1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문화적인 정체성이 독자적인 편이다.

퀘벡 내에서는 자신들을 가리키는 별명으로 캐나다(Canada)라는 표현도 쓰인다. 퀘벡시 일대를 가리키는 역사적인 지명이며, 퀘벡이 독립하게 된다면 국호가 "캐나다"가 되어야한다는 주장이 나올정도로 퀘벡 내에서는 대중적인 별명이다.

주가


공식적인 주가는 없으나, 오 캐나다(Ô Canada)가 비공식적인 주가로서 사용되고 있다. 주로 퀘벡 독립론자 혹은 자주파들에게서 자주 불리는 노래이기 때문에 퀘벡 내에서는 독립 반대파들을 중심으로 노래에 대한 반감이 꽤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독립 여론이 높은 몇몇 지역에서는 황실 찬가 대신 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퀘벡의 주요 스포츠 팀에서도 이 노래를 자신들의 주제가로 사용하기도 한다.

역사

누벨 프랑스 시기

미국의 퀘벡 매입

조용한 혁명

퀘벡은 68 혁명과 같은 급진적 형태의 자유주의 광풍을 맞지는 않았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국제적인 경향에 맞추어 보수적인 프랑스계 가톨릭 교도들이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점차 사회를 진보적으로 바꾸어나갔다. 기존에 가톨릭이 지배하다시피 했던 지역 정부는 세속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사회 전반도 가톨릭의 보수성에서 탈피해 성소수자, 여성주의, 원주민 권익 등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피에르 트뤼도가 퀘벡에서 주지사를 지내다가 총리로 재임하면서 각종 개혁 정책을 추구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를 두고 퀘벡에서는 아무런 유혈 사태나 특정한 시위 없이 평화적으로 포용적인 사회를 이루어냈다는 뜻에서 197~80년대의 사회 변혁 과정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표현한다.

1976 몽레알 올림픽

1976년 치뤄진 몽레알 올림픽은 퀘벡의 미래를 바꾸어놓았다. 1972 뮌헨 올림픽 당시 터진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의 인질극으로 인해 기존에 예상했던 것보다 100배 이상으로 경호 비용이 더 들어간데다가, 오일 쇼크로 인한 미국의 불경기까지 겹치면서 올림픽의 저주라고 불리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몽레알 시 당국은 물론, 퀘벡 시 역시 올림픽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을 신청했다. 게다가 이때가 하필이면 신자유주의와 경제 비간섭주의, 연방주의를 표방했던 레이건 내각이던 시절이라 중앙 정부마저 퀘벡의 재정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4] 그나마 1984년 레이건이 실각하고 트뤼도가 다시 총리직에 복귀한 후에야 겨우 겨우 중앙 정부의 지원으로 퀘벡의 지역 경제가 소생할 수 있었지만, 빚을 모두 갚는데에는 거의 15년 이상이 걸렸다.

이로 인해 퀘벡 주는 거의 20년에 가까운 경제적인 침체기를 겪었다. 퀘벡이 경제적으로 재부흥한 것은 2000년대 IT 산업들을 퀘벡들에 대거 유치한 이후에서이니 얼마나 퀘벡이 겪은 피해가 막대했는지를 가늠케한다.

이때 나온 용어인 올림픽의 저주는 현재까지도 유효한 공식이다. 2004 아테네 올림픽,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대표적인 올림픽의 저주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분리독립 운동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서구의 지역 독립 운동이다. 그러나 독립파와 잔류파가 팽팽하게 맞서는 스코틀랜드와 달리 퀘벡의 독립 운동은 점차 퇴조하고 있으며 독립보다는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운동의 경향이 변화하고 있다.

자유 퀘벡 만세!

1967년, 퀘벡을 방문한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은 퀘벡을 방문하던 도중, 그 옛날 파리 해방때가 생각난다며 자유 퀘벡 만세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게 된다.

Vive Montréal ! Vive le Québec !
몽레알 만세! 퀘벡 만세!
Vive le Québec... libre !
자유... 퀘벡 만세!
Vive le Canada[5]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

이 연설로 한동안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단교 직전까지 몰렸지만, 오랫동안 영국계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아온 프랑스계 퀘벡 주민들은 환호하였으며 이 연설은 1960년대 퀘벡 분리독립운동을 촉발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10월 위기

1970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극좌 독립단체 "퀘벡 해방 전선"(FLQ)이 영국의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와 퀘벡주의 부지사인 피에르 라포르테를 납치하는 일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FLQ는 1963년부터 활동한 조직이었으며 드골의 자유 퀘벡 연설 이후 퀘벡인들의 집단 봉기를 촉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사건이 10월 5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른바 10월 위기라고도 하는 사건이다.

10월 5일 크로스가 납치된 후, 10월 11일 라포르테까지 납치되자 제국 정부는 12일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FLQ의 조건은 인질과 정치범을 교환하는 것이었으나 제국 정부가 거절했다. 상황이 어지러워지자 한 기자가 당시 퀘벡주의 주지사를 맡고 있던 피에르 트뤼도에게 상황이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피에르 트뤼도 주지사는 Just watch me라는 대답을 남겼고, 이는 모든 미국인들이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어록중 하나가 된다.

트뤼도 주지사에게는 퀘벡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을 출동시킬 권한이 없었기에 실질적 군 통수권자였던 리처드 닉슨 총리에게 퀘벡 지역을 상대로 계엄령을 선포해달라는 비밀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닉슨 내각은 이를 민주주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트뤼도 총리는 당시 황제였던 에드워드 2세에게 직접 편지를 써, 군 통수권자인 황제가 퀘벡 지역을 향한 비상 계엄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황제가 인가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영토 내에서 내각의 동의 없이 황제와 주지사의 독단으로 한 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진 사례가 생겨났다.

물론 황제와 주지사가 독단으로 내린 것은 아니고, 당시 퀘벡 내에서는 계엄령을 바라는 여론이 높았으나 닉슨과 트뤼도의 소속 정당이 달랐기에[6] 정치적인 목적으로 견제하려고 국가 안보 상황을 이용한다는 비판이 거셌기 때문에 여론을 믿고 황제와 트뤼도 주지사가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주지사를 탄핵해야한다니, 황제의 권력을 제한해야한다느니 등 각종 논의가 튀어나왔으며 일련의 사태는 현재까지도 입헌군주제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과 주의 권한 등을 두고 첨예하게 벌어지는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하여간 이 전례 없는 사태로 인해 퀘벡 내에서는 계엄령이 내려졌고, FLQ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명령도 내려졌다. 11월 27일, 라포르테가 숲속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으나 테러범들 역시 상당한 인명 피해를 냈다. 이후 퀘벡 도처에서 FLQ와 미제국군간의 산발적 교전이 이뤄진 끝에 12월 5일, FLQ는 크로스를 석방하고 니카라과로 망명하였다.

독립 주민투표

한바탕의 소동 이후에도 독립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자, 마이클 두카키스 총리는 1988년 퀘벡의 독립 투표를 제안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퀘벡 독립을 반대한다는 답변이 높게 나왔기에 반대측이 압승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지만, 정작 투표함을 열어보니 50.6% 대 49.4%라는 살떨리는 표차로 겨우 독립이 부결되었다. 개표 초반에는 몽레알 외곽과 퀘벡 등 전통적으로 독립 여론이 높은 지역의 투표함이 열려 약 45% 대 55%로 독립 찬성이 앞서나가다가, 개표율 98%에서 고소득층이 다수 거주해 독립에 부정적인 몽레알 중심부의 개표함이 열리며 1%p 남짓한 표차로 간신히 독립이 저지된 것.

이 사건으로 두카키스 내각은 사실상 실각하였으며 1년 뒤의 총선에서 조지 H. W. 부시에게 총리직을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 H. W. 부시 다음에 총리가 된 빌 클린턴은 퀘벡에 대한 유화론자였다. 높은 퀘벡의 분리독립 지지 여론을 감안하여, 퀘벡에게 특혜를 부여하기로 결정했고, 2번째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주민투표의 내용은 독립을 하지 않는 대신 자치주라는 고도의 자치 권한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주와는 달리 주지사를 직접 선거로 실시하며, 중앙정부 지원금도 배로 늘어나는 안건이었다.

1995년 9월, 2차 주민 투표에서 자치주 찬성안이 83.1%로 가결되어 퀘벡주는 해체되고, 현재와 같은 퀘벡 자치주가 탄생했다.

분리독립 정당의 발흥과 현재

역설적으로 빌 클린턴 내각의 퀘벡 자치령 설립은 퀘벡인들이 단일된 정치 행동에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2차 주민 투표가 실시되기 약 6개월 전, 일부 중도좌파 성향 시민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퀘벡당이 설립되었다. 퀘벡당은 지지율이 5%에서 시작하였지만, 2차 주민 투표에서 주도권을 잡아 나가면서 지지율을 크게 올렸다. 그렇게 자치주의 첫번째 주의회 선거에서 퀘벡당은 총 35석중 27석을 휩쓸며 압도적 1당이 되었고 주지사 선거에서도 59.3%로 첫 직선 퀘벡 주지사를 선출했다.

그러나 퀘벡당의 선전이 독립 운동의 부흥을 의미하는건 아니었다. 오히려 퀘벡당은 중앙 정치계에 편입되면서 독립보다는 자치를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퀘벡의 민족적 자주성은 높아졌지만 반대로 독립 여론은 불식되었다. 이에 실망한 일부 당원들이 2007년 퀘벡 독립당이라는 당을 창당해 떨어져나갔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현재는 군소정당 이하로 미끄러졌다.

퀘벡당은 사회당과 연합해 현재까지 퀘벡 내에서 반독립, 친정부파를 대변하는 자유당과 양당 구도를 이루고 있다. 거의 30년간 이어진 두 당의 양당제는 퀘벡의 독립 열기를 온건한 방향으로 환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퀘벡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낼 수 있게 만들었다.

만약 독립하게 된다면?

일단 2021년 10월의 여론조사를 기준으로 퀘벡 독립에 찬성하는 여론은 41%, 반대하는 여론은 54%로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보다 약간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카탈루냐 독립 운동 등 해외 민족주의 운동의 발흥으로 인해 퀘벡 내에서도 독립을 이뤄내야한다는 분위기가 있는 편이다. 게다가 1970년 10월 위기 당시 황실의 조치 때문에 공화주의 성향을 가진 시민들 대다수가 독립 운동을 이끌고 있어 미국 내에서 독립 주장이 나오는 그린랜드나 쿠바 등 다른 지역에 비하면 독립 가능성이 꽤 높은 편이다.

만약 퀘벡 자치주가 독립하게 된다면 국명은 퀘벡 공화국(République du Québec)이나 캐나다 공화국(République du Canada)이 될 것이다. 국가는 자주파 시민들이 비공식적인 주가로 사용하는 "오 캐나다"가 될 가능성이 높다. 수도는 퀘벡시로 하는 것이 현재 독립파 진영에서 결정되어있으나 정치 체제는 미국의 황제를 모시는 입헌군주제로 할지 혹은 아예 독립된 공화국으로 할지에 대한 여론이 분분하다.[7] 일단 독립 진영 내에서는 여론이 2:8 정도로 후자가 압도적인 편이긴 하지만 독립에 신경쓰지 않는 나머지 반쪽의 퀘벡 시민들에게 황실의 여론은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있어서는 북아메리카 전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상징성이 깨질 뿐더러 북부의 오지 지역의 진출 기지가 되는 퀘벡이 독립함으로서 빈랜드주, 그린랜드주가 월경지가 될 것이다. 더군다나 퀘벡이 중국, 러시아 등 미국의 가상 적국과 손을 잡는다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안보의 위협이 되지만, 퀘벡은 프랑스적인 정체성이 더 크기 때문에 프랑스나 유럽 세력을 버리고서 중국과 러시아를 택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또한 그린랜드, 쿠바, 빈랜드, 일부 이누이트 공동체들, 하와이 등 소수민족의 비율이 높은 지역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독립을 요구하는 캘리포니아 등이 연달아 독립을 선언해 제국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제국 정부의 현실적인 우려도 있기 때문에 큰 변수가 없다면 제국 정부 측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독립이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위 행정구역

하위 프로빈스는 총 4개로 구성되어있다.

  • 몽레알(Province of Montréal): 인구 5,098,927명. 최대 도시인 몽레알 시가 위치한 지역이다. 몽레알이라고 하면 세인트로렌스 강 한 가운데에 위치해있는 하중도만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8] 몽레알 프로빈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 퀘벡(Province of Québec): 인구 2,904,694명. 주도인 퀘벡시가 위치한 곳으로 몽레알 프로빈스에 비해 더 프랑스적인 문화가 잘 드러나는 지역이다.
  • 생펠리시앵(Province of Saint-Félicien): 인구 124,902명.
  • 라포르주(Province of Laforge): 인구 35,838명. 여기에 상주하는 인구는 극소수의 과학자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 뿐이다.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추위가 찾아오는 대표적인 미국의 오지이다.

지리

최대 도시는 몽레알로 인구 800만중 절반이 조금 안되는 400만의 인구가 몽레알과 그 주변 근교에 거주하고 있다. 영어로는 몬트리올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

두번째로 큰 도시는 퀘벡시이다. 퀘벡시는 퀘벡의 주도이다. 퀘벡 주와 퀘벡 시를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앞에 관사 le가 붙느냐 아니냐인데, 관사가 붙으면 퀘벡 주로 간주된다. 퀘벡시는 행정구역 내 인구가 50만, 광역 인구가 80만에 달하여 몽레알에 비해 그 규모가 다소 작지만 프랑스의 문화를 잘 간직하여 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대표적인 미국 북부의 관광지이다.

이 두 도심권은 세인트로렌스 강으로 이어져있다. 세인트 로렌스강은 북대서양에서 출발해 퀘벡시를 거쳐 몽레알을 지난 후 오대호로 흘러간다. 세인트로렌스강을 경계로 북쪽으로 올라갈 수록 인구는 매우 적어지며 추운 기후로 인하여 이누이트들을 제외하면 상주 인원은 거의 없다.

정치

2020년 퀘벡주지사 선거 지역별 결과
정당 격차 투표율
후보 필리프
쿠야르
장 프랑수아
리제
(1위/2위) (선거인/표수)
득표수
(득표율)
2,545,823
(51.44%)
2,135,205
(43.14%)
555,205
(△ 8.30%)
4,949,357
(82.93%)
몽레알 55.7% 38.6% △ 17.1% 83.2%
퀘벡 43.9% 51.0% ▼ 7.1% 83.1%
생펠리시앵 60.8% 35.9% △ 24.9% 79.9%
라포르주 67.8% 29.7% △ 24.9% 76.2%

자유당퀘벡당의 진보 양당제이며 보수당 등 다른 전국 정당들은 퀘벡 내에서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퀘벡당이 현재 사회당과 연대하고 있기 때문에 퀘벡 지역의 자유당은 전국 자유당에 비해 조금 더 보수적인 색체를 띈다.

특별행정지역인만큼 몇 안되게 주지사를 직접 투표로 선출하는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데다가 나머지 지역들은 대부분 한 정당의 텃밭이거나 규모가 너무 작아 영향력이 미미하므로 퀘벡 주지사 선거는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는 선거이기도 하다. 주로 보수당과 자유당의 지지를 받는 친미파 후보와 퀘벡당과 사회당의 지지를 받는 자주파 후보가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주지사인 필리프 쿠야르는 자유당 출신으로 친미파 출신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공화주의에 대한 지지 여론이 높은 지역으로, 독립 운동과 공화주의 운동이 결합되어 퀘벡 내에서 공화주의로의 전환을 바라는 여론은 못해도 4~50%대를 기록하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라서는 60%대 후반까지 기록하기도. 다른 지역이 모두 20%를 간신히 넘긴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수치이다. 하술하듯이 퀘벡의 문화가 프랑스에서 기원하기 때문에, 영국 기반의 왕족인 워싱턴 왕조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역대 주지사


퀘벡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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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퀘벡 역사 지구에 위치한 올드 퀘벡 프티 샹플랭 거리

미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1언어가 영어가 아닌 곳이다.[9] 2022년 기준으로 퀘벡 내에서 영어를 제1언어로 쓰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7%에 지나지 않는 반면, 프랑스어를 제1언어로 쓰는 사람은 73%에 달했다. 양쪽 언어를 동등한 비율로 쓰는 사람도 20%나 된다.

그럼에도 제국 정부가 퀘벡과 다른 지역의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 결과, 현재는 98%의 퀘벡 주민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 단지 쓰지 않는 것일 뿐이다. 미국 내에서는 퀘벡 주민들이 어설프게 영어를 한다고 하여 Quenglish라며 퀘벡 사람들의 억양을 놀리기도 한다.

퀘벡인들은 자신들의 프랑스적 정체성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그런만큼 중앙정부의 프랑스어 보존 정책 역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편이다. 일부 영어 화자들은 퀘벡에서 모든 것이 프랑스어라며 불평하기도 하지만 이는 소수 의견이다.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만큼, 제1의 종교도 가톨릭교이다. 개신교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며 조용한 혁명 이후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교외와 시골 지역에서는 여전히 가톨릭 특유의 보수성이 남아있다.

경제

교통

퀘벡 주 내에서 가장 큰 공항은 몽레알 피에르 엘리오 트뤼도 국제공항이다. 전 퀘벡 주지사이자 미국 총리였던 피에르 트뤼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트뤼도 국제공항은 너무나도 좁은 공항에 너무나도 많은 항공기가 몰린 관계로, 1978 몽레알 올림픽을 전후하여 새 공항을 짓자는 여론이 높았다. 퀘벡 주 정부는 이에 부응하여 몽레알 미라벨 국제공항을 만들었지만, 연계 교통 부족과 퀘벡 주 정부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파산에 이르렀다. 퀘벡 주 당국은 국제선은 무조건 미라벨 국제공항에 착륙시키게 하는 등 갖가지 수를 썼음에도 미라벨 공항은 몽레알 시와 퀘벡 주 당국의 돈을 빨아먹는 하마로 변했고, 결국 로널드 레이건 내각 시절 보다 못한 중앙 정부가 나서서 미라벨 공항을 민간 업체에게 매각하였다. 그러나 민간 업체로 매각된 이후에도 심각한 적자는 계속되었고 결국 1997년 여객 공항을 폐항해 현재는 화물기만이 드나들고 있다.

퀘벡 주 정부에서는 2개 밖에 활주로가 없는 트뤼도 국제공항에 3번째 활주로를 지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몽레알 시의 지속적인 팽창으로 인하여 몽레알 인근까지 시민들의 거주지가 확대되어 인근 주민들의 소음 관련 클레임이 엄청난 상황이며, 설상 가상으로 환경 단체들과 몽레알 시민들이 몽레알 시의 대기 오염을 이유로 제3 활주로 건설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어 난항을 겪는 중이다.

지금도 트뤼도 공항은 주민들의 소음 항의를 피하기 위해 밤중의 취항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새벽 6시가 땡하고 치면 공중을 멤돌던 각종 화물기와 여객기들이 우르르 착륙하는 진풍경을 매일 볼 수 있다.


  1. 몽레알, 생펠리시앵, 라포르주
  2. 퀘벡
  3. 퀘벡 자치주, 이누이트 자치특구, 그린랜드 자치주, 빈랜드주
  4. 이때 레이건 내각이 퀘벡의 모라토리엄에 대해 구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때문에 현재까지 퀘벡 내에서 중앙 정치를 불신하고 지역 정당인 퀘벡당을 밀어주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5. 퀘벡 지역을 일컫는 옛 지명이다.
  6. 트뤼도는 자유당 소속이었는데, 닉슨 내각은 보수당 출신이었다.
  7. 전자의 경우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의 예를 들고 있으며, 후자는 카탈루냐 독립 운동웨일스 독립 운동, 아일랜드 독립 운동을 예로 들어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8. 몽레알의 중심지를 가리킨다. [맨해튼 섬]]을 재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하중도이다.
  9. "거의 유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미쉬 공동체 등 몇몇 작은 공동체 내에서 영어가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주급 규모로 가면 퀘벡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