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対南 開拓廳
타이난 개척청
파일:Brunei.png
1628년1756년 파일:Coat of arms of Tainan.png
파일:対南 開拓廳.png 파일:Seal of Tainan.png
국기 국장
준독립국 및 자치령
표어 東島轉出
(동쪽의 섬으로 나아가라.)
파일:Map of 対南 開拓廳.png
노란색타이난 개척청의 세력권, 붉은색술루 술탄국의 세력권.
수도 도카이켄(東海縣)
정치
공용어 일본어
정부 형태 개척 정권 → 호부 정권
칸쵸館長 1대 야마다 나가마사
3대 야마다 다이스케
7대 야마다 타카스케
고후켄護府卿 1대 미나미 카이카제
4대 미나미 이노시타
역사
 • 동도전출(東島轉出) 1628년 6월 17일
 • 미츠린 전쟁(密林戰爭) 1665년 2월 8일
 • 도카이의 변(東海の變) 1756년 4월 11일
인구
1730년 어림 약 1,687,000명
기타
현재 국가 타이난

1지도는 초기 정착 세력권을 말한다. 160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정착지는 군데군데 형성되는 양상을 가져왔으며, 1700년대 중반부터 지금의 국토 전역을 정착 세력권에 안착시키게 되었다.


타이난 개척청(일본어: 対南 開拓廳)은 야마다 나가마사가 아유타야 왕조의 핍박을 피해 태국의 성립된 니혼마치(日本村)의 정착민들을 이끌고 현재의 보르네오 섬 동부의 정착하면서 수립된 준국가정권을 말한다. 타이난 개척청은 야마다 가문칸쵸(館長)를 세습하였고, 개척청의 요직을 차지한 가문들도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는 과두정의 모습을 보였으나, 미나미 카이카제(南海風)가 고후(護府)를 설치하고 스스로 고후켄(護府卿)의 오르면서 미나미 호부(南護府) 정권이라는 이중 정치 체제가 수립되었다.

카이타쿠치 시대(開拓地 時代)

초기에 타이난 개척청은 카이타쿠칸(開拓官)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영구 정착 촌락 건설을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들 카이타쿠칸들은 휘하의 이주민들을 이끌고 소규모 군락 형식의 정착촌을 형성하였는데, 가장 거대한 정착촌을 구성했던 곳은 "도카이 카이타쿠치"(東海 開拓地)였다.[1] 도카이 카이타쿠치는 주변 군락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도시 규모로 성장시켜 타이난 개척청의 중심지이자 일본계 이주민들의 통합 행정거점으로의 역할을 하였다.

한편, 하세쿠라 신지와 그의 측근들이 야마다 미나마사에게 반역으로 치부되어 처형되자, 이들 하세쿠라 가문과 측근들은 도카이 카이타쿠치를 떠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독자적인 정착지를 형성하였는데, 이곳이 "메이슈 카이타쿠치"(明珠 開拓地)였다. 이들은 독자적인 "스구리"(村主)를 선출하여 다른 정착지와는 달리 도카이 카이타쿠치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성장하였다. 메이슈 카이타쿠치와 함께 독립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카쿠 카이타쿠치"(津廓 開拓地)가 있었는데, 이들은 야마다 나가마사와 함께 동도전출을 목표로 넘어왔던 이들이 아닌, 본토에서 핍박 받던 히닌(非人)과 에타(穢多)들이 주도하여 형성되었다.[2] 이들 대부분은 흉악범이나 사회적 쓰레기로서 분류되어 강제로 유배형을 받은 형태였다. [3]

초기에 카이타쿠치는 소규모 군락들로 이루어진 연합체의 성격을 띠었으나, 도카이 카이타쿠치를 중심으로 초기 도시 국가를 수립해 나감에 따라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각의 카이타쿠치는 자신들의 터전을 현지인들과 외부의 요소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조사이"(城菜)를 쌓기 시작하였다. 주요 카이타쿠치는 더욱 더 높은 조사이를 쌓으면서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보호하였고[4], 이러한 조사이는 군사적, 지역적 거점일 뿐 아니라 정치나 경제의 중심지이자 상업 활동지로서의 역할을 해내게 되었고, 이러한 조사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바로 조카마치(城下町)였다. 이러한 조카마치의 형성은 그동안 군데 군데 형성된 카이타쿠치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네트워크로서 작용하였고, 이는 도카이 카이타쿠치를 중심으로 한 통합 정권의 대두로 이어졌다.

한편, 현지민들과의 분쟁을 포함하여 메이슈 카이타쿠치가 도카이 카이타쿠치의 흡수를 거부하고 결사대항 할 것을 선언하면서 1665년에 미츠린 전쟁(密林戰爭)이 발발하였다. 미츠린 전쟁에서 패배한 메이슈 카이타쿠치는 자신들이 패배를 이유로 처형 당할 것을 두려워 하였으나, 3대 칸쵸였던 야마다 다이스케(山田大助)가 하세쿠라 가문을 세습 카이타쿠칸으로 인정하고 그의 측근들에게 농지를 분배하는 등 유화책을 통한 점진적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의 이러한 유화책은 성과를 거두어 신카쿠 카이타쿠치를 비롯하여 도카이 카이타쿠치에게 대항하고자 했던 군락들과 카이타쿠치들을 평화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5]

도카이 시대(東海 時代)와 미나미 고후의 수립

보르네오 섬 전역에 카이타쿠치를 하나로 통합하는데 성공한 야마다 다이스케는 일본계 정착민들의 세력권을 확장하여 섬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철포 기술을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생산지를 만들기 위하여 만덴카이(蔓田街)를 칸쵸의 직할령으로 삼아 전문 기술 인력을 양성하고 포르투갈, 에스파냐와 같은 서구 국가들과의 교류지로서 기능토록 하였다. 이후 총포와 태국의 보병들의 장비들을 바탕으로 한 카이타쿠 군(開拓軍)을 새로이 편성하여 브루나이 술탄국을 위협하고 주요 해안 지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이타쿠 군에 대한 지휘 및 통솔권을 인정받음에 따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양상을 꾸릴 수 있었다.[6] 그는 밀림으로 우거진 지역들을 도로, 교량으로 정비하였고 기존의 카이타쿠쵸 직제(開拓廳 職制)에서 도카이 직제(東海 職制)로 개편함에 따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탄력성과 기틀을 다졌다.

그러던 중, 5대 칸쵸인 야마다 미치스나(山田道沙)가 브루나이 술탄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을 유지하기 위하여 개척민들의 연공 부담을 강화하자 이에 분노한 개척민들은 전쟁을 종결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아우성을 쳤고, 지속적인 전투로 피로와 불만이 쌓일대로 쌓였던 카이타쿠 군의 지휘관 미나미 카이카제(南海風)를 중심으로 1701년, 도카이의 혁란(東海の革亂)을 일으키면서 미치스나의 퇴임을 종용하였고, 이에 굴복하자 카이카제는 야마다 도이치로(山田島夷地炉)를 새로운 칸쵸로 앞세워서, 군권을 장악하는 수단으로서 고후(護府)를 설치하고 자신이 고후켄(護府卿)임을 선언하면서 미나미 고후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는 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야마다 도이치로를 쿠게(公家)로 격상하여 영구적 세습 지위임을 공식화하였고, 검소령(儉素令)을 내려 사치를 금지할 것을 규정하는 등 개척민의 생활 방식에 세부적으로 정권이 개입하면서 이들을 통제하고 무분별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초석을 다졌고, 또한 고닌구미(五人組)를 통한 연대책임제를 실시하여 연공 미납과 범죄를 사전에 방지하는 통제책을 내놓았다.

카이카제의 아들인 미나미 야마시로(南山城)는 고후켄 세습 체제를 확립하였고, 유럽 국가들의 수입 제한을 완화하여 한문으로 번역된 영문 서적과 페르시아, 베트남과의 교류를 통한 신문물 수입에 집중하였다. 특히 그는 남만(南蠻) 무역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필요성이 있음을 느끼고는[7] 예수회 신자였던 프란치스코 시로를 중심으로 포교 활동이 지속화 되었다. 그러나, 미나미 다카에츠(南高悅)는 이러한 포교 활동으로 신도들의 단결력이 강화되어 고후 정권에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면서, 1723년에 금교령(禁敎令)을 발포하였다. 이에 수많은 신도들이 반발하자 크리스천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교개원(敎改院)을 설치하였다. 교개원을 통해 그들은 소규모의 신앙 활동이 부분적으로나마 묵인되었으나, 대부분의 개척민들은 이러한 종교적 규율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기에 교세는 점차 약화되었다.[8]

막부 체제의 도입과 왕도격상

4대 고후켄의 오른 미나미 이노시타(南衣囊下) 치세에서 시작된 외세 공포감은 "본토개척청을 공격할 것이다.",[9] "하쿠진(白人)들이 불사를 위하여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는 유언비어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공포감으로 개척민들의 불안감은 격앙되었고, 이노시타는 이러한 뜬소문에 대한 대중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공격 타겟을 현지인들로 잡았고, 이는 곧 현지인들이 이러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개척민들의 몰락을 초래한 것이라 선동하고서는 보복아닌 '보복' 행위가 자행되었다. 그는 민중의 시선이 현지인들에 대한 보복 행위로 초점이 옮겨졌음을 알아차리고서는[10], 에도 막부와 본토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막부 체제를 도입하고 이에 따라 야마다 가문의 7대 당주이자 세습 쿠게였던 야마다 타카스케(山田高輔)를 "타이난의 테이쿤(対南の帝君)"이 될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단순히 에도 막부를 사칭하는 것이 아닌, 불안정한 이중 정권이었던 고후 체제를 보다 안정적인 바쿠후 체제로의 이양을 말하는 것이었다.[11] 야마다 타카스케는 "어찌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할 수 있느냐" 하면서 반대하였고, 대부분 개척민들의 반응도 이와 동일했다. 결국 이노시타는 전세를 뒤엎기 위하여 1756년, 도카이의 변(東海の變)을 일으켜 개척청의 주요 측신들을 암살하고 타카스케를 강제로 왕도격상(王道格上)에 대한 선언문을 읽도록 하면서 테이쿤 지위에 오를 것을 약속하였고, 이에 이노시타 본인을 도카이 막부의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포한 뒤 신센 도(新川都)를 거점지로 하는 타이난 왕조신센 막부(新川 幕府)가 개창되었다. 이로서 타이난은 더이상 일본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 왕조이자 국가로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독립을 자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본토에서는 야마다 타카스케에게 "난요오(南洋王)"의 칭호를 하사 받음으로서 독립을 인정 하였다.[12]

각주

  1. 도카이 카이타쿠치는 이후 야마다 가문이 세습하던 칸쵸(館長)의 직할령으로서 도카이 도(東海都)로 발전하였다. 지금도 과거 도카이 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도카이켄(東海縣)은 타이난 서부 지방의 대도시로서 여겨지고 있다.
  2. 물론, 현재 야마다 가문의 초대 당주인 야마다 나가마사도 가마꾼 출신이었으며, 카이타쿠치 시대의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하세쿠라 신지 역시 에타 출신이었다.
  3. 이를 어떻게 보면 타이난 개척청의 존재를 "본토에서 넘어온 범죄자들의 촌락"으로 본 것으로 해석하는 사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당시 에도 막부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는 막번 체제를 확립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히닌들을 지금의 필리핀이나 신카쿠 카이타쿠치로 유배시킬 계획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4.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본토를 모방하듯 천수각(天守閣)을 쌓고 돌로 외곽을 둘러싸면서 오늘날의 일본과 같은 성채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 축성 기술의 발달과 군사 시설을 수반한 주거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5.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마타요시 마사노부(又吉昌信)가 현지인들과 일부 반 통합파를 선동하여 마사노부의 난(昌信の乱)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실행 과정에서 발각되어 실패한 사례가 있다.
  6. 특히 카이타쿠 군은 기존의 개척민들과 군락민들이 농한기에 유사시 징집하는 민병(民兵) 형태가 아닌, 영구적 상근이 가능한 상비군(常備軍)으로서 빠른 기동력과 조직 체계를 갖춘 군대였다.
  7. 개척민들을 하나로 통합할 구심점이 필요했으며, 특히 브루나이 술탄국술루 술탄국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이들 유럽 국가들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데 용이하기 위함인 부분도 있었고, 일본에서 시마바라의 난(島原・天草一揆) 등을 통해 넘어온 카쿠레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 금제하에 기독교 신앙을 몰래 지켜온 신도)들을 포용하기 위한 통합책이기도 하였다.
  8. 일부 신도들은 지금의 린큐시마(隣休島)로 넘어가 1788년에 독자적인 키리시탄 자치국을 수립하기도 했다. 물론, 1814년에 본격적인 식민 팽창 정책을 시도하려던 타이난 왕조에게 첫번째 토벌 대상으로 규정되어 1815년에 멸망하였다.
  9. 18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개척민들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여겼으며, 이 때문에 항상 일본을 '본토'로 지칭하였다.
  10. 사실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현지인이었지만 이로 인한 반일 감정이 격화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이노시타와 같은 독립파가 득세하는 상황이 극적으로 연출되었다.
  11. 생각외로 고후켄이 실권을 잡아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을 것이라 생각할수도 있으나, 실상은 바지사장을 자처하던 쿠게와 측신(側臣)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고, 개척민들도 고후 정권의 세습 제도에 대해서 정식 통치기관도 아닌 한낱 군사 기구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반응이 다수였다. 물론 실생활의 고후 정권의 영향력이 강했던 만큼 겉으로 이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다만, 그가 굳이 무릅쓰고 다른 관직이 아닌 바쿠후의 쇼군이 될 것을 공언하면서 동경의 눈길도 있지 않았나 학계에서 추측하고 있다.
  12. 사실 일본에서는 타이난 개척청이라는 존재를 독립 세력으로서 규정하였고, 이들 개척민들이 본토를 향한 동경과 열망과는 달리 별 관심 없을 뿐더러 오히려 "히닌과 에타들의 땅"으로 오해하는 일도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