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長崎
Nagasáqui
Nagasaki
국기
정부기 국장
Deus nos protege
하나님은 우리를 보우하신다
상징
국가 A Portuguesa
국화 수국
국목 오구나무
국조 비둘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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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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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나가사키(長崎)
최대도시 포르타(ポルタ)
면적 1,955km²
인접국 일본 일본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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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구 -개
-개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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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521,700명
인구밀도 778.3명
인종 구성 일본계 47.1%
유럽계 백인 46.7%
중국계 2.8%
동남아시아계 2.1%
기타 1.3%
출산율 0.98명
기대 수명 83.8세
공용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종교 국교 국교 없음
분포 가톨릭 82.3%
무종교 7.9%
불교 6.2%
개신교 2.4%
기타 1.2%
자국군 없음
주둔군 포르투갈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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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공화제, 의원내각제, 다당제, 단원제
민주주의 지수 완전한 민주주의
총리
(정부수반)
사코토 샤비에르
정부
요인
대통령
(국가원수)
타우에 토미히사
최고재판소장 준 호세 산체스
헌법재판소장 나카무라 하야시
여당 나가사키 보수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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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명목
GDP
전체 $62,995,336,600
1인당 $41,398
신용등급 무디스 Aa2
S&P BB+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나가사키 달러
ISO 4217 NQD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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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9(나가사키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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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여부 가입국
UN 가입일 1945년
ccTLD
.nq, .長崎
국가 코드
NGQ, NQ
국제 전화 코드
+390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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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ra justificável que aqueles protegidos pela bênção de Deus fossem mortos por bárbaros!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우받는 사람들이 야만인으로부터 살육을 당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포르투갈 왕국 필리프 1세

포르투갈령 나가사키 또는 나가사키(Nagasáqui[1], 長崎, ナガサキ[2])는 일본 열도 규슈 중서부에 위치한 포르투갈 공화국의 해외영토이자 자치령이다. 16세기 후반부터 포르투갈 본국과 교역하던 항구도시였으며, 이후 식민지로서 포르투갈에 편입되어 현재 자치령의 상태에 이른다. 수도는 나가사키이며, 최대 도시는 포르타[3]이다. 초기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선교의 목적으로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거점으로 삼각 무역을 하던 것을 시작으로 '나가사키 예수회'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문화가 전파되었다.[4]

아시아 지역의 거점으로서 분쟁, 무역, 문화적 다양성의 중심지로서 평가 받고 있으며, 인구의 과반수가 가톨릭 신자이기에 아시아 대표 천주교 국가로서 평가 받고 있다.[5] 때문에, 가톨릭 관련 문화유산이나 성당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어일본어를 사용하며, 정부기관이나 공무집행기관에서는 포르투갈어만 취급한다.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유럽계 백인[6]이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네덜란드와의 교역도 성행하였기 때문에,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지에서 이주한 중국인, 인도네시아인 등이 소수 인종을 구성한다.

나가사키의 민주화는 꽤 잘 이루어진 편이다. 포르투갈과 영국 등 열강의 영향으로 민주주의가 빨리 정착된 예시이기도 하다. 2019년 평가된 나가사키의 민주주의 지수는 8.03으로 완전한 민주주의에 속한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명목상 전체 GDP는 $62,995,336,600이며, 동아시아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경제 수준을 자랑한다. 1인당 GDP는 $41,398로 대한민국일본보다 높은 수치이다.

상징

국가


나가사키는 포르투갈의 국가를 사용한다. 독자적인 국가는 따로 정해두고 있지 않으며, 개사 또한 딱히 하지 않았다. 나가사키가 포르투갈의 자치령이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국가를 관습상 사용, 제창하고 있다.

국기

국기 정부기
색상 붉은색 (#bb002d)
군청색 (#000099)
검정색 (#000000)
초록색 (#006600)
빨간색 (#fe0000)

나가사키는 포르투갈 본국 국기를 국기로 사용한다.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국제적인 스포츠행사나 일정을 수행할 때에는 포르투갈과 구분하기 위해서 정부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정부기를 국기로서 알고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부기는 1997년 제정되었으며, 일본인과의 적대 및 마찰을 줄이기 위해 일장기의 색상을 인용하였다. 그 이전에는 에도막부의 깃발과 포르투갈 국기를 정부기로서 혼용하며 사용했다. 그러나, 에도막부와 나가사키의 상징이 혼동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1843년부터 포르투갈 국기만 사용하였다.

정부기 중앙에는 포르투갈 국장이 그려져 있으며, 붉은색 바탕으로 칠해져 있다. 정부기의 붉은색은 '욱일(旭日, Rising Sun)', 즉 떠오르는 태양빛과 전쟁으로 인해 흘린 '자국민의 피'를 잊지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군청색, 하얀색, 검정색 각각이 지닌 의미는 '국장' 부분을 참조.)

국장

국장

나가사키의 국장은 좌측 위에는 포르투갈을 상징하는 5개의 푸른색 방패가 그려져 있으며, 우측 위에는 '기리몬(桐紋)'[7]이 그려져 있다. 검은색은 해가 뜨기전 '고요한 준비'를 뜻하며, 배경의 군청색은 해가 뜬 후의 '맑은 아침'을 뜻한다. 하얀색은 '신의 축복과 광명'을 뜻한다.

역사

포르투갈 상인의 도래

나가사키 예수회

일본 전국시대(戦国時代) 당시에 규슈 지역과 혼슈 지역의 다이묘들은 포르투갈 상인과 처음으로 접촉하기 시작했으며, 포르투갈 상인들은 마카오에서 이들에게 조총과 화포를 수출하여 무역을 진행해왔다. 그렇게 포르투갈과 일본 사이의 무역이 자연스럽게 확대되면서, 포르투갈 선교사와 상인들은 성당 건축을 요구하며 거래를 제안했다. 당시 일본 열도는 불교가 힘 있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가톨릭이 전파되지는 않았으나, 하층민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퍼지면서 이후 무사 계급, 다이묘 계급도 적지 않게 천주교를 받아들여 개종하였다. 세례를 받은 다이묘 소속의 하층민들은 저절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이는 불교 세력과 가톨릭 세력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포르투갈은 가톨릭의 영지 나가사키에 '나가사키 예수회'를 설치하고 더욱 적극적이고 대대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바테렌 추방령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의 전파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이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열도를 통일하였는데, 규슈 평정을 마친 뒤 지쿠젠(筑前)의 하코자키(箱崎)에 체제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나가사키 예수회'의 설립을 뒤늦게 깨닫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진행하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행한 '바테렌[8] 추방령'은 '덴쇼 15년 6월 18일의 각서'에 그 의의가 명시되어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조 일본은 고래로부터 신국이기 때문에, 일본인 천주교 신자(키리시탄)들의 나라에서 온 신부들이 악마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이 땅에 오는 것은 몹시 나쁜 일이다.
  • 제2조 그들은 일본의 여러 영지에 와서 우리를 그들의 종파로 개종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신들과 부처들의 사원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사람들이 일찍이 전혀 보고 들은 적이 없는 일이다. 천하의 군이 영주에게 영지와 마을과 동네를 나누어 주고, 무사들이 봉록으로 당을 받는다 해도, 그런 일은 일시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도 천하의 법도를 완전하게 준수할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하층민들이 이런 것을 어기고 동일한 소요(사찰과 신사 파괴)를 일으킨 다면 처벌받는다.
  • 제3조 만약 천하의 군이 키리시탄들의 의지와 의향에 따라 신들이 가르친 ㅡ 종파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한다면, 앞서 적은 바와같이 그들은 일본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그런 일은 나쁜 일이므로, 나는 신부들이 일본 땅에 있지 말아야 한다고 정하는 바다. 이 결정에 의해 오늘부터 20일 이내에 일본에 자신들의 일을 정리하고 자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일 이 기간에 누구든 그들에게 해를 입힌다면 그 자는 그 일 때문에 처벌 받는다.
  • 제4조 나우 선(포르투갈 상선)은 거래를 행하기 위해 내항하는 것이므로, 그것과 전혀 별개의 일이다. 거래는 지장없이 행할 수 있다.
  • 제5조 앞으로는 상인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오는 사람들은 신과 부처의 가르침에 방해를 가하지 않는 한, 누구라도 자유로이 일본에 올 수 있다.
    - 키리시탄 바테렌 추방령 (吉利支丹伴天連追放令)

해당 추방령은 자발적인 개종을 강압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교적 온건한 탄압이었다. 제대로 시행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도요토미가 무역의 중요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인도 대사[9] 자격으로 회담을 진행한 포르투갈 선교사 때문에, 추방령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 된다. 그러나, 예전같은 본격적이고 적극적인 선교 활동은 여러 제약이나 사회적 분위기 등에 의해 성행되지 못했다. 일본 내 선교사들과 키리시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일종의 거래 관계를 유지하고 천주교를 유지시키는데에 힘을 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임진왜란에 어느정도 동조하여 무기를 수출하였으며, 키리시탄 다이묘들은 임진왜란에 파병되기도 했다.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의 무역 상황을 주시하며 일본과의 무역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도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일본 내 상황은 바뀐 것이 없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선교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일본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무기, 물건, 음식 등을 수입하며 공생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약화된 도요토미 가문은 간토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밀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맞붙었다. 1600년 10월, 동군의 승리로 전국시대가 끝이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선다. 대부분의 키리시탄 다이묘들은 서군의 편에 섰기 때문에, 일본 내 가톨릭 세력의 피해가 컸다. 가톨릭의 세력이 약해질 무렵, 개신교를 믿고 있었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일본과의 무역을 시도한다. 가톨릭과 악연이 있던 동군은 가톨릭은 이단(異端)으로 지칭하며 접근하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적대 없이 마주했으며, 불교 세력의 합세 덕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무역 전략은 나쁘지 않게 먹혀들어갔다.

금교령

그러던 중 히노에 번의 다이묘였던 아리마 하루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의 간책에 휘둘려 뇌물을 건내 영토를 늘리려 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세력을 완전히 축출해야겠다고 생각하여 1614년, '금교령'을 선포하여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진행한다. 흐지부지하게 끝난 바테렌 추방령과는 달리 훨씬 진심으로 시행된 '금교령'은 선교사, 키리시탄들을 모두 숙청할 목적으로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키리시탄은 마카오, 마닐라 등지로 이주하였으며, 수많은 순교자와 사망자가 발생한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외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외부인의 출입 자체를 부정하고 외부 세력을 근절하고자 하였다. 무역은 오직 포르투갈의 영향권인 나가사키와 히라도에서만 할 수 있었으며, 이외의 선교가와 키리시탄을 숨겨주거나 도움을 주기라도 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숙청시켰다.

잔인한 막부의 고문과 대대적인 가톨릭 숙청으로 불만이 터져버린 키리시탄 농민들은 세금 정책에 대한 불만까지 가세하여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킨다. 농민 2만명이 들고 일어나 대관소의 관리들과 대관소의 수장인 하야시 효자에몬을 살해하였고 아마쿠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시마바라와 합세했다. 당시 반란의 지도자는 키리시탄 16세 소년이었다고 한다. 이후 반군의 병력은 3만을 넘는 대규모 민란으로 번져, 국가적 비상사태에 돌입한다. 막부는 12만 병력으로 하라성을 포위하여 반군의 식량난으로 인한 승리를 거머쥐었고, 가톨릭을 더욱 심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카쿠레키리시탄

박해를 피해 숨어 도망친 키리시탄들을 '카쿠레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나가사키나 깊은 산에 숨어 공동체를 유지한다. 박해가 심화되던 중 포르투갈은 자국 선교사 숙청에 대해 매우 분노했으며, 해군을 보내 나가사키를 점령시켰다. 이후 나가사키, 히라도, 사가 일부에 통째로 주둔하여 카쿠레키리시탄의 안전을 보호해주었다.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삼각동맹을 맺고 경제적 보복을 실시하는데,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전면 폐쇄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규슈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고 영국은 포르투갈 군대에 대한 공격을 실시한다.

포르투갈 독점무역

나카도리 전투

잉글랜드 왕국은 이베리아 연합 이후 사이가 틀어진 에스파냐와 협업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기에 이른다. 포르투갈은 해양 거점지를 차지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독립 이후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시작하여 확장주의적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스페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신생강국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와의 협력을 거부한다. 영국과 스페인은 종교적 갈등을 빚고 있었으나,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포르투갈 해군의 규슈 주둔을 강력히 규탄한다.

그러던 중, 나가사키 시마바라(島原)에서 포르투갈 해군과 잉글랜드 선교사가 시비가 붙어 포르투갈 해군이 선교사를 총살한 사건이 일어난다. 포르투갈은 해당 군인에게 징계를 수령하고 분쟁을 유하게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기회를 포착한 잉글랜드는 뭄바이의 영국 해군을 출병시켜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영지를 폭격하는데, 이를 '나가사키 잉글랜드 공습 사건' 또는 '1636 사건'이라고 부른다. 포르투갈은 전시상태에 돌입하여 규슈 시모시마(下島) 서쪽 해안에서 잉글랜드 해군의 전함 2척을 명중시킨다. 에스파냐 또한 필리핀에서 나가사키로 출병하였지만, 손실을 우려하여 잉글랜드를 지원하기에 그친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과 나카도리(中通)에서 전면전을 벌이는데, 남부 후쿠에섬(福江島)에 매복해 있던 포르투갈 군대에 패배하여 추가적으로 군대를 파병한다. 나카도리섬과 후쿠에섬은 다시 잉글랜드가 차지하였으며, 히사카섬에서 항전하던 포르투갈 병력을 일본과의 협력으로 전부 소탕한다.[10] 영국군은 포르투갈 예수회를 점령하고 본거지 코앞까지 진격하였는데, 나가사키만과 도좌산 일대에서 약 3개월간 접전을 벌인다. 영국은 이미 인도와의 무역을 하고 있었고[11], 더이상의 손실을 원치 않았던 잉글랜드는 포르투갈과의 협정을 진행하는데, '나가카시 협정(1636)'이다. 이 협정으로 포르투갈은 나카도리와 시모시마를 일본에 양도하였으며, 영국은 포르투갈의 일본 주둔을 인정하고 포르투갈의 독점 무역권을 수용하였다.[12]

일본은 서구 열강의 확장주의적 쟁탈전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포르투갈로부터 영지를 되찾게 도와준 영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의 보수적인 정책으로 개신교의 수용을 거부하고 영국, 네덜란드 이외의 서양 세력과의 무역을 전면 철폐한다. 후쿠오카번의 번주 구로다 다다유키(黑田忠之)가 포르투갈과의 암거래를 진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막부가 다다유키를 화형시킨 일화도 있다. 일본의 일시적인 개항은 다시금 폐항(閉港)을 불러왔으며, 나카도리 전투[13]는 당시 일본 사회의 보수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사키의 노동력이 감소하지 않았던 이유는, 키리시탄의 정착과 높은 생활수준이 한 몫 하였다.

그 즈음에, 네덜란드는 동인도제도와의 향신료 무역으로 포르투갈과 '아시아 무역계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었고, 나카도리 전투로 인해 피해를 본 잉글랜드는 두 양대산맥의 뒤로 해양 무역 국가로서의 지위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티모르(Timor)와 마카오(Macau), 그리고 나가사키 점령지의 삼각 무역, 이른바 '트리앙굴로(Triângulo)[14]'의 추진으로 필리핀해 무역시장을 장악하였다.

제2차 규슈전쟁

나가사키 자치령

아리아케 전투

일본의 개항

미국과의 충돌

포르투갈-일본 전쟁

각주

  1. 포르투갈어 스펠링
  2. 가타카나 표기법
  3. 포르투갈어로 'Porta', 가타카나로 'ポルタ'라고 쓰인다.
  4. 이때 일본 열도에 최초로 가톨릭이 전파되었으며, 일본인 가톨릭 신자를 '키리시탄(切支丹, キリシタン)'이라 불렀다.
  5. 동아시아에서 기독교 신자 비율이 매우 적기로 유명한 일본국과 대비되어 재미있는 소재이다.
  6. 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주한 이민들이다.
  7. 오동나무 문양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문양으로서 인용하였다.
  8. '바테렌(伴天連)'은 일본어로 '신부(Padre)'를 음차한 단어이다.
  9. 포르투갈은 마카오 뿐만 아니라 인도 고아(Goa) 등 주요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아시아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0. 히사카섬 전투(1636年)
  11. 당시 '고아'는 포르투갈의 점령지였다.
  12. 잉글랜드는 당장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서의 병력을 전면 철수했으며, 이후 협정을 깨고 재주둔한다.
  13. 현대 일본에서는 서구 열강의 침략 전쟁이라고 묘사한다.
  14. 삼각 무역. 포르투갈어로 '삼각형'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