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내용은 태화국 공식 설정입니다.
이 문서는 리반이 작성한 가공 국가인 태화국과 관련된 공식 설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편집을 시도하시면 반달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꼭 수정여부를 설정자에게 물어봐주십시오. 다만 오류 및 오타 교정은 반달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하나이 가이치(일본어: 花井嘉伊智)는 일본인 출신의 위태화국 시기 활약한 인물로서 몇 안되는 외국인 태화국 독립유공자 중 한 명이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했던 의사이자 사회 운동가로서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 제국주의에 광기의 이면을 파고 들어 일본의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 잡을 것을 요구한, 진정한 애국자이다.

초기 이력

초기 이력은 크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19세에 나이로 일본군 소속 군의관으로서 활동하였다가 26세에 직책에서 물러나고 평범한 의사로서 지냈다. 그러던 중, 관광이자 휴양의 목적으로 방문한 태화국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수많은 태화인들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직책에 회의감을 느끼고서 결국, 고국을 떠나 이곳에 소규모의 임시 보건소를 설치하고는 진료를 하기 시작했다.

의사와 사회 운동가로서의 활동

독립 정신과 동양 평화의 증진을 위해 이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천하가 나의 뜻에 따라주길 바랄 뿐이다.
(独立精神と東洋平和の増進のために、この一身を犠牲にすることはそれほど難しいことではない。
ただ、天下が私の意味に応じてくれることを願うだけだ。)
-하나이 가이치-

그는 임시 보건소 활동으로 의료 봉사 활동에 어려움을 느끼고는, 당시 태화관방공사의 직원으로서 일하던 친구의 도움을 통해서 자금을 얻고는 1913년, 동방의국(東方醫局)을 세워 본격적인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특히 태화인들이 자주 겪던 성병에 대한 완치를 목표로 전념하였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70%에 달하던 성병이 39%로 줄어드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눈여겨 보던 태화 총독부는 그에게 총독 관방 직할의 의무국 관장직을 제의하였으나, 정중히 거절하였다.

동방의국을 운영하면서, 그는 태화인들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독립의정단에 가입하였고, 태화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 등의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참고로, 병자 치료에 대해 독립의정단원들에게 통고하면서 전국내 수많은 병자들에 대한 증세 자료를 파악할 것을 지시하는 등의 간접적인 독립 활동을 이끌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을 못본 채 하기 어려웠던 태화 총독부 였으나, 그의 활동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여론 의식을 인식하면서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는 또한 얼마없는 전재산을 털어 3년제 사립학교를 세워 태화인들의 계몽 교육에도 힘썼고, 기독교 태화인들을 위한 교회 예배당을 건립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하던 이들에게 몇 안되는 보금자리를 선뜻 내놓기도 하였다.

사망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랑민, 걸식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눈으로 지켜보고 수많은 병사자들의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던 나머지, 자신도 병에 걸리지 않으면 병자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느낄 수 없다 여기면서 병자,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병자들의 고름을 자신의 상처에 바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진짜로 나병(한센병)에 걸리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친구에게 빌린 빚으로 인한 생활고와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의무로 결국 과로사 및 한센병으로 1927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장례는 독립의정단문영신 등의 일부 단원들이 시신을 회수하여 급히 회영산에 무덤 터를 만들어 임시 장례를 치루었으며, 1945년 일제로부터의 독립 이후로 태화국 독립 유공자에 대한 예우법이 제정되면서 그가 평생을 태화인들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위해 힘써 온 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게 되어 건국 훈장을 수여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