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제25대 북해성지사 히나야마 린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초년기
신지원주민[1] 출신으로 증조부 히나야마 류이치는 일본 아키타현에서 북해로 건너온 농민이었으며 현재의 건강부에 정착했다. 전후 북해 일본인 추방에도 불구하고 전후 한국의 혼란상으로 인해 히나야마 가는 북해에 남을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조봉암 내각에서 소수민족법이 제정되고 신지민들에게 국적을 부여하고 여러 차별 정책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일본계는 가난과 차별에 시달렸다. 1950년대 후반 한국 정부는 건강에 살던 신지민들을 남부 지역(現 건강부 홍앵시 일대)에 몰아넣어 일종의 게토를 만들었는데 이 지역은 90년대 후반 남부 재개발이 이루어질 때까지 치안을 비롯해 사회분위기가 몹시 좋지 않았다. 히나야마 가는 바로 이곳에 거주했다.
1980년 태어난 히나야마 린은 부친 히나야마 료헤이(雛山遼平, 1950~)와 모친 노이나 칸나(野稻神奈, 1951~1992)의 2녀였다. 초명은 린코(凜子). 그녀 위로는 맏언니 이치코(一子, 1971~)와 두 오빠 히로시(廣司, 1974~1989), 타카시(敬, 1976~)가 있었다. 아버지는 트럭 배달부였고 어머니는 우체국 직원이었다. 집은 가난함에도 화목한 편이었으나 큰오빠 히로시가 이륜차를 타다 사고로 1989년 15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불운이 시작됐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충격에 정신질환을 앓다 1992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간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져 더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작은오빠 타카시는 일찌감치 가출했고 아버지를 간호하던 맏언니 이치코도 린이 중학생이었던 1995년 남편과 함께 집을 나갔다. 그녀는 성적이 좋은 모범생이었으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일용직으로 근무하던 곳의 한 직원과 잠시 사귀었다 임신한 것이 학교에 들켜 퇴학당했다.[2]
1998년 히나야마 가의 집이 남부 재개발로 철거대상이 되면서 이주 보상금을 받고 건강서부공단 인근으로 이사했다. 이후 흥성실업에 취직한 뒤 면직물 생산노동자로 일하는 동시에 공부에 매진해 1999년 고교학력인정시험에 응시해 합격했고 그해 수능에 응시해 북해대학 법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숭인만민대학은 저소득층 신지민 학생에게 졸업할때까지 등록금을 면제해주고 월마다 장학금 명목으로 수백원 가량의 생활비까지 지원해주었기에 그곳으로 진학했다.[3] 대학에 입학하며 이름을 린(凜)으로 개명했다. 그녀의 사연이 방송을 탄 직후 언니 이치코, 오빠 타카시와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났다.
2002년 대학 재학중이었던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2004년 숭인만민대 법학과와 사회학과 두 곳에서 모두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북해성 남부 해안 소하시 공업지대에서 노무사 사무소를 개업해 각종 노동쟁의와 노동자 권리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 친우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변호사 남예서[4]를 만나 함께 2006년 ‘법무법인 두 친구’를 세워 운영했다.
정계 활동
2008년 연말, 8회 지선을 앞두고 대한공산당의 다양성 정치인 영입 정책의 일환으로 영입제의를 받아 동료 남예서와 함께 공산당에 입당했다.
8회 지선에서 남예서는 소하시장, 히나야마는 명동 지역구 소하시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남예서는 당선, 히나야마는 사회민주당 후보 김성규에 간발의 차로 밀려 낙선했다. 이후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시정을 보좌했다.
제25대 북해성지사
2025년 2월 7일, 차기 북해성지사 투표에 입후보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지율이 39% 정도에 불과해 주민 사이에 성정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공산당 측에서는 후임자를 누구로 할지 고심중이라고 한다. 당 중앙위원회는 북해성지사를 지낸 이리나 체예바 중추원의원에게 출마를 제의했으나 본인이 고사하였다.
25년 지선 이후 거취를 고심중이라고 한다. 성의회의원으로 출마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지만 본인이 일단 쉬고 싶다고 밝혀 무산되었다. 광범위한 지역의 행정부 수장으로서는 평가가 좋지 않지만 지역구 의원으로서 시민 의견을 취합해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이미 검증되었고 주민들도 동의하는 바이기에 친구 남예서 국민원의원처럼 국회로 진출할 수도 있다. 다만 다음 민선은 2년이나 남았고 가까운 것은 내년 중선인데 중선은 성 전체의 여론이 강하게 반영되는 선거이기에 히나야마 지사에게 경쟁력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5월 1일, 결국 북해사회당 중앙위에서 지사 투표 무공천을 결정하고 최성호 전 정포시장을 지지하기로 했다. 이리나 체예바 지사 이후 두 명 연속으로 북해사회당 소속 지사의 평가가 안좋게 되면서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
6월 15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42%로 소폭 상승했다.
6월 18일, 북해성청에서 직접 고별 성명을 발표했다. 약자와 강자가 서로 보완하며 협력하고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꿈은 변함이 없으며 자신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행한 노력이 여전히 부족했다고 밝혔다. 다만 그 꿈을 위한 작은 실천적 발걸음을 내딛을 때도 시민과 함께하겠다고 밝히며 부족한 자신이지만 보내준 성원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최성호 당선인에게 축하하는 성명을 재차 밝혔다. 거취에 대한 질문에는 당분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며 당분간 정치를 시작하게된 이유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고별 성명은 주민들 사이에서 꽤나 호평이다. 일단 성정 4년의 여러 실책을 반성하는 취지의 내용과 그녀의 정치적 신념을 다시금 밝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들도 히나야마 지사가 자기반성의 태도와 스스로의 신념 자체가 뚜렷함을 시민들에게 재확인 시켜주어 깔끔하게 퇴임을 마무리지었다고 평했다. 이는 시종일관 의회와 중앙당 탓을 하며 임기를 마친 윤상현 전 지사와 대비된다고도 했다.
일각에서는 히나야마 지사가 퇴임후 남예서 의원실에 영입되어 국회 업무를 수행할 수도 있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마침 의원사무실도 둘의 정치적 고향인 소하에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