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제국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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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쇼와
일본 제국
제124대 제125대
쇼와 아키히토
대일본제국 제124대 천황
大日本帝國 第124代 天皇
본명
히로히토 (裕仁)
국적
대일본제국
성별
남성
가족관계
메이지 덴노 (조부)
다이쇼 덴노 (부친)
데이메이 황후 (모친)
고준 황후 (아내)
헤이세이 덴노 (장남)
마사히토 (차남)
생몰년도
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 (향년 87세)
출생
교토 황거
직위
대일본제국 천황
소속
대일본제국 황실
연호
쇼와昭和
어칭호
미치노미야迪宮
능묘
무사시노릉武藏野陵
상태
사망

개요

쇼와 덴노(昭和天皇)일본의 제124대 천황이다.

일본국 수상 도쿠가와 요시히사의 사망 이후 에도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획득하였고, 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열도를 재통일하였다.

또한 쇼와 유신이라 부르는 개혁을 감행해 일본의 여러 전근대적•구시대적인 폐습을 뜯어고치고, 경제를 개발하여 빈곤국가에 피원조국이었던 일본을 원조국으로 바꾸었고, 1988 교토 올림픽 개최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현대 일본에서 쇼와 덴노의 위상은 그야말로 현인신 그 자체이며, 그의 후손인 현 일본 천황가 또한 이러한 권위를 물려받아 일본 내에서 신성시되고 있다.

생애

유년기

어렸을 때 어칭호는 미치노미야(迪宮)였으며, 도장에 새겨진 인장명은 와카타케(若竹)였다. 신화 속 상상의 인물들을 제외한 역대 천황들 중에서 재위 기간(치세 64년)이 가장 길며, 2번째로 장수한 천황이다. 아버지 다이쇼 덴노는 47세로 단명했으며,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 역시 60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하고 중년에 사망한 것과 대비된다. 역대 천황 중 유일하게 공식 석상에서도 안경을 써서 일본 황실의 오랜 전통이자 관습을 처음으로 깨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일본국 교토의 어소에서 메이지 덴노의 장손이자 훗날 다이쇼 덴노가 되는 요시히토 황태자와 사다코 황태자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랫동안 측실 소생으로만 계승되어 오던 일본 황실의 관습을 깨고, 황태자비 소생의 적장자(嫡長子)로서 대를 이었으며, 어머니 사다코 황태자비가 본인 뒤로 남동생 셋이나 낳았기 때문에 황실에선 더이상 측실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태어났을 때 키는 51cm였고, 몸무게는 약 3kg 정도였다. 히로히토는 생후 70일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친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추밀원의 고문이었던 카와무라 스미요시의 누마즈(沼津) 저택에서 홀로 자랐다.

1912년 7월 30일에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고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嘉仁皇太子)가 뒤를 이어 일본 제123대 다이쇼 덴노로 즉위하자,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은 황태손(皇太孫)에서 황태자(皇太子)로 지위가 올라가게 되었다. 1914년에는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군에 관에 학습하였다. 1918년에는 방계 황족인 쿠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1919년 만 18세가 되자, 히로히토는 정식으로 성년식을 한 후 바로 황태자에 정식 책봉되었다.

3.1 운동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3.1 운동은 쇼와 천황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장 다카히토 친왕의 회고록에서 언급한 것만 보아도, 이전과 이후의 쇼와 덴노는 완전히 달라졌다 하였다.

교토 어소에 머물던 히로히토 황태자의 어소에까지 만세(万歳) 소리가 들려왔다.[1] 황태자였던 히로히토 또한 이러한 소식을 들었던 것으로 보았고, 이후에 역사서와 고문서 등을 탐독하면서 당시까지 무지하였던 일본 정국에 대하여 제대로 파악하게 되었다.[2]

히로히토는 일본의 실상에 분개하였고, 자신의 실력을 배양하여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학습에 열중하였다. 정치•군사•외교 등의 부문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여러 고문들을 어소로 초청하여 자신의 공부를 돕도록 하였다.[3]

즉위

1926년 12월 25일에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오랜 숙환으로 끝내 사망하자 그는 일본 제124대 천황이 되었고 연호를 쇼와(昭和)로 바꿨다. 1928년 11월 10일 교토 어소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다른 천황들이 그러한 것처럼 장식품의 역을 할 줄 알았으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한창 관동대지진의 복구와 한국의 경제적 종속문제이 대응하는 도쿠가와 정부의 눈을 피해서 히로히토는 유신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지식을 습득하고, 동생 야스히토 친왕을 통해 유신회 인물들과 혁신장교들과의 연을 이어나가면서 언젠가 올 기회를 대비하였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도쿠가와 정부는 그 권위가 크기 실추되었고, 본격적으로 반정부세력이 위험한 수위권에 올라왔고,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쇼와유신

대한제국에서 강명황제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국이 요동치게 되자 일본에서도 반 대한제국 시위인 1936 규슈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시위의 진압을 돕도록 명령한 에도 정부의 수상 도쿠가와 요시히사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4] 권력의 공백이 생겼는데, 이 틈을 타 봉기한 유신회를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유신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우선, 쇼와는 그동안 느슨한 구조로 유지되든 유신회에 쇼와 유신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조직의 구조를 본격적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교토를 장악했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남아있던 도쿠가와 잔당들을 척결하기 위해 잘 조직된 유신회 사병을 정부군으로 재편하였고, 전국에 천황의 포고령을 공포하여 도쿠가와 일족을 조적으로 지명, 잇키를 유도하였다.

이러한 수싸움이 잘 통하여, 순식간에 도호쿠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영토는 신정부의 편에 가담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쇼와는 유신을 향한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쇼와는 신정부의 승인을 서구 열강들에 요청하고 승인받아[5] 혹시라도 있을 개입을 차단하였고, 조차지와 관련된 조약을 재개정하고 차관을 들여오면서 일본 개혁에 불을 지폈다.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의 쇼와 유신을 보통 쇼와 개혁이라고 부르고 전 후의 유신을 쇼와 혁신이라고 부르는데, 이 쇼와 개혁에서는 행정체계 재편, 군제 개혁과 지역차별 철폐, 도량형 통일 등의 거대사업을 추진하였고, 도쿠가와 씨족과 번벌들의 완전한 폐지 또한 이뤄냈다.

그러나 쇼와 개혁 후기로 갈 수록 미쳐날뛰는 곡물가와 지주와 번벌들의 반발로 민중들의 신정부 지지도가 떨어져만 갔고, 천황에 대한 유신회 내 반대파들 또한 이러한 기회를 노리면서 "총리대신에게 정부를 맡기고 천황폐하는 업무가 과중하시어 숙환이 생기실 수 있으니 국내의 민심과 외교의 업무를 맡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반발을 뒤엎을 전쟁이 찾아왔다.

태평양 전쟁

전쟁의 불씨

사실 쇼와는 1936년 정권을 잡았을 때부터 대한제국과의 전쟁은 필연적일 것이라 생각하여 없는 예산을 쥐어짜 최대한 군대에 투자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1941년 6월 25일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였고,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을 미국의 대중 랜드리스 기지 및 후방의 잠재적 적국으로 인식하였기에 이를 정리할 계획을 준비해놓았다.

7월 29일 규슈 내에서 유신회 공작원들이 한국 군인을 암살하였다는 조작된 사건으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에 종속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날렸고, 당연히 이를 거절한 신정부는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전쟁을 대비하였다.

8월 15일, 한국에서 신고산을 올라라 1208이라는 지령이 내려진 후 한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대한제국 군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일본 공군을 무찌르고 폭격을 가하면서 상륙작전을 준비하였고, 나가토에 한국군이 상륙하면서 4년간 이어지게 될 혼슈공방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서부 지연전

서부 주고쿠를 장악한 한국군은 곧바로 2차 상륙에 들어갈 히로시마와 구레를 지원하기 위해 나갔다. 이때 쇼와는 서부군 총사령관 야마시타 토모유키에게 지령을 내려 영토의 보전은 신경쓰지 말고, 최대한 적군의 지연을 노리라고 하였다.

이에 야마시타 휘하에서 일하던 무타구치 렌야가 주고쿠 내 한국군 점령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겠다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서부군은 게릴라조와 지연조로 나뉘어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민중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당장에 엎어져 우는 이들도 일쑤였고, 다 체념하여 포기하였던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쇼와는 교토에서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옥음방송과 포고령을 내리면서 전국민적인 저항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전역에서 의용군이 창설되었고, 번주들과 지주들까지 신정부이 후원과 충성을 하면서 무너질 뻔한 성은 하나로 단결되었다.

교토 전투

한편 신정부는 전쟁발발 1년 전부터 수도 교토와 항구도시 오사카의 느슨한 요새화를 추진하였으나 이것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가속화 되었고, 8월달에는 목표의 80% 가량 완성되어 있었다. 이를 다 완성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하였기에, 참호와 도랑을 파고 혹시라도 한국군이 수도를 점령할 때 최후까지 저항하기 위해 에도로 황태자를 보내 분조를 마련해두었다.

쇼와 덴노 또한 직접 요새선을 짓는 곳에 시찰을 나가고, 삽질을 하면서 민중들을 독려하였다. 살아있는 신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자부심과 적들에게서 가족과 고향을 지킨다는 의지가 더해지면서 요새선은 급속도로 완성되갔고, 야마시타 장군의 지연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국군은 지옥의 참호전을 교토 앞에서 치루게 되었다.

일본방면군의 총사령관인 박용만 장군은 처음에는 섣부른 공격을 하지 않고 최대한 공군과 전차의 합공으로 이들을 무찌르려 하였다. 그러나 중국전선과 태평양전선을 매꿔야 했기에 더 많은 지원은 받을 수 없었고, 결국 그가 들고 있던 일본방면군만으로 교토 공세에 나섰다.

장장 8개월간 이어진 교토 공방전에서 쇼와 덴노 또한 직접 싸웠다. 대대 하나하나의 전황을 파악하고 부족한 부분을 대본영에 직접 명하여 매꾸도록 지시하였고, 사기가 떨어진 곳에는 친히 왕림하면서 군을 격려하였다. 부상병들의 빠른 쾌유를 위해 위문도 가고, 미국의 지원을 더욱 많이 받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인지, 교토에는 일본 황실기가 끝없이 휘날리고 있었고, 태극은 빠른 교토 함락을 포기하고 다른 상륙작전을 준비하였다.

전국적인 의용군

한편, 교토에서 공방전이 이뤄지고 있을 때 한국군의 보급선 단절과 민간인 피신을 위해 무타구치의 서부군 인민지원대대는 산 속을 넘나들며 항전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전쟁 소식을 듣지 못한 시골이나 미처 피난하지 못한 이들을 합류시켜 여자와 노약자들은 후방으로, 남자는 군인과 둔전을 위한 인력으로 확충하였다.

교토공방전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군 점령지에서는 들불과 같이 민병대가 일어나면서 한국군의 전쟁수행은 점점점 힘들어지게 되었다.

무타구치 외에도 야스히토 친왕이 수장으로 있는 규슈해방군북부민족항한연군[6]등이 게릴라를 통해 한국군을 괴롭혔고, 일본 정규군이 연이어서 승리를 거두면서 한국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규슈 역공세와 승전

1943년까지 이어진 지지부진한 참호전과 공격은 미군이 일본에 들어오게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게 된다. 그동안 변화가 없던 전선은 도호쿠 대부분을 일본이 수복하게 되었고, 교토 앞이 전선이었던 상황에서 벗어나 마이즈루까지 수복하게 되었다.

1945년 8월엔 한국의 패전이 확실시되면서 이를 더욱 공고화시키기 위해 일본과 미국은 합동으로 규슈와 홋카이도에 상륙작전을 실시하였고, 규슈 고쿠라에 일본군이 입성하면서 전쟁은 끝이 나기 직전까지 왔다.

쇼와 또한 일본군이 한성에 직접 가는 모습을 보고싶었으나, 안타깝게도 45년 8월 6일과 9일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15일에 한국이 항복하면서 그 꿈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의 장장 4년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명예를 얻어내었고,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였다.

승전

8월 15일 한국이 항복하면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일본 내 한국군을 쫒아내고 규슈, 홋카이도를 확보해 나아갔다. 그리고 8월 말이 되면 일본 4개 섬은 전부 신정부의 손에 들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5년 9월 2일, 미 항모에서 한국 외무대신의 서명이 있었고, 일본제국 인사 또한 참석하여 항복문서 조인식을 지켜보았다. 45년 9월 9일에는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간의 회담이 치뤄져 전후 일본의 지위와 전리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1952년 채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다음과 같은 영토를 획득하였다.

  • 한국령 나가사키-사세보 조차지
  • 규슈
  • 홋카이도
  • 류큐 (자치령)
  • 이오지마 (전 이름 황도)

홋카이도는 에도 말 혼란기부터 일본인 대다수가 이주하면서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규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류큐와 이오지마는 꽤나 억지스러운 주장이었지만, 미국은 친미국가를 확고히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였고 딱히 이 땅에 무엇을 세울 수도 없어 일본으로 편입시켜주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여러 전쟁영웅들은 환호를 받고 귀향하였으며, 한국 내 일본인들은 본토로 돌아왔다. 또한 쇼와 덴노는 이 전쟁에서의 승전과 전쟁 중에 보인 영웅적인 모습으로 전 일본에 귀감이 되어 진짜로 현인신의 위치까지 올랐다.

개발독재

자세한 것은 대일본제국/역사 부분 참조.

쇼와의 개발독재는 필수적으로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폐허가 된 땅에서 다시 일본의 백년을 쌓을 수 있는데, 여기서 주어진 전제권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디서 사용해야 할 것이겠는가?

한일전쟁을 통하면서 쇼와의 권위는 그야말로 하늘에 닿았다. 승전과 영토수복, 그리고 대한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주독립국이라는 명패와 공식적으로 승인된 대일본제국(Empire of Japan)라는 국명이 그를 올려준 요인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도움과 쇼와의 정력적인 활동, 불철주야 현인신과 함께 노력하여 조국의 재건과 근대화를 이뤄내겠다는 일본 인민들의 노력으로 그들은 30년만에 빈곤률을 확 줄여내었고, 1945년 승전 이후 43년만인 1988년 교토 올림픽 개회를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개회사는 쇼와가 직접 하였다. 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서 88올림픽의 공식 표어, 세계는 교토로, 교토는 세계로를 외쳤고, 일본 선수들의 활동을 참관하면서 자신의 노력의 성과를 직접 보았다.

민주화

한편 개발독재를 이어나가면서 쇼와를 도왔던 유신회는 점점 2세와 3세로 계승되어가면서 고인 물은 썩는다는 법칙에 따라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쇼와를 도운 그 유능함은 어디가지 않았었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쇼와가 노쇠해지자 황태자 아키히토를 조종하여 후대에도 '유신회 안막정치'를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전쟁과 쇼와 개혁기, 그리고 개발독재 기간에 정적을 숙청하면서 암투의 대가가 된 쇼와에게 이는 당연히 걸리게 되었고, 늙은 쇼와는 황태자의 역량이 자신의 뒤를 이어가기에는 부족하고, 유신회에게 집중된 정부권력이 기형적이라는 것을 인지하여 여러 부패•비리 사건을 터뜨려 공론화하였고, 마침 불어오던 민주화의 열풍을 이용해 유신회의 해체를 명하였다.

그리하여 1987년, 쇼와 데모크라시 이루어지며 전국적으로 최대규모의 정당선거가 치뤄지게 되었다. 그리고 쇼와는 이후 올림픽을 관전하면서 모든 힘을 자신이 만든 일본을 보는데 쏟아부었다.

1988년 한 해는 쇼와 덴노가 그 어느때보다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고, 전국 곳곳을 누빈 한 해였다. 회광반조의 모습처럼 늙은 군주는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붕어

1989년 1월 7일, 전 일본에 비보가 들려왔다. 일본 궁내성의 공식적으로 천황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발표하였기 때문이었다.

89년 1월 7일부터 장장 한달동안 이어진 추모행렬은 당시 쇼와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를 말해준다. 전국적으로 업무가 마비될 정도에 이르렀고, 천황을 내세에서 모시겠다며 자살을 하는 이들까지 나왔다. 꼭 이렇게 극단적인 부류가 아니더라도, 쇼와와 직접 분투를 함께한 노년층이나, 어릴적 겪은 빈곤국가에서 선진국의 문턱에 올려놓은 쇼와 덴노의 죽음을 진심으로 중•청년층들은 슬퍼하였다.

일본 정부에서는 쇼와의 날과 더불어 기일을 공식적으로 국경일로 지정하였고, 조의를 표하였다. 일본 의원들 또한 옷에 흰 국화를 달고나오면서 한 시대를 만들어낸 영웅에게 조의를 표하였다.

전국적인 추모열풍과 더불어, 쇼와의 황태자였던 아키히토가 연호를 헤이세이(平成)로 하여 일본의 제125대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장장 64년 동안 이어진 쇼와시대는 그렇기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현인신. 신격화된 것을 제하고, 순수한 업적만 나열해본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국부 수준을 뛰어넘었다. 정치 개혁, 전쟁 승전, 고토 수복, 경제발전, 올림픽 개최, 민주화 성취. 이 모든 것을 이룩한 지도자는 아마 쇼와 한 사람 뿐일 것이다.[7]

쇼와 개혁 시절에는 문자 개혁과 도랑형 통일을 최우선으로 시행하였다. 당시에는 일본이 지금과 같이 하나로 단결된 국가가 아닌, 번주들이 각 지방에서 날뛰고 있던 시절인지라, 일본 국민들에게 저 도호쿠 지방 사람부터 주고쿠 지방 사람까지 같은 일본 사람, 한 군주의 백성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에는 불편할지라도, 통일성을 강조하였고, 전쟁을 겪으면서 이 이질감은 피를 같이 흘린 탓에 동질감으로 변하게 되었다.

쇼와 혁신 시절에는 다소의 피가 흐르더라도 경제의 발전을 중요시하였다. 지금 당장의 편리함을 위하지 않고, 일본을 중공업과 수출 주력의 국가로 만들었고, 특유의 장인정신을 통해 품질도 좋고 물건도 튼튼해 Made in Japan이 널리 팔릴 수 있게 하였다.

영토 확장 또한 빠질 수 없다. 쇼와의 가장 큰 업적은 다름이 아닌 제국주의에서의 완전한 해방인데, 대한제국과의 항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한 승전지도자이고, 그 와중에도 핏값을 제대로 치뤄 장장 수십여년간 빼앗겼던 규슈, 나가사키-사세보 지역을 되찾아왔다. 또한 일본인들의 개척지인 홋카이도도 공식적인 영토로 승인받았다. 사쓰마의 전통적인 번국이었던 류큐가 대한제국에게 붙고, 결국 2차대전에 패망하여 소씨 왕가가 폐위되자, 일본 정부는 소씨왕가를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대신에 류큐를 일본의 자치령 형태로 편입할 것을 제의하였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종합하였을 때, 쇼와가 없었으면 현대 일본은 없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일본에 남긴 영향력은 지대하다. 다른 국가의 왕실과 군주는 현대로 들어오면서 점차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와중에, 쇼와와 일본 천황가의 후손들은 젊은 층에서도 그 지지가 상당하다는 것이 그의 업적을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부정적 평가

물론, 완전무결한 군주가 아니기에 쇼와 또한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개발 시기에 자행되었던 여러 노동 인권의 부재와 유신회 간부들의 부패를 눈감아준 점이다.

또한 21세기까지 왔어도, 천황가와 황족에 대해 약간의 불만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으로 취급하는 사회분위기도 부정적으로 평해지고, 가장 중요하게도 개발독재기의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수직적인 사회구조를 구축한 것이 21세기에 맞지 않게 되면서 가장 큰 비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비판들 또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어, 사실상 쇼와는 일본 내,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마지막 전제군주이자 명군으로 평해지고 있다.

가족관계

  • 부친: 다이쇼 덴노
  • 모친: 데이메이 황후
  • 배우자: 고준 황후
    • 장녀: 히가시쿠니노미야 시게코
    •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
    • 삼녀: 다카쓰카사 가즈코
    • 사녀: 이케다 아츠코
    • 장남: 아키히토
    • 차남: 마사히토
    • 오녀: 시마즈 타카코

대중매체에서

만화 및 애니메이션

일본의 만화에서는 보통 영웅적인 모습과 애국청년의 면모를 자주 보여준다.

  • 귀멸의 칼날에서 순방하는 모습으로 잠깐 나온다. 황태자로 책봉된 후고, 3.1운동에 큰 감명을 받아 지식을 최대한 채우려고 한다.
  • 도라에몽에서 노비타의 선생님 집에 쇼와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는 모습으로 나오고, 이는 니세코이의 이치죠 라쿠의 아버지도 걸어놓은 것과 같다.
  • 아따맘마에서도 쇼와의 붕어라는 에피소드가 한편 있었다.
  • 크레용 신짱 11기에서는 쇼와를 닮은 노인이[8] 신짱을 격려하고 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9]

한국산 매체의 취급은 대전쟁을 말아먹게 한 일등공신이기에, 죄다 사악한 악역 혹은 흑막으로 나온다.

  • 가라테 노 다카키 에서는 다카키가 필살기로 사용하는 발차기에 "쇼와승룡각" 이라는 이름과 함께 씰루엣으로 등장한다.

드라마 및 영화

  • <일본의 가장 긴 하루> 에서는 모토키 마사히로가 연기했다. 1941년 8월 15일 개전할 때 결의에 찬 모습을 보여준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더 크라운 시즌 3 8화에서 부인 나가코 황후와 함께 잠깐 나온다. 여기서는 후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에드워드 8세와 그 부인 월리스 심프슨의 초청을 받아 그 둘이 살고있는 프랑스 파리 저택에 방문한다.

게임

  • Paradox Interactive사의 2차 세계대전을 다룬 게임인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고증에 맞게 일본 제국의 국가원수로 나온다. 최신작인 Hearts of Iron IV에서는 시작시 쇼와덴노, 일본의 혁명가 라는 트레잇을 붙이고 나온다. Kaiserreich 모드에서는 일본국의 천황으로 나와, 도쿠가와 일족과 정치적인 암투를 펼치는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 권력을 잡는데 성공하면 쇼와 개혁을 실시한다.

관련 저서

  • <궁내청 저, 『쇼와천황실록』, 도쿄서적, 2015.>. 1990년부터 2014년까지 24년이라는 장대한 세월에 걸쳐, 궁내청이 편찬한 정식 역사서이다. 우리가 아는 실록처럼 쇼와 덴노의 전 생애(1901-1989)를 다루고 있으며, 총 61권에 1만 2천여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 <한도 가즈토시 저, 『쇼와사』, 루비박스, 2010.>. 일본의 근현대사 권위자이자 양심있는 논객이라 불리는 한도 가즈토시가 쓴 쇼와 시대의 역사서이다. 책 구성은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기준으로, 1권(전전편,1926-1945)과 2권(전후편,1945-1989)으로 이루어져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체로 중립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전후편은 1960-70년 대까지만 적혀있고 89년까지의 내용은 매우 간략화되어 있는 것이 다소 아쉽다.
  • <허버트 빅스 저,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 삼인, 2010.>. 전 히토쓰바시대학 교수이자 현재 빙햄튼 대학 교수인 허버트 빅스가 쓴 쇼와 덴노의 평전이다. 이 책은 최초의 외국인이 쓴 쇼와 덴노에 대한 대중적인 책으로, 기존에 희미하던 쇼와에 대한 서양의 인식을 <영웅적인 동양의 혁명가 군주>로 바꿔주었다.

여담

  • 근대 이후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함께 80세 이상을 살고 60년 이상을 즉위한 세 군주 가운데 한 명이다.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1세 68년(86세), 빅토리아 여왕 64년(82세), 쇼와 63년(88세). 이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도 1명 더 있는데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1711~1799)로, 무려 89세까지 60년을 재위했다. 게다가 이것도 본인은 감히 조부이자 성군인 성조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자진 퇴위하여 나온 값이기 때문에 태상황제로서의 재위기간을 더하면 64년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대 인물 가운데는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었다. 89세에 70년간 재위했다. 조만간 근대 이후 최장수 군주(빌헬름 1세, 만 91세)를 경신할지도 모를 뻔 했으나 2016년 10월 13일, 만 88세로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역시 89세로 60년 기록을 넘겼으며, 2014년 부로 쇼와보다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 선천적으로 건강이 좀 좋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와 마찬가지로 걸어다닐 때 발을 질질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며, 태어날 때부터 척추가 굽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근시가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안경을 써야만 앞이 보였을 정도로 안경은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 건강의 문제가 있었으나, 유신 및 대외적인 활동은 왕성하게 하였는데, 3.1 운동 이후 민중의 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신민의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이 국가의 운영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리 하였다.
  • 황실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에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후궁을 들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 1959년, 평민 출신의 쇼다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와 결혼하여 일본 최초 평민 출신의 황태자비가 되었다. 쇼와 덴노가 찬성했기에 아키히토는 미치코와 혼인할 수 있었다. 당시 나가코 황후와 쇼와 덴노의 동생들 부부, 전 황족들과 궁내청이 그리 강경하게 반대했음에도 이들이 혼인한 것은 아키히토의 아버지 쇼와 덴노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당시 쇼와 덴노는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 며 아내 고준 황후처럼 그렇게 심하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이후 장장 40년동안 지독하게 시집살이를 시키고 죽을때까지 미치코를 극도로 싫어했던 아내와는 다르게 미치코와 사이가 좋았으며 아내와 며느리가 싸울때마다 가운데에서 중재자 역할을 많이했다.
  • 열병식 등에서 자신의 애마인 '시라유키(白雪)'를 자주 탔었다. 시라유키는 1921년 헝가리 국립 목장에서 태어난 아랍종 백마이다. 쇼와 천황이 군복을 차려입고 백마에 올라탄 모습은 대전기 일본 제국 포스터에 참호를 파는 사진과 함께 자주 사용되었다.
  1. 당시 어소 시종의 증언.
  2. 그 이전까지 왜 몰랐었냐 궁금해 할 수도 있는데, 전통적으로 일본 내에서 천황의 실권은 0이 가까웠고, 특히나 도쿠가와가 두 차례나 벌어진 일본 내전에서 승리하자 존황토간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존황파에게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천황과 황가를 그야말로 뒷방에 박아놔서 진상을 몰랐다.
  3. 물론 초청한 고문들은 유신계열의 인사였다.
  4. 아직까지 누구의 소행인지 불분명하나, 많은 학자들은 쇼와 덴노의 사주라고 여긴다. 배경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리하기도 하고.
  5. 대한제국의 팽창주의 정책이 두려웠기에 친한정권에 가까웠던 에도 정부가 신정부로 바뀌자 다들 흔쾌히 승인하였다. 대한제국은 막 이강 정부로 넘어가고 있던터라 반대를 할 여력조차 없었다.
  6. 도호쿠 지방에 한국이 상륙하면서 창설된 민병대.
  7. 그나마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가장 비슷할 것이다.
  8. 신짱에게 자신은 대단한 할아버지라고 말하여서 이렇게 기억했다.
  9. 신짱은 이때 왠지 익숙함을 느꼈고, 할아버지에게 이를 물어봤는데, 노하라 긴노스케는 화들짝 놀라면서 대단한 할아버지는 일본의 신령님이고, 신짱을 좋게 봐준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