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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한국
동아시아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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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Empire of Japan
국기[1] 국장
팔굉일우
八紘一宇
쇼와 유신 이전 통합정부 출범 이후
일본국 지구 집정 연합
섹터 니혼
상징
국가
기미가요
국화
국화
황실 상징
국화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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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쇼와 유신
1941년 태평양 전쟁
1945년 대한국의 영토 반환
1987년 쇼와 민주화
지리
수도
교토도 (京都都)
최대도시
도쿄부 (東京府)
면적
382,960km²
위치
지구
동북아시아 일본 열도 및 부속도서
주변국
대한국, 소련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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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1억 1391만 명
공용어
일본어 (법정 공용어)
공용 문자
히라가나, 가타가나, 한자 (법정 문자)
민족
일본인 98%
그 외 2%
국교
신토 (사실상)
종교 분포
신토 42%, 기독교 11%, 그 외 47%
군대
일본제국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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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양원제, 의원내각제
국가 원수
아키히토 덴노[2]
행정 수반
기시 노부오[3]
여당
입헌민정당
경제 체제
수정자본주의 시장경제
통화
일본 엔 (円)
위치
수도 교토의 전경

최대도시 도쿄의 전경

개요

파도는 멎었고, 위협은 가셨다. 많은 피가 흘렀음에도 야마토인들은 끝까지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나약하지만 이제 그들은 저문 해 따위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 한켠에 이 기억이 있는 한, 성공할 수 있다는 기억이 있는 한, 그들은 언제나 떠오르는 해일 것이다.

임의 치세는, 천대에 팔천대에!

대일본제국 (Empire of Japan)


대일본제국은 동아시아의 국가이다. 수도는 교토이며, 최대 도시는 도쿄이다.

1936년 일어난 쇼와 유신으로 일본 왕국을 무너뜨리고 탄생한 국가로, 비교적 늦게 근대화에 성공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역사

격동의 개화기

1863년의 영국 사츠마 공격은 존황파의 반영감정을 자극시켰고, 이들은 유신을 대비하여 막부를 흔들기 위해 쓰시마를 러시아에게 침공해달라는 상주문을 보낸다. 1867년의 대한제국 선포 이후 러시아의 쓰시마 침공이 직접적으로 감행되자 불쾌감을 느낀 대한제국과 영국은 1차 한영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보신전쟁에 개입하기 시작된다.

1868년부터 시작된 보신전쟁, 혹은 1차 일본내전은 일본을 폐허로 몰아넣었다. 유신회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와 막부가 크게 밀리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뭉친 한영동맹은 영국군이 쓰시마의 러시아군과 산발적 교전을 벌이는 사이 논영의 배를 타고 온 대한제국군이 나가사키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보신전쟁을 국제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사건의 결과로 보신전쟁은 어느 누구의 완벽한 우세로 끝나지 않고 서쪽의 존황군, 동쪽의 좌막군으로 나뉘어져 휴전상태로 끝이나게 되었다.

1873년 신센구미 주도의 사카모토 료마 암살은 불안정한 휴전을 깨뜨렸고, 1년 후 2차 일본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1차와는 달리, (빚으로 강제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통해 막부의 군세는 확연히 달라 도카이도 선을 기점으로 참호전의 늪에 빠졌다. 이때 근황군은 국제적으로 고립당해서 무기 수입 루트가 없으니 떠오르는 해, 독일과 일본에 개입을 하고픈 야수 미국에게 철도부설권, 탄광채굴권, 최혜국 대우 등의 이권을 빼주며 지원을 받았다. 이를 통해 근황군 대한 여론이 나락으로 가면서 2차 내전에 종지부를 찍은 두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근황군의 아교,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은 내전의 종지부를 찍게 만든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은 근황군의 뼈저린 실수로 인해 대한제국의 '운양호'가 불타 침몰하는 사건이었다. 이를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던, 새로이 즉위한 대한 광무제 이천은 대한제국군을 동원하여 훗날 '조선대습래'로 불리울 규슈 침공을 감행한다. 여러가지의 악재가 겹친 끝에 1878년 교토에 막부의 깃발이 꽃혔으나, 일은 그다지 좋게만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영국과 러시아, 미국과 독일, 대한까지 막부에게 내전기간의 영수증을 요청하였고 차마 배를 쨀 수 없던 막부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한편 일본 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실에 분노한 이들이 정토진종을 구심점으로 1881년 일향종의 난을 일으켰다. 일향종의 난은 당대 사회에 팽배하던 반 서구, 반 기독교 감정에 편성하여 서구 열강의 조계지와 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사태로 확대되었으며 결국에는 서구 열강들의 개입을 불러왔다.

이 일향종의 난이 끝나자 열강들은 아와지 조약을 맺어 사실상 일본을 아무것도 못하는 시체국가로 만들었다. 다른 말로는 일본 분할이라고 불리는 아와지 조약은 각 열강들이 담당한 구역에서의 치안을 책임지는, 막부를 하나의 국가로도 보지 않는 처우였었다. 명분이야 일향종의 난이 또 일어날 것을 방지하는 조약이었지만 사실상의 국권피탈이나 마찬가지인 셈.

이 아와지 조약은 계속 열강들의 힘으로 유지되다가 1902년 러시아가 한러전쟁에서의 패배로 이탈함으로 휘청였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명무실화되었다. 결국 1920년 대한제국이 중국 청도를 반환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영-조 결렬 이후로 사문화된 아와지 조약은 미국이 재한적 재무장을 허가하면서 완전히 파기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1882년 아와지 조약이 체결된 이후 영국이 쿠레, 프랑스가 마이즈루, 스페인이 요코스카(미서전쟁 후 미국령), 한국이 사세보, 러시아가 하코다테를 조차지로 얻으면서 마무리 된다. 1884년 이러한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것에 대한 자정작용으로, 일본 막부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쇼군 요시노부의 동생의 주도로 "아키타케 사절단"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줄을 가진 영국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영국의 헌법을 배워 1886년 초안을 작성, 1887년 천황은 제사장 및 일본국민의 총의로, 쇼군은 일본국의 군주로 두는 이중군주제 일본국의 탄생을 알리는 일본국헌법을 반포한다.

1902년 한러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일본국은 중립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집중하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수백년동안 모여온 경력의 도쿠가와 가문은 경제적인 면에서의 발전은 준수하게 이뤄냈다. 1910년대 세계대전기는 일본에도 경제호황을 불러왔다. 아와지 조약의 폐지 이후로 회복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의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촉발된 기미 3.1 봉기는 계몽시대 이후의 일본은 내적으로 사실상 변한 것은 없다는 민중들의 불만을 말해주었고,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막부-도쿠가와 체제 자체의 모순점을 주었다. 미흡한 대처와 사태수습 사이에 있던 부패한 행정과 번벌간의 알력다툼은 전국민적인 분노를 일구었다. 그리고 운명의 1929년의 경제대공황은 일본국의 권위를 바닥 끝까지 쳐박았다.

1936년 강명황제 암살시도의 여파로 규슈에서는 또 다시 3.1운동과 비견될 정도의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진압군을 파견한 일본국 정부는 역으로 이들이 진압을 포기하고 시위에 참여하자 혼란에 빠졌고, 설상가상으로 규슈에서 총격사건으로 피난민이 사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만큼 커지게 되었다.

일본 본토 내에서도 수 많은 시위가 일어났고, 반정부 인사들은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쇼군에게 아편 든 차가 올라갔다.

쇼와 유신

현재까지도 아편이 든 차를 누가 진상하였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어떤 이들은 유신파가 쇼군을 암살한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도쿠가와 일족 중 한 명이 일본을 장악하기 위해 쇼군을 독살한 것이라고도 말을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1936년 2월 3일을 기점으로 쇼군이 공식 사망한 것이 알려졌고, 일본은 혼란의 상태에 돌입했었다. 교토에 잔존하던 도쿠가와 왕국군은 지휘체계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 수도 없어 사방에서 일어나는 소요사태[4]를 진압하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였다. 이때 유신회가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유신회는 본디 일본 국외에서 유학을 한, 일본 내 정계에서 비교적 젊은 지식인, 장교들이 꾸린 세력으로, 간사이와 세이난 전쟁 이후 완전히 중앙 세력에서 배제된 조슈-사쓰마 번의 지원을 받아 성장하였다. 이들은 장교들을 이용하여 혼란 속 교토에서 정부를 장악하고 의회에서 일본 신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도쿠가와 일족을 몰아낸 후 유신회 고위층은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려 하기까지 하였으나, 아직까지 일선 장교 및 병사들은 유신회 고위층에서 교토 점거 후 어떠한 정부를 수립한다 제대로 된 말조차 없어 슬슬 혼란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유신회 고위층에서도 사실 공화정을 세울지, 군정을 임시로 할 지 논의가 갈렸던 때였다. 이 때 의외의 존재가 이들에게 찾아왔다. 바로 쇼와 덴노였다.

쇼와 덴노는 유신회가 교토를 장악하는 혼란의 시점에서 느슨해진 감시망을 피해, 황거에서 나와 직접 이들이 있는 의회로 향하였다. 일본에서의 천황은 곧 그들의 신이나 다름 없었기에 쇼와는 유신회 권력을 평소 친분이 있던 도조 히데키와 기타 장교진들의 열성적인 호응으로 장악하였고, 도쿠가와 막부 정부는 조적이고, 신정부와 천황의 친정을 통해 이들을 토벌하겠다는 조칙을 내렸다. 그리하여 일본 내전, 그리고 30년간 이어질 쇼와 유신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덴노라는 구심점과 에도의 막부라는 적을 확실하게 설정한 정부는 천황의 이름으로 오사카, 나고야를 빠르게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일본 왕국 치하의 삶이 좋지 않았던 국민들 또한 유신회의 이러한 '혁명'에 호응하여 막부군을 테러하거나, 각지에서 친유신회 잇키를 일으키는 등의 활동을 하며 막부의 치세가 종결되었음을 알렸다.

결국, 에도에 쇼와가 입성하면서 을병전쟁, 오헤이전쟁 등으로 불리는 일본내전은 끝을 알렸고, 유신회는 1937년 4월 16일 쇼와 헌법을 발표하면서 일본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이렇게 막부를 무너뜨렸다 할지라도 아직 문제는 많이 남아있었다. 여러차례의 기근과 전쟁으로 농토는 황폐화되었고, 천석호와 만석호들이 그마저 있는 땅을 장악하였다. 번벌들은 아직도 호시탐탐 신정부를 노리고 있었고, 유신회는 인력이 적은 탓에 행정적인 부분에서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쇼와는 이를 정공법으로 돌파하기로 하였다. 막부 치세에서 일하였던 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고, 전향서를 쓰는 형식을 취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반성하고, 신일본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맹세를 하게금 하면서 인력을 확충하였다. 천석호와 만석호들은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여 자작이 아닌 토지에는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팔거나, 아니면 세금을 더 내던가의 양자택일을 하게금 유도하여 정부에게 팔게금 만들었고, 이렇게 정부가 사들인 농지는 싼 값에 농민들에게 다시 팔아주면서 자작농의 비율을 늘렸다. 번벌들은 친정부적 성향을 가진 조슈, 카가 등은 그들의 자치권을 존중하는 선에서 통합을 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북쪽의 번벌들은 이러한 통합에 끝까지 반대하자 결국 어군이 직접 이들을 공격한 뒤에야 통합에 동의하였다.

일본 신정부는 이렇게 일본 통일이라는 공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외세의 지지를 받았는데, 당시 1937년 한국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영국은 홍콩,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 반한(反韓)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일본 신정부가 이들을 견제해주는 역할을 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5] 그리하여 외국에서 차관도 도입하고, 미국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 군제도 개편하였고, 주요 산업공장도 국영화를 하면서 물품들을 생산해 차근차근히 체제를 뿌리부터 뜯어 고치면서 일본을 정상국가화 하기 시작하였다. 도량형 통일, 공장 국영화, 산업집중지대 재설정, 농촌개혁운동 등등 수 많은 정책이 이때 세워졌다.

그러나 일본 내부에서도 수백년 간 이어져 온 관습들을 뜯어고친다고 하니 막대한 반발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도량형인데, 간사이는 SI단위계, 간토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야드파운드법을 쓰는 것을 SI 단위계로 통합하는 것에 공장주들과 국민들이 불편함을 표했던 것이었다. 이 외에도 산업집중지역을 설정하면서 지역차별이라는 등, 국영화 공장의 주인들의 반발과 농촌개혁운동의 불협화음까지, 유신정부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천황의 정부를 자처하던 유신정부는 1936년으로부터 5년 후인 1941년에는 도호쿠와 간토 일대에서는 소규모 시위까지 일어날 정도로 민심을 잃어갔다.

그리고, 이 모든 불협화음을 한꺼번에 침묵시키게 해줄 폭풍이 찾아왔다.

2차 세계대전

대한제국이 1941년 해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 전쟁에 돌입하자, 이들은 남방작전과 중국전선 정리를 최우선 과제로 두었다. 이 때 일본이 중국 랜드리스 거점으로 자리잡은 것에 큰 불만을 품은 한국은 칭다오 사건 조작을 했던 것처럼 규슈 일대에서 일본 유신정부 소속의 병사들이 한국 관리를 죽였다는 누명을 씌우면서 일본에게 내정간섭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당연히 극도의 반한감정과 열강의 압력 등으로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고, 한국은 합법적인 도쿠가와 정부를 몰아낸 일본 반정부단체를 동맹으로서 토벌한다라는 명분을 내걸면서 일본을 공격하게 되었다.

전쟁은 장장 4년동안 진행되었다. 대한제국군은 상륙전에 능한 해군육전대를 동원하여 빠르게 히로시마 일대를 장악하였고, 곧 바로 일본의 수도인 교토로 향하였다. 일본은 정식으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직 대한제국 해군이 완전히 힘이 빠진 상황이 아니었기에 긴 태평양을 건너는 배를 일본으로 보내기에는 위험이 컸다. 또한 일본군이 재편을 하였다고는 하나 극적으로 실력이 향상되지는 않았고, 아와지 조약으로 군 체계를 사실상 1904년부터 다시 재정립했기에 대한제국군과 만나는 족족 패하였다. 그렇게 대한제국군은 교토 앞까지 도달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일본인들까지 그들의 조국이 호랑이밥이 되는가 하였다.

쇼와는 이때, 친정을 결심하였다. 잦은 패배로 인한 사기 저하를 매꾸고자 직접 삽을 들고 교토에서 참호를 파면서 전 일본군을 독려하였다. 살아있는 신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그 생각 덕에, 일본군은 하나로 뭉쳐 단결하였고, 쇼와를 보호하고자 교토에서의 결사항전을 외쳤다. 한국군 점령지에서도 꾸준하게 일본 의용군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보급선에 혼란을 주었고, 일본의 잦은 지진과 험한 지형, 그리고 교토 인근의 모기와 더위는 한국군의 공격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추가적으로 중국전선이 지지부진하고, 남방작전까지 시행하고 있는 시점인지라 한국의 인력은 부족해져만 갔고,수 개월 간 치뤄진 교토공방전은 시가전, 일본의용대, 보급선 혼란, 험지, 질병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해전의 대패로 한국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자 종결되었다.

1944년 한국이 대륙타통작전을 벌이면서 최후의 총공세를 일본에도 진행하였으나, 미군이 이미 일본에 당도하였고 한국은 국민개병제, 국가총동원법까지 제정하면서 모든 인력과 자원을 다 끌어쓴지 오래라 공세는 당연하게도 실패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협조를 받아 1945년에는 규슈와 홋카이도 수복까지 성공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두 빛이 한반도를 밝히면서 8월 15일 강명제가 항복을 선언하자 지긋지긋하던 한일전쟁은 일본의 승전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전 이후에는 뒤처리가 남아있었다. 대한제국의 침공으로 완전히 무너진 농촌경제 및 사회, 망가진 전 국토, 그리고 잿더미가 된 일본 국토까지. 이 모든 것을 다시금 쌓아올렸어야 하였다. 범인이었다면 절망하고 낙심하였을 터였으나, 쇼와는 그리하지 않았다. 유신정부는 재만 남은 폐허에서 삽을 들고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기존 보수 기득권층이 전쟁으로 한번 뒤엎어진 지금 새 정신을 일본에 불어넣기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대는 냉전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미국은 극동의 섬나라 일본을 주목하였다.

전후

재만 남은 폐허에서 일본이 부활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어봤으면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패망 이후에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 방패막으로 일본을 사용할 예정이었고, 흔히들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아는 국민당의 중국 내전 시작은 친미 북양정권을 위협하면서 미국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주기까지 하였다.

일본의 유일무이한 군주, 쇼와 덴노 또한 외교적으로 그런 안목이 있었다. 당시 그는 폐허가 된 조국을 되살리기 위하여 밤낮으로 자지 않으며 노력했으며, 미국의 경제 고문단을 초빙하여 특강을 듣는 등의 열의를 보여주면서 조국 재건에 혼신을 다하였다. 제3세계 일반적인 독재자들이 일신을 챙기기위한 것을 보면, 이는 경이로울 정도다. 무엇이 그에게 열의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는지는 온갖 추측 (유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신민'을 잘살게 해주어야 된다는 설, 조국근대화를 부르짖는 애국청년설 등)이 난무하지만, 이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는 부분이니 넘기도록 하곘다.

아무튼, 일본제국은 그리하여 차근차근 안정적인 전제군주정권 하에서 개발을 시작해나갔다. 관동과 관서의 각종 도량형 차이, 문화적 차이 등도 한일전의 승전이라는 국민적 동질감을 통해 하나로 묶이기 시작하면서 1960년 전일본철도가 건설되어 비로소 근대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쇼와 경제개발'이라고 명칭되는 중공업 기반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일본 농촌의 폐습과 허름한 길을 재정비하는 신일본운동 혹은 새마을운동, 그리고 삼저호황을 통한 경제적인 발전은 일본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1988년 교토 올림픽은 그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며, 일본을 강대국 막차에 태워주었다. 가끔씩 불만의 목소리가 조금씩 나와도 예전 도쿠가와의 일본 막부시절과는 달리, 합법적이고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살아있는 신이라고 할 정도의 권위를 지닌 군주가 명을 내리니 조용히 참을 수 밖에 없었고, 더욱이 쇼와 덴노의 경제개발정책 또한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네가 천황폐하보다 더 잘살게 할 수 있느냐?' 라는 말 한마디라면 입을 다물게 되어 개혁과 개발에 대한 불만은 쇼와시절에는 묵인되었고, 이러한 계단을 넘어서 현대의 일본은 전쟁과 분열의 아픔을 딛고 세계 9위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도 뺄 수 없다. 1936년 쇼와유신을 일으킨 유신회는 쇼와 독재시절 수십년간 집권하면서 같이 경제개발을 이어갔으며, 해외 각지로 떠났던 일본인 이민자들을 조국으로 복귀시켜 조국근대화의 역군으로 삼는데 큰 공헌을 해주었다. 그러나, 쇼와도 늙어가고, 유신회 원로들 또한 영구집권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해 황태자를 꼭두각시로 하려 수작을 부리려고 하였으나, 쇼와의 서슬퍼런 두 눈에 걸려 유신회가 해체되고 자유선거를 실시함으로서 일본에도 민주주의가 찾아오게 되었다. 쇼와가 자유선거를 실시한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데, 황태자 아키히토 (2017년 현재 헤이세이 덴노.)의 능력이 자신에 미치지 못한다는 우려,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자신의 대에는 억눌려있을 뿐이지 일본인에게는 산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당시의 일본 정계가 고인 물이 되어서 썩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포함한 많은 고민 끝에 쇼와 덴노는 수백년만에 돌려받은 천황의 권력을 민정에게 이양했고, 불멸의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일본제국군은 현대에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전을 거름삼아 일신우일신을 반복해갔다. 규슈 전선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도조 히데키 장군은 전후에 여러 육군사관학교를 세우고 자신이 겪은 전훈을 한가지로 묶은 '현대전대승백서'를 출간하여 교보재로 삼게 하였고, 규슈와 홋카이도의 한국과 섞인 이질적으로 보이던 문화에 대한 차별을 베트남전쟁의 파병으로 줄이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육군보다는 해군에 주력하면서, 발전된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쪽 한국의 전투경찰이 느슨한 기강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비해 모병제에 애국심이 투철한 이들이 모인 일본군의 정예라는 자부심으로 훈련에 임하니, 당연히 차별화되는 수 밖에.

고난을 겪은 일본도, 이리하여 하나의 날개를 되찾은 불사조가 되어 활활 저 하늘을 날아갔다. 산고를 겪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듯, 현대 일본에게는 역사는 그 스스로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시대로 생각되고 있다.

황실

각주와 여담

The Last Empire
Land of the Light and Night TLE [GWR] TLE [Hoi4] The Last Empire For the Future
  1. 천황기
  2. 1989년 즉위
  3. 입헌민정당, 2016년부터 재임
  4. 원래는 유신회 쪽에서 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사료가 공개 됨에 따라 번벌들이 주도했다 보는 것이 정설이다.
  5. 영국의 영향권이던 조슈-주고쿠 일대-와 프랑스 영향권이던 시고쿠 일대를 일본 유신정부에게 흔쾌히 넘겨준 것 또한 일본 밀어주기의 한 정책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