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사건
노이기니아 내전의 일부
날짜2025년 11월 4일
장소노이기니아 노이기니아
결과 노이기니아 내전으로 발전
교전국
노이기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혁명군 노이기니아 왕립군
노이기니아 근위대
지휘관
노이기니아노이기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프리츠 폰 넨도
노이기니아노이기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모리츠 바이에를라인
노이기니아노이기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헤르베르트 베포르트
노이기니아노이기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율리우스 디트리히
노이기니아노이기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지크 오트
노이기니아 아델베르트 폰 노이야르스
노이기니아 오스발트 폰 미텔베르크
병력
12,500명 7,300명
피해 규모
사망자 63명
부상자 137명
사망자 127명
부상자 417명

11·4 사건2025년 11월 4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노이기니아 혁명군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 대령와 모리츠 바이에를라인 대령, 헤르베르트 아우구스트 베포르트 소령, 율리우스 디트리히 대위, 지크 오트 소위가 일으킨 쿠데타를 말한다. 오전 8시 50분에 시작된 쿠데타는 10여분만인 오전 9시 1분에 성공적으로 끝나게 된다. 쿠데타군은 빌헬름 2세를 비롯하여 노이쾨니히스베르크에 머물던 세계 여러 정상을 인질로 잡는데 성공한다. 또한 비스마르크 제도와 태평양 도서를 제외하고 노이기니아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빌헬름 왕태자오토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폰 자모아 공작, 8명의 정부 유인이 노이쾨니히스베르크를 성공적으로 탈출하였고, 이후 헤르베르트쇠헤에서 노이기니아 혁명군이 선포한 노이기니아 혁명 정부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또한 서부 지역에서는 왕국정부에 충성하는 할베르트 공작과 여러 원주민 부족, 제2사단이 궐기하여 전쟁을 지속해나가게 된다.

배경

비리 장교 체포

2025년 8월 23일, 라헤에서 비리 장교의 체포 도중 무력 충돌이 발생한다. 비리 장교 보리스 자이베르트는 휘하 병사에게 자신을 체포하러 온 근위대를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을 명령한다. 왕립군근위대는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근위대의 명령은 상관의 명령보다 아래였기 때문에 명령을 하달받은 병사들은 근위대를 향해 사격을 개시한다. 보리스 자이베르트는 이를 틈타 빠르게 도주할 계획이였다. 그러나 3명의 병사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며, 오히려 보리스 자이베르트를 체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사건 이후 빌헬름 1세근위대의 명령이 왕명과 동일함을 선언하며, 상관의 명령보다 근위대의 명령을 따를 것을 명령한다. 당시 사건을 보면 이는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였으나, 근위대와 사이가 좋지만은 않던 왕립군은 이를 권리 침해라며 반발하였다. 이들은 이 명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요구는 거부되었고, 군부 내에서 불만이 높아졌다.

빌헬름 1세 암살 미수

2025년 9월 8일, 빌헬름 1세 암살 시도가 발생한다. 빌헬름 1세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들에 대한 훈장을 수여하면서 일어났다. 암살 이전 빌헬름 1세헤르베르트쇠헤 노이슈테틴구에 위치한 국립묘지에 도착해 전사들에 대한 훈장을 수여한다. 이후 부상자들에 대한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노이브레슬라우구로 향했다. 수십명의 부상자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마지막 수상자가 남았을때 병원에 2발의 총성이 울려퍼진다. 빌헬름 1세는 이중 한발을 옆구리에 맞게 된다. 노이기니아 근위대는 도주하던 범인을 체포하였다. 범인은 노이기니아 공산당헤르만 펠미라는 남성이였고, 이 사건 이후 빌헬름 1세의 섭정이던 프리드리히 왕태자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동시에 테피치부르크구 전역에 통행 금지령이 선포되었으며, 예비군이 징병된다. 이로 인해 노이기니아 공산당은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며, 일부 공산당원은 서부로 도주한다.

경과

2025년 8월 27일, 국왕령에 불만을 품은 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 대령과 모리츠 바이에를라인 대령, 헤르베르트 아우구스트 베포르트 소령, 율리우스 디트리히 대위, 지크 오트 소위 다섯 사람이 한밤중 모인다. 이들은 이날 쿠데타 모의를 계획했으며, 비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하였다. 대령인 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모리츠 바이에를라인이 쿠데타를 주도하며, 헤르베르트 아우구스트 베포르트율리우스 디트리히, 지크 오트는 각 지역에서 봉기군 궐기를 주도하기로 한다. 이들은 군대 내부 장교들의 힘으로는 쿠데타 이후의 여러 상황을 버틸 수 없을 것이라 판단, 다른 세력들의 지원이 필요함을 알았다. 이들은 스스로 여러 세력을 대표하였으며, 각자 대표하는 세력에서 지원군을 모집하기로 한다.

접점

지원군은 총 5개의 세력으로 구성될 예정이였으며, 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가 국왕령에 불만을 품은 왕립군을, 모리츠 바이에를라인왕립군 내 공산주의자와 반정부주의자들을, 헤르베르트 아우구스트 베포르트근위대를, 율리우스 디트리히는 서부 지역의 원주민들을, 지크 오트노이기니아 공산당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한다.

공산당

지크 오트노이기니아 공산당 및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부와 도시 빈민가를 누벼 여러 공산주의자와 접점한다. 노이기니아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은 쿠데타에 매우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으며, 쿠데타 발생 시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

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헤르베르트쇠헤 주변에서 기습을 노리고 있는 일명 "갱들의 연합"과 접점을 가진다. 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는 쿠데타 이후 비스마르크 제도에서 갱들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가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며, 쿠데타가 발생하면 곧바로 헤르베르트쇠헤를 기습해 줄것을 요구한다. "갱들의 연합"은 이를 수락하였다.

원주민

율리우스 디트리히헨리에트 사건으로 원래의 취락에서 북쪽으로 도주한 원주민 부족 연합에 접근하는데 성공한다. 율리우스 디트리히는 부족 취락의 도시 출신 부족민을 통해 쿠데타를 알리고 이에 협조해 줄것을 요구한다. 이에 원주민 부족의 각 족장들은 대부분 이를 승인하였으며, 쿠데타 발생시 곧바로 궐기할 것을 약속한다.

빌헬름 1세 붕어

2025년 9월 22일 오전 0시 47분 21초, 빌헬름 1세가 82세의 나이로 서거한다. 빌헬름 1세는 몇달 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왕태자를 섭정으로 앉혀 국정에서 잠시 벗어났다. 점차 건강은 다시 회복되었으나,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피격되면서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상처로 병균이 투입하여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으며, 여러 차례의 수술에 의한 후유증이 돌아와 결국 붕어한 것이다. 서거 소식과 동시에 엠바고가 선포되어 모든 언론 및 인터넷에서 여러 루머가 검열된다. 이후 프리드리히 왕태자빌헬름 2세로 즉위하였으며, 2025년 11월 1일, 즉위식이 치뤄지게 되었다.

빌헬름 2세 즉위식

빌헬름 1세 서거 2개월만인 2025년 11월 1일, 빌헬름 2세의 대관식이 노이쾨니히스베르크성에서 치뤄진다. 대관식에는 극동 하바롭스크 왕국, 노르웨이 연방 공화국, 대성제국, 제3공화국, 칠레 인민 공화국의 귀빈과 왕립군근위대의 장교, 각 지방의 융커들이 참석하였다. 대관식은 정오부터 시작되어 약 2시간 동안 성대하게 치뤄졌다. 대관식 이후 융커와 장교, 정부인사들의 충성 서약이 진행되었으며, 충성 서약 이후 만찬에서 수교국들의 대사와 만나 만담을 가졌다. 대관식은 오후 7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며, 이후 며칠간 노이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축제가 벌어졌다.

쿠데타

2025년 11월 4일 오전 8시 50분, 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 대령, 모리츠 바이에를라인 대령, 헤르베르트 아우구스트 베포르트 소령, 율리우스 디트리히 대위, 지크 오트 소위의 주도하에 쿠데타가 개시된다.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 대령과 모리츠 바이에를라인 대령은 가장 중요한 노이쾨니히스베르크에서의 쿠데타를 통솔하며, 헤르베르트 아우구스트 베포르트 소령은 라헤에서 쿠데타를, 율리우스 디트리히 대위는 여러 도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통해 봉기를, 지크 오트 소위는 서부 지역에서 원주민의 지원을 받은 봉기를 주도하기로 한다. "갱들의 연합"은 자체적으로 연합을 이끄는 이른바 "황제"를 중심으로 헤르베르트쇠헤를 급습한다.

노이쾨니히스베르크

오전 8시 50분, 쿠데타 시작의 신호와 동시에 프리츠 베른하르트 폰 넨도모리츠 바이에를라인이 이끄는 노이기니아 혁명군이 자동 소총과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노이쾨니히스베르크 시내를 급습한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노이기니아 혁명군은 거리의 근위대와 경찰 병력을 처리하고 오타카르 호텔과 관공서에 나뉘어 진입한다. 그들은 약 40초만에 로비의 근위대와 저항하는 직원을 살해하고 만찬이 열리는 4층과 귀빈이 투숙하고 있다는 5~6층과 빌헬름 2세와 왕가 구성원들이 투숙하고 있다는 7층으로 병력을 나누어 진격한다. 4층에 도착한 혁명군은 큰 저항에 부딪쳤으나, 강한 화력으로 저항을 분쇄하였다. 4층을 점거한 혁명군극동 하바롭스크 왕국대성제국, 칠레 인민 공화국의 귀빈 몇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5~6층으로 간 혁명군은 매우 순조롭게 각 층에 투숙중인 모든 투숙인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7층으로 향한 혁명군은 각 호실 앞 마다 배치된 근위대와 경호 병력의 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그러나 곧바로 저항을 분쇄하여 결국 빌헬름 2세와 몇몇 정부요인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빌헬름 왕태자프란츠 빌헬름 왕자, 오토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폰 자모아 공작 등 여러 정부 요인들은 이미 헬기를 통해 탈출에 성공한 뒤였다. 같은 시각, 관공서를 습격한 혁명군은 3분만에 노이쾨니히스베르크를 점거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라헤

오전 8시 50분, 헤르베르트 아우구스트 베포르트 소령의 주도하에 소수의 전 근위대원왕립군으로 구성된 혁명군라헤를 공격한다. 8시 51분까지 라헤 거리는 완전히 통제되었으며, 이후 쿠데타군은 장군참모부왕립군부대로 향하는 부대와 관공서로 향하는 부대로 나뉘어져 쿠데타를 계속 진행한다. 장군참모부는 단 1분만에 장악되어 참모를 구성하는 여러 장교들이 체포된다. 왕립군부대는 지난 사건으로 인해 왕실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군인과 왕실에 계속 충성한 군인으로 인해 난잡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교전 5분만인 56분, 저항한 군인들이 사살되거나 체포됨으로써 결국 종료된다. 관공서는 매우 빠르게 함략되어 54분이 되어 라헤 전역은 쿠데타군에 의해 점거된다.

헤르베르트쇠헤

오전 8시 51분, "황제"를 중심으로 "갱들의 연합" 약 2,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헤르베르트쇠헤 노이브레슬라우구를 습격한다. 그들은 남부에서부터 도로를 따라 저항 없이 북진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도심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점차 저항이 증가하였다. 끝내 교차로에 들어서면서 중무장한 왕립군근위대에 의해 진격이 저지된다. 오전 8시 55분부터 시작된 교전은 2분이 지나자 점차 "갱들의 연합"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으며, 결국 8시 59분, "갱들의 연합"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퇴각하는 "갱들의 연합"을 쫓아 수비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으며, 9시가 되어서야 겨우 퇴각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9시 1분, 헤르베르트쇠헤 습격의 실패가 혁명군에게 알려진다.

노이기니아 서부

결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