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12.10 운동 / 12.10 혁명
十二十事件 / 十二十共產运动
Decemder Revolution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국기를 들고 행진하는 중국인들
원산항에서 시위하는 한일 노동자들
평양 을밀대에 올라가 시위하는 여성
날짜
1918년 12월 10일 ~ 1919년 10월 9일
지역
대한국, 일본 제국 전역
중국 베이징, 허베이성, 상하이, 광둥성 일대
원인 한일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처우 불평등
중국에 대한 열강들의 침탈
목적 한중일 정권 전복 및 사회주의 정권 수립
시위 관련자
주요 인물 광종
가인왕
이완용
하라 다카시
남공선
참여 인원
사상자
결과
혁명의 실패
한국의 정치 대중화, 친노농 정책 확대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 세력 절멸

개요

작금의 만국 공산패당의 준동은 마치 서방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퍼졌던 것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오. 공산주의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믿음이 되었고 신앙이 되었소. 이를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더욱 퍼져나가고 옛 불란서에서 그러했듯이 우리는 종시 목이 잘려서 저잣거리에 나뒹굴게 될거요.
- 서재필, 1919년 정초 이완용에게 보내는 서신 中
무지한 자들은 이 공산주의라는 물건이 과거의 서학과 같아서 실의와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유혹하는 사교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고치자는 열정적 행동주의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자 누가있단 말인가?
- 박헌영, <12.10 혁명 평론>(1941) 중에서

1918년 12월 10일부터 1920년 초까지 이어지며 반봉건주의 반제국주의를 기치로 들고 동아시아 각지에서 일어난 일련의 공산주의 노동쟁의 및 무력투쟁. 하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노동쟁의와 공산국가 설립을 위한 투쟁은 점차 보통선거의 실시와 노동자 처우 개선, 권리 보장등 사회개혁적 성격을 띈 민권주의 운동으로 확장되었고 우파 지식인까지 이에 참여하여 과격한 색채가 옅어졌다.

러시아 혁명의 뒤를 이어 일어났고 한국과 일본같은 당대 동아시아의 굵직한 제국주의 공업 국가들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들어 서유럽 공산주의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농민 봉기 또한 조명되어 당시 서방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자신들의 이론에서 공산주의 혁명 주체세력을 무산계급 노동자에서 가난한 농민까지 확장시켰으며 각국의 사회적 특징에 따라 혁명 주체 세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때부터 노동자 권리등을 인정하고 과거의 여전론등을 꺼내와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수면’, ‘균등한 농지 분배’, ‘유상매수 무상분배’,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으며 사회민주주의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사회주의, 민권주의 운동은 완전히 궤멸되어 군국주의 국가로 폭주한뒤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같은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걷던 한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길을 걸으며 분기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결과적으로는 동아시아공산당연합(동공연)의 궁극적 목적인 동아시아 3국의 공산화와 하나의 국가로의 단결은 실패했지만 한국 정부는 기업 정책과 식민주의 정책을 대거 수정하고 시민국민주의등 여러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피지배 계층까지 평등하게 대우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사민주의 국가로의 이행이 일어나게 되었다.

배경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공장 노동자들은 물론 농업계에서도 소작농의 수가 급증했으나 그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서유럽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이미 금지된 아동노동도 서슴없이 이루어졌으며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과로와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다. 게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한국과 일본은 각종 군수품들을 수출하기 위해 기업들은 더 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하였고 1차 세계대전 말엽에는 국가의 부는 커졌으나 부의 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울러 한국에서는 1900년대 들어서 신영토(만주, 몽골, 내몽골, 북강 일대)의 농지를 개척농에게 나눠주기 보다는 지주들이나 기업에게 우선적으로 개간권을 판매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소작농을 고용하여 농업노동자라는 독특한 직업계층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당연히 소작농들에게 돌아오는 농업 생산량은 매우 적었고 결국 이들은 인근 도시의 공장으로 떠나거나 어린아이까지 온가족이 모두 노동에 시달렸다.
심지어는 참다랑어와 게등 고급 음식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원양어업까지 성행하기 시작하였고 다수의 어업노동자들까지 심각한 과로에 시달렸고 먼 바다에서 숨을 거두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1880년대부터 한국의 몇몇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본인들이 노동에 뛰어들어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보급하였고 다른 지식인들도 '민중 계몽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각종 언어나 역사등을 교육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직된 노동조합이나 농업노동자 조합등 여러 조합들이 활동해왔지만 정부의 극심한 탄압에 이런 조합들은 구심점이 없었고 좁은 지역 내에서 연대하는 선에서 그쳤다. 여러 대학의 사회주의 연구 모임도 조용하게 활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민권주의와 12.10 운동을 위한 민중 역량이 쌓여가는 시기였다.
1909년 대한공산당이 창당되자 전국의 노동조합들은 공산당 아래 대한노동자연합을 조직하여 노동자 처우 개선, 아동노동 금지, 소작농의 토지 직접 소유등을 정부에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오히려 무력으로 이들을 해산하려 한다. 이에 공산당도 혁명과 총파업등 노동쟁의라는 무력 투쟁 노선을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를 점해갔고 결국 1910년 무장봉기를 모의하나 여운형등 여러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사형을 언도받으며 공산당은 사실상 해산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공산당에 가입했던 전국의 조합들을 색출해내는데 실패하여 결국 '전국노동조합해산령'을 내려 기업이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사법기구가 이들을 처벌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러시아등지로 도피한 대한공산당의 일부 중책들은 그곳에서 공산당 내부기구를 정비하고 한국 국내 연락기구를 비밀리에 조직하였고 조합등도 다시 부활하지만 이전보다 더욱 극심한 정부의 탄압에 노동자들의 불만은 더욱 가중되었다. 한편 대한공산당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공산주의를 전파하였고 제국주의에 무너진 중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을 공산화 시켜 서로 연대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처음 상당수의 중국 지식인들은 이러한 대한공산당을 자신들의 땅이었던 곳을 빼앗은 나라의 앞잡이로 여겨 경계했으나 대한공산당의 열정적인 활동과 앞서 언급한 주장을 펼치자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왕정이 폐지되자 이에 고무된 대한공산당은 1918년 2월 한중일 3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동아시아공산당연합(동공연)을 창설, 3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모의한다. 한편 한국 정부는 혁명의 전조를 느끼고 각종 공업지대에 군경을 배치하여 이에 대비했다.

전개

대련 총파업

1918년 12월 10일, 대련 항구 노동자들이 선주와 선박회사에 대항해 총파업을 일으킨다. 이 항구 노동자들은 대한공산당에 속해있지 않았고 또한 동공연에 의해 계획된 총파업은 아니었다. 항구 노동자들이 선박회사의 지나치게 낮은 저임금과 선상에서의 부당대우로 인해 총파업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이 소식이 동공연에게 전해지자 대한공산당은 혁명 개시를 결의하고 산하 노동조합에 전국적인 총파업을 요청한다.
이에 11일 할빈에서 면직물 공장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고 뒤이어 31개 공장 노동자들이 이에 참여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으며 그주 주말인 15일에는 전국 800여개 공장과 500여곳의 농장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한국 정부는 대련 총파업을 우선적으로 진압하려 하였으나 예상치 못하게 거대한 규모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당황했고 결국 할빈, 심양, 대련, 인천, 대구, 원산 6개 도시의 총파업을 집중하여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본보기로 대도시의 총파업을 진압하게 되면 다른 곳의 총파업도 사그라들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총파업 개시 7일후인 19일에는 공산당 산하의 조합이 있었다고 후에 발표한 공장과 농장의 90%인 3300곳의 공장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결행, 한국 국내의 대한공산당 연락부 지휘 아래 적위대를 구성하여 각 도시의 중심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동공연은 평화적인 가두시위를 원칙으로 하되, 군경의 공격이 있을 경우에는 이에 대해 대항할 수단을 갖추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일부 노동자들은 5cm 정도 두께의 철판으로 방패를 만들어 3명씩 들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당 소속의 노동자들만이 파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부당함을 느끼고 파업에 돌입한 곳도 적지 않았으며 전체의 파업의 절반 가량이 공산당 산하의 조합이 아니었다. 오히려 혁명 후기에는 이들이 상황을 주도해나가며 정부와 교섭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시작

이어 일본의 요코하마 항구 노동자들도 파업에 들어갔고 일본 전역에서도 동맹파업이 시작됐다.

영향

한국

혁명은 결과적으로 왕권과 귀족 과두정의 성격이 강하던 정치지형을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시켰으며 제대로된 헌법 조문조차 없던 한국은 16대 국민원 선거 직후 현대적인 입헌군주제 헌법인 ‘민권헌법’을 공포하였다.

혁명을 통해 한국의 좌우익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모두 그 성격이 온건해졌다. 좌파 지식인들은 혁명의 파괴적인 성격을 체감하고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정부와 협상하여 사회 체제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노선으로 전환하였으며 우파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노동자와 일반 대중에 공명하지 못했던 것을 통감하며 보수주의 색채를 벗어나 자유주의적이고 실용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보수주의를 고수하던 입헌당은 이후 성격이 온건해지면서 자유주의 우익 정당이었던 민정당과 합당하여 대한국민당을 출범시킨다.

대한노동자연합과 혁명 세력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선언한 이완용 총리는 이후 입헌당등 국내 보수파에게는 중국과 불온불충한 민권파에게 굴복한 인물로, 진보좌익 세력에게는 자국민 공격을 명령했던 인물로 찍혀 인기를 크게 잃었으며 여러 계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불운한 정치생활을 보내다 1922년 2월 사임한다. 하지만 이완용은 혁명파의 요구를 수용하는 와중에도 정치력을 발휘하여 광종 황제와 국회에 자신의 임기를 최소 1920년 7월까지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황제가 이를 수용하면서 약 9개월간 임기를 더 유지할 수 있게되었다. 15대 총선에서 민정당이 원래 의석의 60% 정도로 떨어졌음에도 사회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송병준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정계를 은퇴한다. 이완용은 1929년 사망할때까지 방랑생활을 했고 결국 오지였던 투바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까지도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좌우파를 떠나 좋지 못한 편이다.

12.10 운동 덕분에 15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보통선거가 도입되었다. 지위고하, 작위 유무, 민족, 성별과 재산 크기에 상관없이 만 17세 이상의 모든 대한국 국민은 국회의원 총선거에 투표할 권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화계 민족과 몽골 민족은 1927년이 되어서야 제대로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두 민족 모두 1910년대~20년대 초중기의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제대로 집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당대한공산당은 한화계는 물론 몽골 민족과 기타 소수민족까지 제대로 투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1920년대 내내 국민 참정권 운동을 벌인 끝에 비로소 온 국민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2.10 운동 이후 모든 제도권 정당은 모든 민족에 상관없이 동등한 대우를 약속했고 이것이 이후 ‘우리는 모두 대한국 국민이다’라는 구호로 유명한 시민국민주의로 발전하면서 태평양 전쟁때 모든 민족이 대일항쟁을 위해 집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또한 중국과 한국은 한국이 산동반도 조차지를 이용하되, 적정한 이용료를 중화민국 난징정부에게 지불하고 베이징 이남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는 조약(빈하이 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 제국주의는 사실상 몽골과 투바, 만주을 얻는 선에서 종료되었다.

12.10을 통해 실력행사를 확인한 노동자들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였고 1950년에는 ‘기업 소유와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주식회사에서 사용자와 노동자가 기업을 공동 소유하게 하였다. 한마디로 자신의 기업의 지분의 절반을 기업 노동조합에 판매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에서는 이사회에 진출 할 수 있게 되었고 기업 운영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서 기업을 보다 민주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중국

혁명 직후 베이징에서는 동공연이 중국내 노동자들과 대한공산당 적위대를 규합하여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동소공)을 건국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 의 뒤를이어 세계에서 두번째인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국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에 대한 편의를 봐주고 빈하이 조약이 체결되어 중화민국과 한국이 동등한 국가가 되어 국권 회복과 중국의 자존심은 어느정도 돌아왔으나 여전히 내부 군벌간의 갈등, 난징 중앙정부와 쑨원의 호법정부가 갈등하면서 중국 정국은 다시 격랑속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또한 한국이 중국 대륙의 직접적인 접수는 포기하였을 뿐이지 중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야심은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동소공의 중국 통일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대중국 정책을 선회한다.
이후 아소공은 쑨원의 호법정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쑨원은 중국 국민당을 창건한다. 이후 국민당은 소련과 한국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육성하고 친호법정부 군벌들의 참여로 1928년 호법정부가 끝내 중화민국 난징정부를 무너뜨리면서 중화민국 정부의 명목상 통일이 완성된다. 그러나 여전히 군웅할거하는 중국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으며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1951년이 되어서야 쑨원의 유지를 받들던 우파 정치인들과 동소공이 합작하여 전국 군벌들을 격파하고 통일정부를 세움으로써 비로소 중화연방이 탄생하게 된다.

의의

논란

혁명이냐 운동이냐

보통 현대의 국민당등 우파 진영에서는 운동이라는 명칭을, 사회당의 후신인 사회민주당이나 대한공산당은 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공산당은 아예 대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역사책에는 ‘12.10 운동 (12.10 혁명)’으로 병기한다.

보통 혁명이라는 명칭을 거부하는 쪽에서는 기성 정치권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혁명으로 볼 수 없으며 그저 부조리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의미에서 운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혁명이라는 명칭에 찬성하는 쪽에서는 혁명파 진영의 주장이 대부분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보통선거가 처음으로 도입되었고 한국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대사건이기에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12.10 혁명은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시켰고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커다란 파급력을 가져왔기 때문에 운동보다는 혁명이라는 표현이 옳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