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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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의 대내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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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교전국
경흥 사건
1865
러시아 제국
압록강 전투
1867
청나라
제주 사건
1874
러시아 제국
한-청 국경분쟁
1872 ~ 1880
청나라
한노전쟁
1894 ~ 1895
러시아 제국
의화단의 난
1899 ~ 1900
의화단
외몽골 정벌
1904
외몽골 독립파
하북 평정
1907 ~ 1908
구국군
교주만 점령전
1914
독일 제국
1차 시베리아 출병
1918
x25px 소비에트 러시아
백군 잔당 토벌
1920
러시아 백군
2차 시베리아 출병
1921
x25px 소비에트 러시아
1차 중국 내전
1927 ~ 1935
중국 군벌
기륭 사건
1933
일본 제국
울릉도 포격 사건
1934
일본 제국
오호츠크 해전
1937
일본 제국
제2차 세계 대전
1938 ~ 1945
아태전쟁
1938 ~ 1945
일본 제국 중화민국 남경정부 필리핀 제2공화국
사군의 난
1947 ~ 1948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1949
네덜란드 영국
월남 토벌
1949
월남 친불 군벌
이란 위기
1953
영국
2차 중국 내전
1954 ~ 1960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화민국 남경정부
인도네시아 전쟁
1961 ~ 1962
인도네시아
몽골 위기
1967
몽골인민해방전선 소련
한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972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소련
믈라카 해협 위기
1975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독립 전쟁
1976 ~ 1981
인도네시아
아시아 태평양 전쟁
Asia-Pacific War
450
기간
1938년 6월 29일 ~ 1945년 8월 10일
장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전역, 동인도양 및 서태평양
원인
대한국 및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의 정치외교적 충돌
교전 세력
연합국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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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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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병력 1,534만명

전차 13,283대
화포 19,028대
항공기 87,310대

병력 912만명

전차 6,231대
화포 24,252문[1]
항공기 49,514대

피해 규모
596,453명 전사

284,231명 부상

398,551명 전사

132,422명 부상

결과
연합군의 승리, 일본 제국의 패망
영향
한국의 아시아 패권 확보 추구
3강 시대 개막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선으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동부 아시아, 서태평양 일대에서 대한국과 미국, 일본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동북아-서태평양 전선과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난징정부가 대치한 중국 전선, 호주가 중심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선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일본제국이 서방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국가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제국이 한국의 영향력을 꺾어버리고 아시아에서 배타적 패권을 행사하려 벌어진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기까지도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 공명하여 많은 서방국가의 식민지인들이 일본제국의 편을 들었으며 1942년경부터 전황이 기울어지고 일본제국의 가혹함을 경험한 식민지인들은 이들에게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한국의 편으로 기울어졌다.

중국 전선은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과 임시적인 동맹을 맺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일본의 약속을 믿고 장제스와 척을 지던 군벌들이 모여 결성한 중화민국 난징정부간에 벌어진 전쟁이었으나 중국 내부에서는 내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배경

전쟁 이전 일본의 상황

소련-일본 불가침조약

1937년 9월 3일 일본 사절단은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 이면에는 일소 양국이 한국을 침공하여 분할할 구상이 숨어있었다. 오호츠크 해전에서 한국이 참패하는 것을 본 소련은 한국이 상당히 약체화되었다고 판단했고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이 오판이라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한국 해군은 분명히 약화되었지만 소련은 그렇게 높지 않은 수준의 첩보을 통해 군사력 전체가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오히려 한국은 소련에 심어둔 스파이들로 소련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소련이 만주를 침공하기 일주일 전부터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전시체제로 전환했으며, 만주와 외몽골 남부에 군대를 빠르게 배치하며 공세를 막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개

한국 전선

1938년 6월 29일 발발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 중국 전선과 더불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투입된 전선이다.
오호츠크 해전의 여파로 전쟁 초기 한국 해군은 사실상 황해를 제외한 다른 해양에서의 활동이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는 해안, 항구수비와 육상 전선을 위주로 전투가 벌어졌으나 1939년 중순부터 일본에 비해 압도적인 한국의 공업력과 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한국쪽으로 전세가 기울었다.
1941년 5월에는 한국이 약 3년만에 조선반도 전역을 수복하였고 이 시기부터 한국은 해군을 재정비하여 일본을 압도하는 속도로 새로운 군함들을 생산했으며,[2] 1941년 중순에는 황해, 동중국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일본을 불안감에 빠뜨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다는 최악, 그러나 차악의 선택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1943년 한국은 대만을 수복하였고,[3] 필리핀을 해방시켜[4] 일본의 인도양 남중국해 함대를 고립시키며 일본의 해군 전력을 두동강 내어버렸으며 일본의 짙어지는 패색에 쐐기를 박는다. 이에 일본 해군은 한국이 촉발시킨 인도양과 남중국해에서의 고립을 막기 위해 필리핀 민도로 해협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고 남중국해 일본 해군 전력은 궤멸된다. 43년 12월 한국은 해남섬을 회복하고 일본 상륙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중국 전선

필리핀 전선

인도차이나 전선

태평양 전선

논란

중국 전선은 아태평양 전쟁의 일부인가?

중화민국 국민정부+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중화민국 난징정부+일본제국이 대치한 중국 전선은 아태평양 전쟁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국제전의 간판을 달았을 뿐인 중국 내부의 내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추축국에게 선전포고하였고 한국의 요구로 승전국으로 인정은 받았으나 정작 서울 강화조약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중국 내전이 여전히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중화민국 난징정부에 참여했던 주요 군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한채 각지방에 할거하고 있었고 전후에도 중국을 통일하려는 국민정부와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1. 수만 본다면 일본군의 포병화력이 압도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 화포들중 30% 정도가 일본 포병 편제의 중심 중 하나였던 소구경 보병포(산포)였다. 즉, 사실 연합군과의 포병 전력은 별로 차이가 크지 않았다.
  2. 이때 생산된 군함들중하나가 현재까지도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했다고 평가받는 함선인 충무공급 항공모함이다.
  3. 더 자세한건 대만 전투 문서를 참고하길 바란다.
  4. 더 자세한건 제2차 필리핀 전투 문서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