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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미국 총선
투표율 88.5% ▼ 3.2%p
선거 결과

자유 182석 (48.5%)
(48.3%) 181석 보수
정당 지역구 비율
자유당 182석 48.5%
보수당 181석 48.3%
중앙당 5석 1.3%
노동자 단결당 2석 0.5%
무소속 5석 1.3%

개요

1876년 치뤄진 미국 서민원 의원 선거. 선거 결과 새뮤얼 틸던 뉴욕주지사[1]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과정

당시 선거 과정은 매우 접전으로 흘러갔다. 자유당 급진파의 여러 혁명적인 입안들은 보수주의자들은 물론 자유당 내 우익 세력들에게서도 반감을 얻고 있었다. 그나마 온건파에 속하는 러더퍼드 헤이스가 1873년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당내 의원중 상당수는 자유당 급진파였고 이들은 율리시스 그랜트, 에이브러햄 링컨 등의 아젠다를 계승하고자 하면서 당 지도부와도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다. 설상 가상으로 자유당 내에서는 부정부패 문제도 불거졌다.

이 틈을 타고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내각을 약속하는 전직 뉴욕 주지사 새뮤얼 틸던을 내세운 보수당은 자유당의 민권법에 반발하는 남부 보수파들의 지지를 얻으며 지지율을 급속도로 올려, 제2차 미영전쟁 이후 최초의 정권 교체를 노렸다.

결과

자유당이 단 한석 차이로 1당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것도 수십여개 선거구에서 보수당과 자유당 후보가 5%p 내외의 초접전을 벌였으며 몇곳에서는 부정선거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당시 미국의 법상 제1당에게 우선적인 내각의 조각권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당은 북부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중앙당과 협상하여 자당의 당수였던 제임스 가필드를 총리 후보로 선출하였다. 총리 후보 지명 투표에서는 찬성 189 대 반대+기권 186표로 단 두 표 차이로 과반을 넘겨 통과되었다.

그러나 보수당의 지지율이 높았던 남부 지역에서는 이 결과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노동자 참정권 인정으로 인해 자유당에게 애시당초 유리한 판이었기에 나온 결과라고 받아들였다. 1876년 12월 20일, 제임스 가필드가 총리로 선출되자 남부 지역의 주요 대도시에서 선거에 반발하는 폭동이 발생, 남부 지역이 일대 무정부 상태에 빠지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총리 선출 이주일 이후인 1877년 1월 3일, 제임스 가필드는 남부의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율리시스 그랜트 총리와 자유당 급진파에 의해 추진되었던 민권법의 개정안들의 강제성을 줄이고 유예 기간을 주기로 하였다. 또한 자신은 총리직에서 전격 사퇴한 후, 보수당의 새뮤얼 틸던을 총리로 내세우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보수당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1월 6일, 임시 투표를 통해 찬성 273표, 반대 94표[2]새뮤얼 틸던이 총리로 선출되고 다음날 황제가 이를 재가하여 새뮤얼 틸던이 총리로 취임하는 전례 없는 이변이 일어났다.

당연히 북부와 진보파의 여론은 받아들여야한다는 여론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으로 양분되었는데, 당시 자유당 내 분란은 너무나도 심각하여 거의 분당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그나마 1880년 미국 총선에서는 급진파와 보수파의 중립에 서있었던 체스터 아서가 당수로 나서 총리로 선출되면서 이러한 갈등은 어찌 어찌 봉합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북부의 진보주의자들의 지지를 잃은 보수파는 체스터 아서의 총리 퇴임 이후 쇠퇴해, 자유당 급진파가 자유당 내 당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담

  • 제퍼슨 데이비스 총리의 실각 이후 오랜만에 보수당 출신으로 성립된 새뮤얼 틸던 내각이었지만, 정작 새뮤얼 틸던은 북부인 뉴욕 주 출신으로 오히려 남부 주들이 반발할만한 법안들을 여럿 통과시켰다. 이 영향으로 다행히 남부의 흑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권은 보수당 내각 하에서도 신장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1880년 미국 총선에서 보수주의자들이 대거 투표를 포기하여 새뮤얼 틸던이 재선에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말았다.

  1. 현재의 뉴욕 프로빈스 지사 직위이다.
  2. 당연히 자유당 급진파의 표가 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