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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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 1949년 2월 2일
이름
공식 명칭 독일어. Zweiter Weltkrieg
이탈리아어. Seconda Guerra Mondiale
일본어. 第二次世界大戦
영어. World War II
중국어. 第二次世界大战
한국어. 제2차 세계대전
정보
날짜 1939년 9월 1일 ~ 1949년 2월 2일
장소 남극을 제외한 전 세계
원인 독일국 폴란드 제2 공화국에 대한 선전포고와 대영제국, 프랑스 제3 공화국의 간섭
결과 추축국의 승리
참전 세력
추축국 연합국
지휘관
추축국의 지휘관 목록 연합국의 지휘관 목록
피해 규모
총합 약 2.1억 명 사망

개요

Wir werden als die größten Staatsmänner aller Zeiten in die Geschichte eingehen oder als ihre größten Verbrecher.
우리는 역대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요제프 괴벨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독일국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발발하여 대독일국, 대이탈리아 제국, 대일본제국, 이베리아 제국, 튀르키예 공화국 5국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이에 미합중국과 대영제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화민국, 프랑스 제3 공화국이 이끄는 연합국이 맞서면서 1949년 소련이 항복할 때까지 총 1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

배경

유럽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지정학적 지도를 근본에서부터 뒤바꿔놓았다. 동맹국이 패배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사라지고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소련이 수립되었다. 한편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루마니아, 그리스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은 영토를 늘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국민 국가들이 등장했다.

미래에 있을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1919년 파리 강화회담 기간에 국제연맹이 수립되었다. 국제 연맹의 목표는 집단안전보장, 육해군 군축, 평화적인 협상과 중재를 통한 국제 분쟁 해결로 무력 분쟁을 막는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한 평화주의적 정서가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시기 유럽 여러 국가에서 민족통일주의 및 보복주의적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 이런 정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에게 부과된 상당한 영토, 식민지, 재정적 손실이 다가오며 독일에 두드러지게 발생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자국 본토 영토의 13%와 모든 식민지를 상실했으며 독일과 타국과의 합병도 금지되었으며 배상금이 부과되었고 독일군의 규모와 전쟁능력도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해체하고 민주정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간기 기간 새 공화국의 지지층과 이를 반대하는 우익 및 좌익 강경 반대파가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협상국의 일원으로 전후 영토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대신 보장했던 여러 약속이 평화 협상에서 전혀 이행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은 내셔널리즘, 전체주의, 계급협조론적 의제를 가지고 대의민주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좌파,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하며 이탈리아를 세계 강대국으로 만들고 "신로마 제국"을 세우겠다는 공격적인 확장주의적 외교정책을 추구하며 이탈리아의 정권을 장악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23년 독일 정부 전복 시도는 실패하였으나 결국 1933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라이히스탁(의회)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독일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인종주의적 배경을 가진 세계 질서의 전환을 부르짖으면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대규모 재무장에 들어갔다. 한편 프랑스는 동맹국을 잡아두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가 전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협정을 맺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두길 원했다. 1935년 초에는 자르 분지 지역이 합법적으로 독일과 병합되고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며 재무장 계획을 가속화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1935년 4월 군사 세계화의 중요한 단계를 밟고 있는 독일을 막기 위해 스트레사 전선을 결성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영국이 독일과 독자적인 해군 협정을 맺어 독일의 제한을 완화시켜 버렸다. 동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하러는 독일을 우려한 소련은 프랑스에게 접근해 상호 원조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조약 발효 직전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국제 연맹의 관료제 체계를 거치도록 요구하면서 본질적인 조약 약속 자체가 무력화되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우려한 미국은 같은 해 8월 중립법을 제정했다.

1936년 3월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주시켜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을 무력화시켰다. 1936년 10월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로마-베를린 추축국을 결성했다. 한달 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에 서명했고 다음 해에는 이탈리아도 방공 협정에 서명했다.

아시아

중국 국민당은 1920년대 중순 다른 군벌들을 상대로 북벌 운동을 전개해 명목상으로는 중국을 통일했으나 뒤이어 중국 공산당 계열 동맹과 새로운 지역 군벌을 상대로 또 다른 내전이 벌어졌다. 1931년에는 점점 군국주의적으로 변하는 일본 제국이 아시아 전 지역을 통치할 권리를 가지기 위한 첫발판으로 오랫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국을 향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공을 벌이고서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중국은 국제 연맹에다가 일본의 만주 침공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일본은 만주 침공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자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 이후 중일 양국은 상하이, 러허 지방, 허베이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다 1933년 탕구 협정으로 휴전을 맺었다. 이후에도 중국 의용군이 만주와 차하르, 쑤이위안에서 일본 제국의 침공에 저항했다. 1936년에는 시안 사건이 일어나자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 전선인 국공 합작 설립에 합의하면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전쟁 전 사건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1935년 10월부터 1936년 5월까지 일어난 짧은 식민전쟁이다. 전쟁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 왕국군이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1936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전역을 점령하고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Africa Orientale Italiana, AOI)라는 식민지로 병합해버리면서 끝났다. 또한 전쟁으로 국제 연맹의 평화 유지력이 취약함이 드러났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양국 모두 국제 연맹 회원국이었지만 이탈리아가 국제연맹 언약 제10조를 위반한 사실이 확실함에도 국제연맹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침공에 대한 제재를 지지했지만 제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의 침공도 막지 못했다. 전후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연방국을 병합하러는 독일의 움직임을 막으러는 입장을 철회하고 오스트리아 병합 시도를 묵인했다.

스페인 내전 (1937년 ~ 1943년)

1937년 7월 17일, 스페인 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스페인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국민파를 지원했다. 이탈리아는 독일보다도 스페인 국민파에게 더 큰 지원을 보냈는데, 무솔리니는 스페인에 7만명 이상의 지상군과 6천명 가량의 항공 병력, 720기의 항공기를 보냈다. 소련은 내전에서 정부군인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했다. 국제여단으로도 알려진 외국인 자원병 3만명 가량도 국민파에 맞서 스페인에서 전투를 치렀다. 독일과 소련 양국 모두 스페인 내전을 자국에서 막 개발된 무기와 전술을 시험하는 일종의 대리전 전장으로 사용했다.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파가 승리했고, 이후 프랑코 정권은 포르투갈 병합 후 이베리아 연방을 성립하며 추축국에 가입한다.

중일전쟁 (1937년 ~ 1946년)

1937년 7월 7일, 제2차 중일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7년 7월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키고 베이징(당시 이름 베이핑)을 점령하면서 일본의 중국 전면 침공전쟁인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소련은 재빨리 군수 지원을 하기 위해 중소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며 이전까지 이루어지던 중독합작은 사실상 끝나버렸다. 9월에서 11월 사이 일본군은 타이위안 지역 작전을 수행하며 신커우 근방의 국민혁명군과 핑싱관 근방의 중국 공산당과 교전했다. 대원수 장제스는 상하이 방어전을 위해 독일제 무기로 장비한 정예사단을 파견했으나 3개월간의 전투 끝에 중국군은 상하이에서 패배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을 계속 밀어붙이면서 1937년 12월에는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함락시켰다. 난징이 함락된 후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중국 민간인과 무장해제된 중국군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1938년 3월에는 국민혁명군이 타이얼좡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뒀지만 5월에는 타이얼좡과 근방의 쉬저우시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1938년 6월에는 중국군이 황하를 범람시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러 시도했고 이를 통해 우한시에서 중국군이 방어선을 갖출 시간을 벌어주긴 했지만, 결국 1938년 10월 우한도 함락된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진격했긴 했지만, 일본의 바람대로 중국의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지 않았으며 오히러 중화민국은 내륙인 충칭시로 수도를 이전하고 끝까지 일본에게 저항하겠다고 천명했다.

소련-일본 국경분쟁

1930년대 중후반 만주국의 일본군은 소련, 몽골과 산발적인 국경 분쟁을 겪었다. 당시 일본 제국의 북방 지역 진출을 강조한 북진론은 일본 제국 육군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1939년 소련군과 벌인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중일전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동맹국인 독일이 소련과의 중립정책으로 선회하면서 북진론이 실현되기 매우 어려워졌다. 1941년 4월 일본과 소련은 중립 조약을 체결했으며 일본은 잠시 북진론을 보류하고, 해군이 지지하는 남방 지역 진출을 강조한 남진론을 받아들여 미국과 서방 연합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유럽 각국의 점령과 조약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점점 공격적인 정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38년 3월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고 다른 유럽 강대국은 역시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던 주데텐란트 지역이 독일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 기조를 따라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뜻과는 정반대로 주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에게 할양하도록 양보했고 대신 독일에게 더 이상의 영토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뒤이어 독일과 이탈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상대로 헝가리에게 추가로 영토를 할양하라고 압박했고 폴란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올지에 지역을 합병했다.

독일이 요구한 모든 사항을 협정을 통해 얻어냈지만, 히틀러는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간섭으로 한 번의 군사작전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지 못한 데 대해 분노했다. 이후 히틀러는 영국과 유대인 '전쟁광'을 공격하는 연설을 발표했고 1939년 1월 비밀리에 영국 해군의 패권에 도전하기 위한 독일 해군의 대대적인 증강계획을 명령했다. 1939년 3월에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잔존영토를 침공하여 독일령인 뵈멘-메렌 보호령과 독일의 종속국인 슬로바키아 제1 공화국으로 분할점령했다. 1939년 3월 20일에는 히틀러가 리투아니아에게 최후 통첩을 전달하여 독일령 메멜란트라고도 불렀던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 지역을 병합했다.

히틀러가 단치히 자유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독립을 보장했다. 1939년 4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고 점령하자 이 독립 보장은 루마니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으로 확대되었다. 폴란드가 프랑스와 영국과 군사 동맹 협정을 체결하자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강철 조약이라는 이름의 동맹 조약을 맺었다. 히틀러는 영국과 폴란드가 독일을 '포위'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1935년 체결된 영국-독일 해군 협정과 1934년 체결된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8월 말에는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향해 계속해서 이동하면서 상황이 전반적인 위기로 치달았다. 8월 23일에는 영국, 프랑스, 소련과의 삼자 군사 동맹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멈춰버리자, 히틀러는 8월 26일 폴란드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지만 영국이 폴란드와 공식적인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이탈리아는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공격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영국이 직접 협상을 요청하자 독일은 폴란드를 향해 요구했고 이는 관계 악화의 빌미만을 주었다. 8월 29일 히틀러는 단치히 반환에 대해 협상하기 위해 폴란드의 특명전권대사에게 베를린으로 즉시 출석할 것을 요구했고 또한 폴란드 회랑에 거주하는 독일 소수민족에게 분리독립에 대한 주민투표를 열 권리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폴란드는 독일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며 8월 30일에서 31일 사이 밤에 리벤트로프는 독일 주재 영국 대사인 네빌 헨더슨과의 회담에서 독일의 요구가 전면 거부당한 상태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전쟁의 경과

유럽의 개전 (1939년 ~ 1949년)

1939년 9월 1일 독일은 침공의 빌미를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위장술책적인 국경 소요 사건을 일으키는 작전을 일으키고 나서 폴란드를 침공했다. 독일군은 베스테르플라테 주둔 폴란드군을 공격하며 제2차 세계대전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의 군사 행동에 영국은 즉시 군사작전을 중단하라는 최후 통첩을 전달했고, 9월 3일 최후 통첩의 응답 기한이 지나자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독일에게 선전포고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치령, 남아프리카 연방, 캐나다도 뒤따라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하지만 가짜 전쟁 기간 연합국은 프랑스의 자를란트를 향한 신중한 공세 외에는 폴란드에게 직접적인 군사 지원을 하지 않았다. 또한 서방 연합국은 독일의 경제와 전쟁능력에 타격을 주기 위해 독일 해역의 해상봉쇄를 시작했다. 독일은 연합국 상선과 군함을 상대로 잠수함전을 명령했고 이는 대서양 전투로 확대되었다.

9월 8일 독일군은 바르샤바 교외에 도달했다. 서쪽에서 폴란드군의 반격으로 독일군의 진격이 며칠 동안 중단되었지만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군을 측면으로 포위했다. 폴란드군 잔당은 바르샤바 방어를 위해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했다. 9월 27일에는 바르샤바 주둔군이 독일군에게 항복했으며 10월 6일에는 폴란드의 마지막 대규모 작전집단이 항복했다. 군사적으로 폴란드는 패배했지만 정부는 항복하진 않았으며 폴란드 공화국 망명정부을 결성하고 점령당한 폴란드 영토에는 폴란드 지하국가라는 비밀저항조직이 결성되었다. 잔존 폴란드군 상당수는 루마니아와 라트비아로 도피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추축국과의 교전에 참여했다.

독일은 폴란드 서부를 합병하고 중부 지역을 점령했으며, 동부 지역에 총독부를 설치했다. 10월 6일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평화를 제안했지만 폴란드의 운명은 독일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제안을 거절했고 히틀러는 즉각 프랑스를 향한 공격을 명령했으나 악천후와 기타 여러 이유로 1940년 봄까지 서부 전선 작전이 연기되었다.

폴란드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후 스탈린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정부에게 군사 침공으로 위협했고 발트 3국을 상대로 국가 내에 소련군 주둔 기지 건설을 명시한 조약 서명을 강요했다. 1939년 10월에는 소련군 정예병들이 발트 3국 각국 내로 이동했다. 핀란드도 비슷한 조약을 서명하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조약 서명을 거부했고 소련의 영토 일부 할양 요구도 거절했다. 결국 소련은 1939년 11월 핀란드를 침공했고 소련은 국제 연맹에서 추방되었다. 소련은 핀란드와 대비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겨울 전쟁 기간 소련군의 진격은 미미했으며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은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서 핀란드가 영토 일부를 할양하며 끝났다.

1940년 6월 소련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3개 국가를 완전 점령했으며 그와 거의 비슷하게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 북부코비나, 헤르차 지역도 점령했다. 1940년 8월에는 제2차 빈 중재를 통해 히틀러가 루마니아의 북트란실바니아 지역을 헝가리에게 할양을 계획했으나 이온 안토네스쿠가 쿠데타 계획을 알려오자 실행하지 않았다. 1940년 9월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불가리아가 루마니아의 남도르부자 지역을 요구했고, 크라이오바 조약을 통해 실제로 할양받는다. 1939년에만 루마니아가 자국 영토의 1/3 가까이를 잃으면서 국왕 카롤 2세에 대항한 쿠데타가 일어나 이온 안토네스쿠 원수 휘하의 파시스트 독재정이 되어 독일의 안전보장을 받으며 확고한 친 추축국 방향으로 전환했다. 한편 폴란드 점령으로 인한 독일과 소련간 관계 회복과 경제 협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양국은 전쟁 준비를 서서히 시작했다.

서유럽 전선 (1940년 ~ 1941년)

1940년 4월, 독일은 스웨덴에서 연합국으로 수출되는 철광석을 차단하기 위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덴마크는 전쟁 발발 수 시간만에 항복했고 노르웨이 또한 연합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2달 정도 버티다가 항복했다. 노르웨이 전역 상황이 연합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영국 내 여론이 악화되어 1940년 5월 10일 네빌 체임벌린이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차기 총리로 윈스턴 처칠이 자리에 올랐다.

위와 같은 날에 독일은 프랑스를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독불 국경의 요새선인 마지노선을 우회하기 위해 독일은 중립국이었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공했다. 독일군은 아르덴 지역에서 측면 기동전을 펼쳤는데 당시 연합국은 아르덴 지역을 장갑차가 돌파할 수 없는 자연 방벽인 환경이라고 오판했다. 새로운 전술인 전격전에 성공한 독일 국방군은 해협을 향해 빠르게 진격하여 벨기에의 연합군을 포위하고 릴 인근의 벨기에-프랑스 국경지대에 연합군 대부분을 가둬놓았다. 영국군은 6월 초까지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2/3 가까이되는 병력과 군사 장비들을 잃으며 본토에 도착했지만 영국군으로 잠입한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폭탄 테러로 모든 철수 병력을 잃으며 작전은 실패한다.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가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하며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 작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약화된 프랑스군을 향해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6월 14일에는 파리가 함락되었다. 8일 후인 6월 22일에는 프랑스가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휴전 협정으로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스 영토 일부를 점령했고 점령되지 않은 잔존지역에서는 친위대 제33 무장척탄병사단 "샤를마뉴"를 주축으로 괴뢰국 프랑스 군정청 이후 프랑스 SS국이 설립되었다.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거대한 해군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7월 3일 영국군이 독일군의 프랑스 함대 노획을 막기 위해 메르스엘케비르의 프랑스 함대를 타격해 붕괴시켰다.

7월 초에는 루프트바페가 선박과 항구를 공격하기 시작하며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히틀러의 평화 제의를 거부했고 8월부터는 독일 공군의 항공 우세 장악 작전이 시작되었고 독일의 지원을 받은 아일랜드 공화국군과 스코틀랜드 자유군이 영국 왕립공군 전투기사령부를 습격하며 독일군의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이 시작되었다. 7월 말에 도버 상륙을 시작으로 영국 남부에 수십만의 독일군이 침공하며 영국 본토전이 시작되었다.

새로 얻은 프랑스의 항구를 이용하여 독일 해군은 유보트를 이용해 대서양 해양에서 영국 함선을 공격하며 지나치게 늘어진 영국 왕립해군을 상대로 연속적인 승전을 거두며 대서양 전체를 손에 넣었다.

1939년 11월 미국은 중국과 서방 연합국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미 중립법을 개정해 연합국에게 캐시앤캐리라는 일종의 무기 판매 제도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40년에는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자 미국 해군의 규모가 매우 크게 늘어났다. 9월에는 미국과 영국이 구축함과 해군기지를 교환하는 협정에 합의했다. 하지만 미국 대중의 대다수는 1941년까지 전쟁에 직접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취하는 데에 계속해서 반대했다. 1940년 12월 루즈벨트는 히틀러가 세계정복을 계획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어떠한 협상도 의미가 없으며, 미국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되겠다고 선언하고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 대여 계획인 무기대여법을 홍보했다. 미국은 독일의 전면적인 공세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1940년 9월 말에는 삼국 동맹 조약을 맺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이 추축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었다. 삼국 동맹 조약에서는 소련을 제외하고 어떤 국가라도 추축국을 공격할 경우 세 국가가 자동으로 참전한다는 조항이 끼어 있었다. 1940년 11월에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이베리아 제국이 추축국에 가입하며 확대되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독일의 영국 점령 후 주둔 병력을 지원하고, 나중에 소련과의 전쟁에서 추축국 내에서도 여러 기여를 했으며, 특히 루마니아는 소련이 병합한 영토 일부를 스스로 되찾기도 했다.

지중해 전역 (1940년 ~ 1941년)

이탈리아에서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집권한 1940년 6월 초에는 이탈리아 공군이 영국의 보호령인 영국령 몰타를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늦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이탈리아는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정복하고 영국령 이집트를 침공했다. 10월에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고 군정청을 설치했다. 독일은 영국군이 발칸반도에 거점을 마련하여 루마니아의 유전에 잠재적인 위협을 가하는 일을 막고 영국의 지중해 지배권에 대항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돕고 발칸반도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1940년 12월 영국군은 이집트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이탈리아군을 향한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공세는 실패적으로 끝나 일대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탈리아 왕국 해군도 잇다라 패배를 겪었는데 영국 해군이 타란토항에서 항공모함 공습을 통해 이탈리아 전함 3척을 격파했고 마타판곶 해전에서도 수 척의 전투함을 격침시켰다. 동시 이베리아군은 지브롤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지중해에 있는 연합군 함대를 봉쇄하는데에 성공했다.

이탈리아군의 승리 후 독일은 북아프리카로 원정 지원군을 파견하였으며, 1941년 3월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공세를 개시하여 영연방군 잔당을 섬멸했다. 1달도 되지 않아 추축군은 이집트의 국왕 파루크 2세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이집트는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1941년 3월 말에는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가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는 이틀 후 친영 민족주의자의 쿠데타로 정권이 무너졌다. 독일은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고 한달도 되지 않아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5월 말에는 그리스의 크레타섬에 공수부대 침투가 끝나며 추축국의 발칸반도 정복이 완료되었다. 추축국은 빠르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점령에 대항하는 격렬하고 거대한 파르티잔 전쟁이 발발했고, 유고슬라비아 유격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4월 말에는 튀르키예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추축국으로 참전했다. SS 프랑스가 통치하고 있는 시리아는 튀르키예에게 할양되었고, 5월에 이라크의 반영 봉기를 지원하며 이라크 민정청을 설립했다. 6월에서 7월 사이에 이탈리아와 튀르키예가 합의해 튀르키예령 레바논과 이탈리아 점령 레반트 지역을 양국이 공동 통치하는 레반트 총독부를 설치했다.

추축국의 소련 침공 (1941년)

유럽과 아시아의 정세가 비교적 안정화된 가운데, 독일, 일본, 소련은 새로운 전쟁을 준비했다. 소련은 독일과의 긴장 고조를 경계하고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자원이 풍부한 유럽 식민지를 점령해 유럽 전쟁에 이용하려는 계획으로 1941년 4월 일본과 소련 양국은 소련-일본 중립 조약에 서명했다. 이와는 반대로 독일은 소련 국경지대에 병력을 집중하면서 소련 공격 준비를 꾸준히 진행했다.

1940년 7월 31일 히틀러는 소련을 말살하기로 결정하고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벨로루시 정복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리벤트로프와 같은 독일 고위 관료들은 소련을 삼국 동맹 조약에 초청해 미국에게 대항하는 거대한 유라시아 블록체를 만들 기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1940년 11월에는 소련의 추축국 가입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협상 회담이 진행되었다. 소련은 약간의 관심을 보였으나 핀란드, 불가리아, 터키, 일본 지역의 영향권 양보를 요구했고 독일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40년 12월 18일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1941년 2월, 친위대 지도자 요아힘 안델란케가 바르바로사 작전의 돌파점을 비판하며 보완역으로 브레멘스테판 작전을 제안했고, 영국의 완전 항복 후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이탈리아, 루마니아의 지지를 받아 소련이 독일을 향한 전쟁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며 바르바로사 작전과 브레멘스테판 작전(B-B작전)이 동시에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했다. 직후 핀란드와 헝가리가 소련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이 기습 공세의 초기 목표는 발트 지방, 모스크바, 우크라이나이며 궁극적인 전략적 목표는 카스피해에서 백해에 이르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A-A선)을 장악해 1941년 전역을 끝내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목표는 군사강국인 소련을 제거하고 공산주의를 말살하며 구소련 지역의 원주민을 추방해 레벤스라움을 수립하고 독일의 나머지 경쟁국을 물리치는데 필요한 전략자원의 접근을 보장하는 방안이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전쟁 이전 전략적인 반격 작전을 계획했으나 B-B 작전으로 독일이 선수를 쳐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전략적 방어를 채택해야만 했다. 여름 내내 추축군은 소련 영토 내로 많이 진격했으며, 인력과 물자 양쪽 모두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하지만 8월 중순까지 독일 육군최고사령부는 공세 여력이 고갈되었던 중부 집단군의 공세를 중단시켰으며 제2기갑군을 쪼개 우크라이나 중부와 레닌그라드로 진격하는 병력에 보강시켰다. 키예프 공세에서 독일군은 소련군 4개 군을 포위하고 제거하는 등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며 크림반도와 산업단지가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를 향한 진격로가 열렸다.

추축군 육군 병력의 3/4과 공군 대다수가 프랑스와 지중해 전역에서 동부 전선으로 전부 이동하면서 8월 말에는 소련이 페르시아 회랑과 이란의 유전지대를 확보하고 추축국이 이란을 통해 바쿠 유전이나 인도로 향하는 진격로를 확보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중립국인 이란을 침공했다.

10월까지 우크라이나와 발트 지역에서 추축군의 작전 목표는 달성되었으며 레닌그라드와 세바스토폴 그리고 모스크바 또한 확보되었다. 점점 더 혹독해지는 날씨 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독일군은 공세를 중단했고, 1942년 3월까지 휴전기가 이어졌고 주요 도시를 모두 장악한 독일군은 방어에 주력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1941년 ~ 1945년)

1931년 일본의 위장술책 작전인 류탸오후 사건, 1937년 일본의 미국 군함 USS 피나이 포격 사건, 1937-1938년 난징 대학살 사건 등으로 미일관계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1939년 미국은 일본과 무역 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일본의 팽창주의에 반대하는 미국 내 여론으로 미국의 대일 화학 물질, 광물, 군사 부품 수출을 금지하고 일본 정권을 향한 경제적 압력을 강화하는 수출통제법을 통과하며 경제제재로 이어졌다. 1939년 일본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중국의 도시인 창사에 대한 첫 공격을 시작했지만 9월 말에는 중국군에게 격퇴당했다. 중일 양측은 여러 공세작전을 펼쳤지만 1940년까지 중일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보급로를 차단하여 중국을 향한 압력을 높이고 서구 열강과의 전쟁 시 일본의 입지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은 1940년 9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했다.

중국 국민당은 1940년 초 대규모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8월에는 중국공산당이 화중 지역 공세를 시작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공산당의 인적, 물적 자원을 줄이기 위해 점령 지역에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 지속적인 반감도 생겨나 1941년 1월 신사군 사건이라는 무력충돌 사건을 통해 합작이 사실상 결렬되었다. 1941년 3월에는 일본 제11군이 국민혁명군 제19군 사령부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역시 중국군에게 격퇴당했다. 9월에는 다시 창사를 공격했으나 국민당에게 격퇴당했다.

유럽에서 독일이 승전하자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정부에 대한 압력을 높였다. 네덜란드의 항복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채취되는 석유를 일부 공급하기로 동의했지만 나머지 자원에 대한 추가 접근권 협상은 1941년 6월 결렬로 끝났다. 1941년 7월 일본은 인도차이나반도 남부로 진격해서 영국 극동 영토와 네덜란드 영토를 위협했다.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금수 조치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일본은 소련 극동 영토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서부에서 일어난 독일의 소련 침공을 이용하러 했지만 자원 재제 이후 작전을 포기했다.

1941년 초부터 미일 양국 정부는 긴장된 관계를 해소하고 중국의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에서 일본은 여러 제안을 제시했으나 미국은 일본의 팽창주의가 유지되는 제안이라 보고 이를 일축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필리핀 자치령(1946년 독립 예정이었음)의 방위를 강화하고 미국 정부는 일본에게 "이웃국가"를 공격할 경우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협상은 진전이 전혀 없고 동시에 독일이 1945년 미국에대한 본토 침공 양동작전을 제시하자 쇼와 천황(히로히토)은 일본의 승리 기회에 대해 동의하고선 독일과의 협력을 지지했다. 11월 3일,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히로히토에게 선행될 진주만 공격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11월 5일에는 히로히토가 어전회의에서 대미 전쟁 계획을 승인했다. 11월 20일 일본에 새로 수립된 전시 내각은 독일과의 합동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장기적 전시 경제 체제와 동원령을 선포했다.

일본은 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점령하여 중앙태평양을 향한 대규모 방어 교두보를 만들 계획을 가졌다. 그 다음 일본은 총력을 태평양과 미대륙으로 집중해 독일군과 타격해 미국의 태평양에 대한 패권을 무력화하며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자유롭게 이용할 계획을 가졌다. 교두보를 확보하는 동안 미국의 간섭을 막기 위해 미국 태평양 함대와 필리핀 주둔 미군을 처음부터 무력화할 계획을 세웠다. 1944년 12월 7일(아시아 시간 기준 12월 8일 새벽)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중앙태평양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며 식민지들과 미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진주만에 주둔한 미국 함대, 필리핀 주둔 미군 공격과 괌섬, 웨이크섬, 영국령 말레이, 홍콩 등이 있었다.

일본이 공격한 다른 국가인 미국,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여러 국가가 공식적으로 일본에게 선전포고했지만 소련은 유럽의 추축국과는 전쟁을 계속하면서 일본과의 중립 협정은 계속 유지했다. 독일과 기타 추축국은 1945년 1월에 미국에게 선전포고하면서 루즈벨트가 명령한 독일 군함을 향한 미군의 공격을 비난했다.

태평양의 상황 (1944년 ~ )

1945년 4월 말까지 일본은 버마,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싱가포르, 라바울을 거의 다 정복하여 연합국에게 큰 손실을 입히고 수많은 포로를 얻어냈다. 필리핀에서는 필리핀군과 미군이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1945년 5월 필리핀 자치령이 점령되어 필리핀 정부는 망명했다. 4월 16일 버마에서는 예난차웅 전투 도중 7천명의 영국 망명군이 일본 제33사단에게 포위당했다가 중국군 제38사단에게 구출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남중국해, 자바해, 인도양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오스트레일리아 다윈의 연합군 해군기지를 폭격했다.

1945년 5월 초엔 일본군이 수륙 양용 작전을 통해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여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의 통신과 보급선을 끊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침공 계획은 두 척의 미국 항모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 테스크포스 함대가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과 무승부를 얻어내며 막히게 되었다. 일본은 다음 계획으로 둘리틀 공습으로 자극받아 미드웨이 환초를 점령하고 미군 항공모함을 전투로 유인하여 제거하는 작전을 짰고, 여기에 미국 알래스카주의 알류샨 열도도 점령하여 군대를 파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5월 중순에는 일본은 중국의 공군 기지를 파괴하고 중국 제23군단과 제32군단과 교전하여 둘리틀 공습에서 살아남은 미 공군을 도운 중국인들에게 보복을 가할 목적으로 저장-장시 전역 작전을 시작했다.

미드웨이와 대서양에서 양방향으로 해전을 치르고 있던 미국은 동시에 영국의 항복 후 정보 공작 활동을 시작한 퀘벡 독립 조직과도 교전해야 했다. 7월에 추축국에 참전한 베네수엘라, 페루, 아르헨티나 연합군이 파나마를 점령했고 코스타리카와 멕시코는 중립을 선언했다. 남미에 전력이 과하게 분산된 태평양 함대는 7월 태평양의 대부분 섬과 전력적 우위를 잃게 된다. 9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친독 성향 극단주의 청년이 핵 폭탄 패키지를 이용한 자살 테러를 하면서 미합중국의 대통령 루스벨트를 비롯한 최고위 수뇌부가 괴멸된다. 9월 말, 일본군 제22군과 제33군이 서부에 상륙했고 10월에는 대서양 해전에서도 패퇴하며 동부에 독일-이베리아 연합군이 상륙했다.

동부 전선의 상황 (1942년)

상당한 손실을 입긴 했지만 1942년 초 독일군과 추축군은 러시아 중부와 남부에서 몰려오는 소련군의 주공세를 막아내 전년도에 얻었던 대부분의 영토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5월에는 독일군이 공세를 재개하며 코카서스 유전을 장악하고 쿠반 스텝지역을 점령한다는 작전인 청색 작전을 개시하는 한편 중부와 북부 지역은 현 진지를 유지했다. 독일군은 남부 집단군을 돈강 하류로 진격해 동남쪽의 캅카스를 공격하는 A 집단군과 볼가강으로 향하는 B 집단군 둘로 나눴다, 소련은 볼가강에 있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11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격렬한 시가전을 치르며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했다. 소련은 두 번째로 동계 반격작전을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현지 친독일 성향 민병대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1943년 2월까지 독일군은 매우 큰 규모의 손실을 입었고 이후의 동부전선의 주력 병력은 친독일 민병대와 소련내 반역군으로 일부 대체되었다.

서유럽과 대서양, 지중해의 상황 (1942년 ~ )

독일군은 미군 해군사령부의 잘못된 결정을 이용해 미국 대서양 연안의 연합군 선박을 족족 격침했다. 한편 1941년 11월 프랑스와 영국의 항복 후 이탈리아와 아나톨리아, 이베리아군은 북아프리카에서 공세를 시작해 아프리카 전역을 점령해 확보하는데에 성공했고 추축국에 의해 완전히 식민화 되었다.

연합국의 붕괴, 추축국의 승리 (1945년 ~ 1949년)

1945년 대서양에서 해병대의 괴멸과 함께 시작된 미국에서 본토전은 점점 더 많은 추축군이 상륙해오고 있었고 캐나다는 퀘벡 독립 세력과 내전에 빠졌다. 1949년 1월에는 소련군 최후의 방어선인 카잔이 돌파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을 제외한 소련 시베리아 정부가 독일에게 항복하면서 동부 전선이 종료되었다. 1월 말 미국은 워싱턴 D.C가 독일군에게 함락되자 종전 조약 체결을 수락했다.

참고

비고(Obsidian)

외부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