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함 소류 망명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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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질서의 황혼}}
<big><big><big>'''潜水艦蒼龍亡命事件'''</big></big></big><br><big><big>'''a submarine soru asylum case'''</big></big>


{{목차}}
== 개요 ==
{{인용문3|조국과 천황 폐하를 배신한 역적 타츠야를 돌려받아 심판해야 합니다..<br>祖国と天皇陛下を裏切った逆賊竜谷を返してもらって審判しなければならないです! <br/><small>- NHK 라디오의 긴급 보도</small>}}
1954년(쇼와 29년) 7월 17일, 당시 [[얄류샨 열도]] 애투 섬에 주둔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 북방편대 소속 잠수함 소류(蒼龍)가 당시 22세의 해군 상병 [[타츠야 카츠키]](竜谷勝樹, 1932 ~)에 의해 탈취되어 미국 영역인 알래스카로 망명한 사건.
이 사건은 "대동아공영"과 협화를 내세우던 [[일본 (신질서의 황혼)|일본]]의 권위에 엄청난 스크래치를 낸 사건이었으며 일본이 노발대발하며 잠수함과 해당 상병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양국간의 외교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 배경 ==
아래 내용은 소류 망명 사건 이후 검찰이 연합함대와 공조하여 결론낸 사건 동기 수사결과이다.
타츠야 카츠키가 일본 정부에 대해 앙심을 품었던 계기는 그의 형 때문이었다. 1927년생인 형 [[타츠야 노보루]](竜谷 昇)는 1946년에 주오대학에 진학했으나 1947년 "불온사상"(공산주의)를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에 걸려 체포 및 제적당하게 되었다.
당시 가정환경이 좋지 않던 와중에도 힘을 써 대학을 진학했음에도 한순간에 제적당하고 형무소에 수감되자 가세는 크게 기울었다. 이러한 판국에서 타츠야는 돈이 없어 대학의 꿈을 접고 신문 배달 등을 전전하다가 20세가 된 1952년에 입영통지서(아카가미)를 받게 되었다.
이미 제국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군에 입대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더욱 격분하였으나, 일단 병역을 기피할수 없어 1952년 6월에 해군으로 입대하게 되었다.<ref>이때 굳이 왜 해군으로 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애초부터 미국 망명을 기획하고 태평양에 있는 해군을 택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그리 설득력있지는 않다. 소류 사건까지는 약 2년의 텀이 있었기 때문.</ref>
그가 배정된 보직은 잠수함이었고 자대는 얄류샨 열도로 배치되었다. 처음 왔을때부터 소류를 탔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예나 지금이나 부조리가 심하기로 유명한 조직이었고, 민주화 이전인 당시에는 더욱 그랬다. 거기다 타츠야는 형이 공산주의자라서 적성 병사로 잠정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료 장병들의 괴롭힘과 장교들의 방관이 겹쳐 매우 힘든 군 생활을 했다.
1953년 6월에 일등병으로 진급했으나, 오히려 새로 들어오는 이등병들에게 기수열외를 당하며 무시받고 아예 대접을 못받는데다, 선임들과 동기에 의한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이에 격분한 타츠야는 사회에 나가도 일본에서 공산주의자 꼬리표에 멸시만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며 1953년 말 경에 미국의 알래스카로 망명할 계획을 꾸미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 전개 ==
부대 내에서 기본적인 영어를 습득하고, 타츠야는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1954년 6월, 입대 2년에 상병으로 진급하게 됨에 따라 그는 잠수함 조타석에 접근할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카토(加藤) 중좌와 친분을 쌓았는데, 카토에게 이야기하여 소류의 점검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1954년 7월 17일 늦은 새벽 3시 23분에, 상부로부터 잠수함 점검을 명령받았다는 핑계로 자신이 평소 타는 잠수함인 소류호에 탑승하려 했으며, 당시 초병이던 사와무라 한니치(沢村半日) 이병은 타츠야가 상병이었던 데다 부대 내에서 성가시고 성격이 좋지 못하다는 평이 있었던지라 명령을 받았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들여보냈다.
이내 소류에 탑승한 그는 당장 조타석으로 향했으며, 최대 속도를 내면서 군항을 빠져나갔다. 사와무라 이병이 소류가 군항을 이탈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건 3시 29분경이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타츠야가 탈영 중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향을 돌려 복귀하라고 무전을 보냈다. 그러나 약 2분이 지난 3시 31분까지도 소류가 이를 무시하고 전진하자, 그제서야 사와무라 이병은 경악한 채 상황을 인지하고 직속상관 하야시(林) 소좌에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3시 33분에 전 부대에 탈영 상황이 통보되고, 부대원들은 긴급 기상하여 소류를 추격할 준비를 하는 한편 3시 35분 초병들이 어뢰를 구비한 채 군함을 타고 소류를 추격하기 위하여 선출발했다. 이들은 3시 37분, 소류가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 교전을 허용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3시 40분, 얄류샨 열도에 주둔한 전 일본군에게 탈영 상황이 전달되었다. 또한 이 시각, 연합함대 북방편대 제5군(애투섬 주둔) 사령부는 소류를 레이더 추적하고, 소류의 항해 방향이 동쪽이므로 미국 영해로 도주하려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35분에 선제 발진한 추격대가 출격한 것도 소류 이탈로부터 약 12분이 지나서 이루어진 조치였으며, 또한 제5군 전원이 추격 준비를 마친건 47분이었다.
그러는 동안 3시 44분, 타츠야는 소류를 몰고 일본 영해를 빠져나와 공해까지 나왔다. 당시 선발 추격대가 소류를 따라오고 있었으나 소류는 그날 연료가 꽉 차있는 상황이었기에 계속해서 최고 시속으로 항해가 가능해 선발 추격대는 좀처럼 소류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리고 49분에 뒤이어 제5군 전원이 무장한 추격대 본대가 출발하였고, 51분 대본영에도 보고가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그 시점, 타츠야는 미국 영해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다급해진 5군은 전투기를 출격시키려 했으나, 대본영은 미국 공역을 침범하고 전투로 번질 수 있으니 전투기 출격은 보류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대본영과 5군이 논쟁하는 동안, 선발추격대와 추격대 본대 모두 소류를 전혀 따라잡지 못하였고, 4시 4분 대본영은 소류가 미국 영해 1km 앞까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전투기 출격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4시 7분, 끝내 '''소류는 유유히 미국 영해로 사라졌다.''' 이제 얄류샨 열도의 병사와 지휘관들은 거대한 국제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 반응 ==
=== 미국 ===
알래스카 해안에 주둔 중이던 미군은 4시 9분 일본 잠수함이 영해 내로 진입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일본측의 도발로판단하고 경계 태세를 발령하였다. 당시 미국의 레이더망에 일본 영해 측의 군함들이 소류 추격을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까지 겹쳐 이것이 일본의 도발 또는 공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미군은 소류를 향해 일본어로 무전을 보내 더이상 접근하지 말고 일본 영해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타츠야는 곧바로 다시 무전, 미국 측에 귀순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보냈다. 현장에서는 이 소식을 듣자 USS 잭슨빌을 필두로 소류를 확보하기 위한 편대를 출격시키는 한편, 타츠야에게는 무전을 다시 보내 미군이 출발했으므로 미군이 도착하면 순응하라고 타전했다.
=== 일본 ===
== 미일 외교갈등 ==
== 결과와 영향 ==
== 후일담: 타츠야의 이후 ==
[[분류:신질서의 황혼]][[분류:쇼와 시대]][[분류:1954년]]

2024년 5월 30일 (목) 16:01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