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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는 한국어지만 실제로는 베트남어가 가장 많이 쓰이며, 수백명 가량의 프랑스계 주민들도 있어 프랑스어도 쓰인다. 그럼에도 주민 대다수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
공용어는 한국어지만 실제로는 베트남어가 가장 많이 쓰이며, 수백명 가량의 프랑스계 주민들도 있어 프랑스어도 쓰인다. 그럼에도 주민 대다수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가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 역사 =
= 역사 =

2021년 7월 27일 (화) 15:14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해외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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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따우
浲艚 | Vũng Tàu
깃발 휘장
바람을 맞이하는 곳
Mũi Nghinh Phong
면적
141.1km2
인문환경
국가 대한국
공용어 한국어, 베트남어, 프랑스어
인구 646,584명
인구밀도 4582.45명/km2
인구 구성 베트남계 57.2%, 한국계 41.4%, 프랑스계 0.2%, 기타 1.2%
정치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 산하의 해외영토, 의원내각제, 단원제
국가원수 대한국 황제 선덕제
총독 임계순
수석장관 뜨란딘빈
경제
명목 GDP 전체 66억 5070만$(2020)
1인당 102,859$
GDP (PPP) 전체 47억 3526만$(2020)
1인당 73,235$
화폐 붕따우 동(VTD, ₫)
ISO 3166-1
VT
ccTLD
.vt
시간대
UTC+7

개요

베트남 동남부 남중국해 연안에 위치한 대한국의 해외영토. 별명은 동양의 지브롤터.

베트남 바리어성의 바리어시와 접하고 있으며 크게 붕따우, 롱손, 고깡, 프억꺼 네개의 하중도로 이루어졌다.

공용어는 한국어지만 실제로는 베트남어가 가장 많이 쓰이며, 수백명 가량의 프랑스계 주민들도 있어 프랑스어도 쓰인다. 그럼에도 주민 대다수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

역사

16세기까지 붕따우 근방은 유럽의 무역선들이 정기적으로 정박하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정박지’라는 뜻의 붕따우가 지명으로 굳혀진 것이다. 이곳을 드나들던 포르투갈 상인들은 상자크(São Jacques)라고 이름 붙였고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에는 생자끄라고 불리며 그대로 유지된다.

1895년 2월 10일 이곳에 위치한 프억땅 요새(Phước Thắng)에서 응우옌왕조 군대가 프랑스 함선에 포격을 가했고 이 사건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프랑스 통치 시대를 지나면서 단순한 정박지에 불과하던 붕따우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특유의 좋은 기후와 자연환경으로 프랑스계 지배층들의 별장 단지도 들어선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전후인 1946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측과 싸우고 있던 프랑스를 한국이 압박하며 제네바 합의를 통해 프랑스를 물리쳤고 베트남 내의 반공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그리고 친프랑스 세력을 한국이 중재하는 과정에서 1949년 베트남 임시정부 부주석이었던 응오딘지엠이 사이공과 붕따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군벌 조직인 빙쑤옌을 비롯한 여러 친프 세력을 한국이 토벌해주는 조건으로 붕따우를 한국에 넘겼다. 다만 그냥 넘겨준 것은 아니고 한국에게 사이공을 비롯한 남부 개발을 위한 막대한 지원과 응오딘지엠 본인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52년 한국과 제네바 합의 관련국들의 참관 아래 베트남 총선거가 치러졌다. 예상대로 베트남 노동당의 압승이었지만 응오딘지엠과의 약속이 있었던 한국은 신정권의 과격한 수단을 통한 개혁을 지적하며 응오딘지엠과의 연립정부 수립을 종용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지도자로서는 함량미달인 인물이었고 한국은 베트남 노동당 정권에게서 붕따우 영유권만 인정받고 베트남 내정으로부터 직접적 개입을 잠정적으로 그만둔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 노동당 정권하에서 탄압받던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반공 정치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며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홍콩의 구룡성채 못지않은 데규모의 빈민촌이 지어졌다. 이 문제는 한국이 다시 베트남 내정에 개입하게되는 명분이 되었고 남부 반공 세력에게 막대한 지원을 하며 1960년 총선에서 베트남 노동당과 반공 연대가 균형을 이루고 한국이 호치민에게 해상봉쇄 압박까지 넣고 나서야 완화되었다. 한편 붕따우 정부는 거주 자격을 상향시켜 여러 이민자들을 다시 베트남으로 송환시켰다.

1975년에는 붕따우 정부는 붕따우에서 석유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 사실은 1950년대 초반부터 한국 정부에서 이미 알고있었지만 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은폐하고 있었던 것. 아무튼 석유 덕분에 붕따우의 경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사이공등 베트남의 주위 대도시들의 경제도 함께 발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