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14번째 줄: 14번째 줄:
사와리섬에 도착한 김항정은 [[삼별초의 항쟁]] 동안 쌓인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호족들을 빠르게 제압했고, 이내 그들로부터 [[오비카누키]](オビカヌキ)<ref>[[후마벤]]으로 대왕(大王)을 의미하며, '카누키'(カヌキ)는 당시 사와리섬의 호족들을 지칭했다. 어원은 [[가야]]에서 군주를 부르던 호칭인 [[한기]](旱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ref>로 추대되었다. 사와리섬을 장악한 김항정은 이곳을 새로운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삼으려했으나, 1273년 [[탐라]]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그는 고려에 항복하는 대신 [[가마쿠라 막부]]와 접촉하는 길을 택했다. 이에 이듬해 막부의 대외창구인 [[다자이후]]에 사절을 보내 귀부를 청했고, 당시 막부를 통치하던 [[싯켄]]<ref>執権, [[쇼군]]을 대신해 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던 직책으로 막부의 중심기관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를 장악하면서 실권을 차지했다.</ref> [[호조 도키무네]]는 [[원나라]]와 고려의 침략 위협 속에서 김항정의 사절을 환대하고 [[조정]]을 통해 그에게 [[우지]]인 '스이'(須伊)<ref>김항정의 성인 金의 초기 [[중세 한국어]] 발음인 'swoy'(쇠)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ref>와 [[가바네]] '아손'(朝臣)을 하사하고 자신의 이름인 '도키'(時)를 배령한 뒤,<ref>주군이 가신에게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하는 행위를 [[헨키]](偏諱, 편휘)라고 하며, 주로 주군과 가신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의도로 행해졌다.</ref> [[사와리국]]의 [[슈고]]로 임명하였다.
사와리섬에 도착한 김항정은 [[삼별초의 항쟁]] 동안 쌓인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호족들을 빠르게 제압했고, 이내 그들로부터 [[오비카누키]](オビカヌキ)<ref>[[후마벤]]으로 대왕(大王)을 의미하며, '카누키'(カヌキ)는 당시 사와리섬의 호족들을 지칭했다. 어원은 [[가야]]에서 군주를 부르던 호칭인 [[한기]](旱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ref>로 추대되었다. 사와리섬을 장악한 김항정은 이곳을 새로운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삼으려했으나, 1273년 [[탐라]]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그는 고려에 항복하는 대신 [[가마쿠라 막부]]와 접촉하는 길을 택했다. 이에 이듬해 막부의 대외창구인 [[다자이후]]에 사절을 보내 귀부를 청했고, 당시 막부를 통치하던 [[싯켄]]<ref>執権, [[쇼군]]을 대신해 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던 직책으로 막부의 중심기관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를 장악하면서 실권을 차지했다.</ref> [[호조 도키무네]]는 [[원나라]]와 고려의 침략 위협 속에서 김항정의 사절을 환대하고 [[조정]]을 통해 그에게 [[우지]]인 '스이'(須伊)<ref>김항정의 성인 金의 초기 [[중세 한국어]] 발음인 'swoy'(쇠)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ref>와 [[가바네]] '아손'(朝臣)을 하사하고 자신의 이름인 '도키'(時)를 배령한 뒤,<ref>주군이 가신에게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하는 행위를 [[헨키]](偏諱, 편휘)라고 하며, 주로 주군과 가신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의도로 행해졌다.</ref> [[사와리국]]의 [[슈고]]로 임명하였다.


그 뒤, 김항정은 [[소노가향]](素能我郷) 인근에 저택을 지었고, 그곳의 지명을 묘지(苗字)로 사용함으로서 소노가씨를 개창하였다.
그 뒤, 김항정은 [[소노가향]](素能我郷) 인근에 저택을 지었고, 그곳의 지명을 묘지(苗字)로 사용함으로서 소노가씨가 되었다.
 
=== 자립과 왕조 개창 ===
[[사와리국]]은 형식적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노가씨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이라는 군사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협력하였으나 원나라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호조 도키무네 사후 [[가마쿠라 대지진]]<ref>'에이닌의 간토지진'(永仁の関東地震)이라고도 부르며 1293년 [[간토|간토 지방]] 남부에서 일어났다. 규모는 M8.0으로 추정되며 수만 명이 사망하는 등 가마쿠라 막부 붕괴에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ref>을 비롯해 [[헤이젠몬의 난]]<ref>平禅門の乱, 막부에서 강력한 권세를 행사하던 [[나이간레이]](内管領) [[다이라노 요리쓰네]]를 싯켄 [[호조 사다토키]]가 첫단한 사건이다.</ref>과 [[안도씨의 난]], [[악당]]의 활동 등으로 급속도로 통치력을 잃어감에따라 소노가씨 역시 막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적인 행보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 각주 ==
{{각주}}
{{각주}}

2024년 3월 14일 (목) 18:19 판

틀:후마 관련 문서

() () () ()
소노가씨
소노가 가문의 가몬
소노가 석류
() () ()柘榴 (ざくろ)
본성 김해 김씨(金海金氏)?[1]스이씨(須伊氏)[2]
가조 소노가 쓰네키요(素能我恒精)[3]
종별 무가(武家)
왕실(王室)[4]
출신지 고려(高麗)
근거지 사와리국(狭張国)[5]후마(風馬)
지류 · 분가
[ 펼치기 · 접기 ]
고산요(御三葉)[6]
 다이라요(大羅葉)
 신로쿠요(寝鹿葉)
 고코요(五向葉)
당주 소노가 쓰네요시(素能我恒温)

소노가씨(일본어: 素能我氏 (そのがし) 소노가시[*])는 소노가 쓰네토키가 개창한 씨족으로 오늘날에는 후마 국왕왕족들을 가리키며 후마 왕실(일본어: 風馬王室 후마오시쓰[*])이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사와리국슈고 가문이었으나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해 ·조선 등과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고코마쓰 덴노로부터 '후마노키미'(風馬王)[7]라는 작호를 하사받으며 명목상의 번국(蕃国)으로서 자립하였다.

도리지(通字)[8]는 '恒'(쓰네)와 '精'(기요)이며, 현 당주는 소노가 시게키요이다.

역사

출신

소노가씨는 고려 삼별초 출신의 장수, 김항정일본에 귀부한 뒤 창시한 도래인 씨족이다. 그는 여몽연합군에 맞서 탐라에서의 항쟁을 주도하던 중,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1272년 초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사와리섬에 이주하였다. 당시 사와리섬은 일본의 고키시치도 중 하나인 사이카이도에 속해있는 구니(国) 중 하나였으나, 일본 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이유로 오랫동안 토착 호족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사와리섬에 도착한 김항정은 삼별초의 항쟁 동안 쌓인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호족들을 빠르게 제압했고, 이내 그들로부터 오비카누키(オビカヌキ)[9]로 추대되었다. 사와리섬을 장악한 김항정은 이곳을 새로운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삼으려했으나, 1273년 탐라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그는 고려에 항복하는 대신 가마쿠라 막부와 접촉하는 길을 택했다. 이에 이듬해 막부의 대외창구인 다자이후에 사절을 보내 귀부를 청했고, 당시 막부를 통치하던 싯켄[10] 호조 도키무네원나라와 고려의 침략 위협 속에서 김항정의 사절을 환대하고 조정을 통해 그에게 우지인 '스이'(須伊)[11]가바네 '아손'(朝臣)을 하사하고 자신의 이름인 '도키'(時)를 배령한 뒤,[12] 사와리국슈고로 임명하였다.

그 뒤, 김항정은 소노가향(素能我郷) 인근에 저택을 지었고, 그곳의 지명을 묘지(苗字)로 사용함으로서 소노가씨가 되었다.

자립과 왕조 개창

사와리국은 형식적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노가씨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이라는 군사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협력하였으나 원나라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호조 도키무네 사후 가마쿠라 대지진[13]을 비롯해 헤이젠몬의 난[14]안도씨의 난, 악당의 활동 등으로 급속도로 통치력을 잃어감에따라 소노가씨 역시 막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적인 행보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1. 최초의 정사(正史)인 풍마세표(風馬世表)에 따르면 삼별초 장수 김항정(金恒精)이 2천 여명의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사와리섬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나, 본관 등 그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 1284년 김항정이 고우다 덴노를 알현해 귀부를 요청했고, 이에 우지(氏)로서 '스이'(須伊), 가바네(姓)로 아손(朝臣)을 하사받았다.
  3. 본래 이름은 '스이노 쓰네키요'(須伊恒精)
  4. 일반적으로 1374년 소노가 쓰네유키명나라 홍무제로부터 풍마국왕(風馬国王)을 책봉받은 시점을 개국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며, 1469년 소노가 쓰네토모고쓰치미카도 덴노로부터 후마노키미(風馬王)로 봉해진 시점을 시작으로 보는 소수설도 있다.
  5. 지금의 후마 일대에 설치한 율령국(律令国)으로 사이카이도(西海島)에 속하였다.
  6. 미국 점령하 후마 제도 시기에 포고된 '왕실 존치 및 유지에 관한 행정 명령' 이후 직계만이 왕족 지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 이들 방계 가문은 모두 민간인 신분이다.
  7. 이외에 '안자이타이쇼군'(安西大将軍)이라는 관위까지 임명하려 했으나 공가무로마치 막부의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8. 가문 대대로 인명에 사용되는 한자를 의미하며 대표적으로 오다씨의 '信'(노부), 도쿠가와씨의 '家'(이에)가 있다.
  9. 후마벤으로 대왕(大王)을 의미하며, '카누키'(カヌキ)는 당시 사와리섬의 호족들을 지칭했다. 어원은 가야에서 군주를 부르던 호칭인 한기(旱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10. 執権, 쇼군을 대신해 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던 직책으로 막부의 중심기관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를 장악하면서 실권을 차지했다.
  11. 김항정의 성인 金의 초기 중세 한국어 발음인 'swoy'(쇠)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12. 주군이 가신에게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하는 행위를 헨키(偏諱, 편휘)라고 하며, 주로 주군과 가신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의도로 행해졌다.
  13. '에이닌의 간토지진'(永仁の関東地震)이라고도 부르며 1293년 간토 지방 남부에서 일어났다. 규모는 M8.0으로 추정되며 수만 명이 사망하는 등 가마쿠라 막부 붕괴에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4. 平禅門の乱, 막부에서 강력한 권세를 행사하던 나이간레이(内管領) 다이라노 요리쓰네를 싯켄 호조 사다토키가 첫단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