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Sunset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Night Sunset (토론 | 기여) (일상 속 사람들의 문민정부 포지션, 이종찬 대통령 시기의 내용을 간략하게 인물 문서에 담았습니다.) |
||
3번째 줄: | 3번째 줄: | ||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400px; border:2px solid #005ba6; float:right;" |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400px; border:2px solid #005ba6; float:right;" | ||
|- | |- |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67f 0%, #005ba6 20%, #005ba6 80%, #00467f); color:#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67f 0%, #005ba6 20%, #005ba6 80%, #00467f); color:#cfa547;"|대한민국 14대 대통령<br>이종찬<br>李鍾贊 <nowiki>|</nowiki> Lee Jong-chan | ||
|- | |- | ||
|colspan="2" style="background: #fff;"| | |colspan="2" style="background: #fff;"|[[파일:14대 대통령 이종찬.jpg|100%]] | ||
|- | |- | ||
!rowspan="2" width="25%"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 #005ba6; color:# | !rowspan="2" width="25%"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 #005ba6; color:#cfa547;"|출생 | ||
|{{출생일과 나이|1936|4|29}} | |{{출생일과 나이|1936|4|29}} | ||
|- | |- | ||
|중화민국 상하이시 |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시 | ||
|- | |- |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 #005ba6; color:#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 #005ba6; color:#cfa547;"|사저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293 (홍지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293 (홍지동) | ||
|- | |- | ||
!rowspan="2"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 #005ba6; color:# | !rowspan="2"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 #005ba6; color:#cfa547;"|재임 | ||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일상 속 사람들)|대통령]] |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일상 속 사람들)|대통령]] | ||
|- | |- | ||
22번째 줄: | 22번째 줄: | ||
|colspan="2"|{{펼접|id=Jong-chan-lee-information|style=table-layout: fixed; text-align:left;}} | |colspan="2"|{{펼접|id=Jong-chan-lee-information|style=table-layout: fixed; text-align:left;}}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본관 | ||
|style="text-align:left;"|경주 이씨<ref>상서공후(尙書公后)-백사공파(白沙公派) 중시조 37세 종(鍾)○ 항렬. 백사 이항복의 12대손.</ref> | |style="text-align:left;"|경주 이씨<ref>상서공후(尙書公后)-백사공파(白沙公派) 중시조 37세 종(鍾)○ 항렬. 백사 이항복의 12대손.</ref>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부모 | ||
|style="text-align:left;"|아버지 이규학, 어머니 조계진<ref>흥선대원군의 외손녀다.</ref> | |style="text-align:left;"|아버지 이규학, 어머니 조계진<ref>흥선대원군의 외손녀다.</ref>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형제자매 | ||
|style="text-align:left;"|형 이종원 | |style="text-align:left;"|형 이종원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배우자 | ||
|style="text-align:left;"|윤장순 | |style="text-align:left;"|윤장순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자녀 | ||
|style="text-align:left;"|아들 이철우 | |style="text-align:left;"|아들 이철우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 vertical-align: middle;"|친인척 | ||
|style="text-align:left;"|할아버지 이회영<br/> | |style="text-align:left; vertical-align: middle;"|할아버지 이회영<br/> | ||
큰할아버지 이석영<br/> | 큰할아버지 이석영<br/> | ||
작은할아버지 이시영<br/> | 작은할아버지 이시영<br/> | ||
45번째 줄: | 45번째 줄: | ||
외외종조부<ref>외할머니의 남자형제</ref> 고종<ref>혈연으로는 이 가족관계가 맞지만 법적으로는 고종이 이종찬의 외할머니와 12촌이기 때문에 이종찬에게 고종은 외할머니의 12촌이 된다.</ref><br/> | 외외종조부<ref>외할머니의 남자형제</ref> 고종<ref>혈연으로는 이 가족관계가 맞지만 법적으로는 고종이 이종찬의 외할머니와 12촌이기 때문에 이종찬에게 고종은 외할머니의 12촌이 된다.</ref><br/> | ||
외외증조할아버지<ref>외할머니의 아버지</ref> 흥선대원군<br/> | 외외증조할아버지<ref>외할머니의 아버지</ref> 흥선대원군<br/> | ||
외외고조할아버지<ref>외할머니의 할아버지</ref> 남연군 | 외외고조할아버지<ref>외할머니의 할아버지</ref> 남연군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학력 | ||
|style="text-align:left;"|서울창신국민학교 (졸업)<br/> | |style="text-align:left; vertical-align: middle;"|서울창신국민학교 (졸업)<br/> | ||
경기중학교 (졸업)<br/> | 경기중학교 (졸업)<br/> | ||
경기고등학교 (졸업 / 52회)<br/> | 경기고등학교 (졸업 / 52회)<br/> | ||
54번째 줄: | 54번째 줄: |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병역 | ||
|[[대한민국 육군 (일상 속 사람들)|대한민국 육군]] 소령<ref>육군사관학교 16기 출신</ref> 예편<ref>예편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다.</ref><br/>(1960년 2월 ~ 1971년) | | style="vertical-align: middle;" | [[대한민국 육군 (일상 속 사람들)|대한민국 육군]] 소령<ref>육군사관학교 16기 출신</ref> 예편<ref>예편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다.</ref><br/>(1960년 2월 ~ 1971년)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종교 | ||
|style="text-align:left;"|[[개신교]] (장로회) | |style="text-align:left; vertical-align: middle;"|[[개신교]] (장로회)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소속 정당 | ||
|style="text-align:left;"| 무소속<ref>퇴임 이후 탈당</ref> | |style="text-align:left;"| 무소속<ref>퇴임 이후 탈당</ref>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약칭 | ||
|style="text-align:left;"|李 | |style="text-align:left;"|李 | ||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자 | ||
|style="text-align:left;"|계원(桂苑) | |||
|- | |||
!style="width: 25%; 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 #005ba6; color:#cfa547;"|호 | |||
|style="text-align:left;"|삼인(森人) | |style="text-align:left;"|삼인(森人) | ||
|- | |- | ||
76번째 줄: | 79번째 줄: | ||
== 개요 == | == 개요 == | ||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 ||
== 생애 == | |||
=== 성장과정과 장교 임관 === | |||
[[1936년]] [[4월 29일]] [[중화민국 국민정부|중국]] [[상하이]]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1946년 영구 귀국하여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 창신초등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ref>동기생으로 [[신구]], [[고건]], [[이준용]], [[박용오]], [[조양래]]가 있다. [[대우그룹]] 회장인 [[김우중]]과 경기고 52회 동기로서 매우 친했다고 한다.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ref>,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하였다.<ref>원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에 가려고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ref> 회고록에 따르면 고등학교 담임은 서울대학교 진학을 권했으나, 당시 이집트의 [[나세르]]와 같은 혁명적 군인세력에게 매료되었던지라 군인이 되어 행동으로서 나라의 진로를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
=== 중앙정보부 생활 === | |||
[[5.16 쿠데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중정에서 근무했다. 중앙정보부에 있을 때에는 정권을 보위하는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끌려온 이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김지하]]와 가까운 사이여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정권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김지하가 [[1972년]]에 '비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중정의 분위기가 심히 험악해지자 김지하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연락을 하였다.<ref>이외에 김지하 본인의 주장으로는 이종찬에게 [[쿠데타]] 제의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종찬은 이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ref> 중정 수사관들로부터 [[조영래]]의 인품을 전해 들은 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을 직접 찾아가 조영래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 |||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5.17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었다. 당시 알음알음 민주화 세력들을 도와주고 있었던 무렵이라 정부에 실망해 기획정보실장을 끝으로 중앙정보부를 떠난다. | |||
=== 정계입문 후의 겹경사 === | |||
이후 재야생활을 하다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이 때부터 차근차근 정치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야당 의원임에도 여당에서도 평판이 우호적이었을 정도로 모두를 포용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성향 자체가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데다, 정치적 뚝심과 사람됨, 업무능력 등에서도 여당의 인정을 받을만한 요소가 많았다. | |||
이러한 정치 경험을 토대로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때 민주당 계열 후보로 출마하였고<ref>이 때에 이례적으로 김대중 총재가 1공부터 군부독재 시기까지 호남보다 더 홀대받던 북부지방 표를 잡기 위해 양보한 덕도 있었다. 이 때 양보를 한 김대중 총재는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기호지방의 민심을 얻게 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다.</ref>, 41.96%(1800만 표)의 득표율로 정주영 후보를 제치고 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이 됐다. 민간인이 직선제를 거쳐 민간인에게서 대통령의 권한을 이임받는 첫 순간이었다. | |||
===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시절 === | |||
김영삼 대통령의 배턴을 이어받은 이종찬은 취임 초기 정부 명칭을 ''''미래의 정부'''' 라 칭하며 대한민국의 미래와 균형발전을 약속했고, 실제로 미래의 정부 시절 북부지방 개발과 각종 인프라 개선 사업이 상당히 진행되었다.<ref>이 덕에 퇴임 이후 평안북도지사가 찾아와 은퇴 후 거취를 물으며 영변군에서 여생을 보내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이종찬 전 대통령은 정중히 거절했다.</ref> 한국통신이 차후 초고속 인터넷망의 밑거름이 되는 네트워크망을 곳곳에 깔았고, 철도와 고속도로 노선을 신설하는가 하면, 1기 신도시 계획의 연장선인 2기 신도시는 북부지방 주요 5개 도시에서 진행하겠다고 발표하며 북부지방의 민심은 확실하게 잡았다. | |||
과학 인프라와 공교육의 질적 강화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기초과학은 대한민국 과학계의 새싹이라는 말과 같이 대전에 기초과학복합연구단지를 추가로 건설하여 대전을 단순한 교통 중심 요지가 아닌, 과학 중심 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비록 문민정부에 밀려 조명을 못 받기는 하지만<ref>문민정부 시절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었고,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해인 1988년 새해를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로 장식하는가 하면, 군부 세력에 대한 숙군 사업 진행과 군 내 부패 척결, 광주 민주항쟁에 대한 조사, 지방자치제도 도입, 권위주의 타파, 공직자 재산 공개제도 도입... 이 외에도 현재 대한민국 정부와 독재를 방지하는 정치 시스템 다수가 이 때에 정립되었다.</ref>, 미래의 정부는 정부 명칭 그대로 '''대한민국의 미래''' 를 보고 기본 인프라에 투자하고 내정에 집중했다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도 이에 대해서는 이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 |||
하지만 호재가 계속된 건 아니었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보통 1~2번 있는 대형사고가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정권 출범 한 달 후,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를 필두로 100명 전후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1993년 ~ 1995년 사이에 무려 6건이 발생했으며, 부모를 살해한 사건, 부유층 대상 잔혹 범죄사건이 발생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당산철교|서울 당산철교]]가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계기로 실행된 전격적 서울 한강교량 안전점검에서 부실공사 실태를 발각당한 것도 이종찬 정부 임기중이었던 1994년이었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도 1994년 발생했으며,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29116_19434.html 경인 축 교통수송시스템의 수용능력 초과 패닉], 그리고 부천-인천 세금포탈사건 등 한 해 대형사고들이 연달아 발생함에 따라,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 |||
사고의 면면을 보면, 1993년 7월 26일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대구 가스폭발 사고]]처럼 '''안전 문제에 소홀한 무리한 일 추진'''에서 비롯된 사고가 있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제3공화국 ~ 제4공화국 시절 '''부실하게 건축된 구조물'''들이 무너지게 된 인재(人災)도 있었다. 즉, 급속한 경제 성장의 '''누적된 모순'''이 그 시점에 터지기 시작한 측면이 있었지만, 이런 각종 사고들 + 여러 엽기적인 살인사건<ref>[[박한상(범죄자)|박한상]], [[지존파]], [[온보현]], [[김성복 교수 살인사건]] 등</ref>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그 시점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종찬'''이었던 것.<ref>무리한 일 추진은 재발 방지 차원에서 강조하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둘 수 있지만, 기존 부실시공된 교량(다리), 백화점 같은 건축물 붕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로, 사전에 예상하고 방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단,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발생한 후 이종찬이 "부실 기업을 물려받은 기분"이라고 심경을 토로한 것은 실언이라 할 수 있다. 본인 입장에서야 확실히 위에 설명한 것처럼 그 전 시대에서 이미 잘못된 채 이어져오다가 터진 일이라 억울한 면이 있긴 하겠지만 이걸 대놓고 말해버리면 안됐던 것. 실제로 문민정부 출범 후 세가 위축되어 있던 보수층 일각에선 산업화, 경제 개발 시기의 업적을 폄하한 것이라 반발하며 반격을 꾀하는 빌미가 되었고, 야권에서는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을 탓할 것인가?"라는(책임 회피라는) 비판을 불러왔기 때문.</ref><ref>묘한 우연으로, 1993-1995년은 유독 내외(內外)로 대형사고가 많았던 해였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엽기적인 테러사건이 속출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만 봐도 [[옴진리교]]에 의해 터진 [[카메이도 악취사건]], [[마츠모토 시 사린가스 살포사건|마츠모토 사린사건]],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자신의 여동생을 사이비종교집단에서 탈퇴시켜 데리고 나온 공증관리사무소장 카리야 키요시 씨 살해사건]], 그리고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졌고, 미국에서도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사건|월드 트레이드센터 지하 폭탄테러사건]],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오클라호마 주 소재 연방정부청사 폭탄테러사건]] 등이 터졌다. 그러니까 1993-1995년은 한국 미국 일본 3국이 공통적으로, 이때까지 고속직행만 해 온 부작용이 줄줄이 터져나온 해였던 것.</ref> | |||
경제 분야에서는 한때 나았는데, 1996년 말까지 기업고정자본형성(고정투자)이 전년 대비 30%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일 만큼 기업 투자가 활발했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5.9%<ref>97년 수치이다.</ref>~ 9.6%라는 호조를 보였으며, 동년 말에는 국민총소득([[GNI]])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듬해인 1996년 10월 11일, 경제선진국가단체라 불리는 [[OECD]]에 가입할 만큼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질 수 있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23/0200000000AKR20151123056900002.HTML 이종찬 정부 당시 경제지표]. 더군다나 김영삼 정부를 괴롭혔던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의 상승도 김영삼 정부 임기 말부터는 부동산 규제가 먹히고 신도시 분양이 진전 됨에 따라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었고, 이에 더해 금융실명제의 도입과 부동산 거래실명제도의 도입으로 짧고 굵은 부동산 정책기조를 이어나갔기에 소득이 증가하면 바로 소비와 저축의 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 과정을 거쳤기에 내수시장은 활황을 보였다. 이런 미래의 정부의 모습을 지지하는 여론이 여전했기 때문에, 이대로 임기를 마무리했다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김구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고 퇴임이 되고 나서부터는 [[위인전]]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라는 농담반 진담반 같은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 |||
하지만 97년 초 부도가 난 [[한보그룹]]의 후속 조치과정에서 [[1997년 외환 위기#s-3.2|한보사태]]가 터지면서 관련 법정 증인인 박석태 전 [[SC제일은행|제일은행]] 상무가 97년 4월 목을 매 자살해 여론이 악화되었다.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인데,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1996년 4분기부터 28%, 14%, 심지어는 '''7%'''를 찍어내며 하염없이 추락하고만 있었고, [http://hankookilbo.com/v/09cd6275e94f401dbcf9e4ef6307a989 김현철 사건 이후로는 식물 대통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한 확장 후유증을 앓던 일부 대기업들이 '''매월''' 잇달아 도산하고, 원화 가치가 달러당 1,900원으로 폭락하는 가운데 식물 정권 상태이다 보니 별다른 대책을 내지도, 대책의 약발도 보지 못한 채, 결국 달러 부족으로 11월 21일 결국 [[1997년 외환 위기|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임기 말 긍정 평가가 6%까지 추락하게 된다.<ref>이 드라마틱한 지지율 변화 때문에 이종찬의 지지율은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민주국가에서 북부지방이라는 콘크리트가 있어 지지도가 떨어지지 않았던 대통령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몰락할 수 있냐는 것.</ref> 이 7%라는 지지율은 먼 훗날 [[최순실 게이트|어떤 역대급 정치 스캔들]]을 터뜨리는 [[박근혜|대통령]]이 나오기 전까지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지지율이었다.<ref>[[박근혜]]의 탄핵 직전 지지율은 4%였다.</ref> | |||
[[1997년]] [[11월 8일]], 당시 임기 말의 대통령인 이종찬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 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797_19482.html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하지만 직후 [[1997년 외환 위기|IMF 사태]]가 터지면서 정부의 혼란 수습 노력은 빛이 바래게 되었다. | |||
=== 퇴임 후 === | |||
{{인용문1|'''[[대한민국 대통령|영광의 시간]]과 누릴 수 있었던 황금같은 시간은 짧았는데 비해, [[사고 공화국|고통]]과 [[1997년 외환 위기|절망]]의 시간을 보내게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심합니다.'''| ㅡ 퇴임사 中}} | |||
이종찬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통절한 개혁으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했었다가, 막판 [[1997년 외환 위기]]에 대한 대실책으로 퇴임할 때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ref>이후 최저 지지율은 알다시피 [[박근혜]]가 '''4%'''라는 말도 안되는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경신했다. 다만 박근혜의 4%는 주간 지지율이었기에, 분기별로 산출한 지지율은 이종찬의 6%가 최저다. 박근혜는 10월 말 까지는 20%대 정도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분기 통합으로는 6%이하가 나오기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12월 초에 탄핵 소추 되면서 그 이후 지지율은 조사되지 않았다.</ref> 이종찬의 지지율 격차 기록은 아직도 한국에서 전무할 정도이다. 그 후에도 각종 측근들의 비리 등으로 초반의 영예가 무색해질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퇴임의 쓴맛을 봐야 했다. 퇴임 2년 뒤에는 한 시민으로부터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9/1781545_13451.html 빨강 페인트가 주입된 계란을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 |||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편찬하는가 하면, 조상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이름을 딴 우당장학회를 세워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사회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 |||
[[분류:일상 속 사람들]] [[분류:대한민국 대통령 (일상 속 사람들)]] | [[분류:일상 속 사람들]] [[분류:대한민국 대통령 (일상 속 사람들)]] |
2024년 9월 30일 (월) 19:51 판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이종찬 李鍾贊 | Lee Jong-chan | |||||||||||||||||||||||||||
---|---|---|---|---|---|---|---|---|---|---|---|---|---|---|---|---|---|---|---|---|---|---|---|---|---|---|---|
![]() | |||||||||||||||||||||||||||
출생 | 1936년 4월 29일 | (89세)||||||||||||||||||||||||||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시 | |||||||||||||||||||||||||||
사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293 (홍지동) | ||||||||||||||||||||||||||
재임 | 제14대 대통령 | ||||||||||||||||||||||||||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생애
성장과정과 장교 임관
1936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1946년 영구 귀국하여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 창신초등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11],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하였다.[12] 회고록에 따르면 고등학교 담임은 서울대학교 진학을 권했으나, 당시 이집트의 나세르와 같은 혁명적 군인세력에게 매료되었던지라 군인이 되어 행동으로서 나라의 진로를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 생활
5.16 쿠데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중정에서 근무했다. 중앙정보부에 있을 때에는 정권을 보위하는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끌려온 이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김지하와 가까운 사이여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정권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김지하가 1972년에 '비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중정의 분위기가 심히 험악해지자 김지하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연락을 하였다.[13] 중정 수사관들로부터 조영래의 인품을 전해 들은 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을 직접 찾아가 조영래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5.17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었다. 당시 알음알음 민주화 세력들을 도와주고 있었던 무렵이라 정부에 실망해 기획정보실장을 끝으로 중앙정보부를 떠난다.
정계입문 후의 겹경사
이후 재야생활을 하다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이 때부터 차근차근 정치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야당 의원임에도 여당에서도 평판이 우호적이었을 정도로 모두를 포용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성향 자체가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데다, 정치적 뚝심과 사람됨, 업무능력 등에서도 여당의 인정을 받을만한 요소가 많았다.
이러한 정치 경험을 토대로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때 민주당 계열 후보로 출마하였고[14], 41.96%(1800만 표)의 득표율로 정주영 후보를 제치고 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이 됐다. 민간인이 직선제를 거쳐 민간인에게서 대통령의 권한을 이임받는 첫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배턴을 이어받은 이종찬은 취임 초기 정부 명칭을 '미래의 정부' 라 칭하며 대한민국의 미래와 균형발전을 약속했고, 실제로 미래의 정부 시절 북부지방 개발과 각종 인프라 개선 사업이 상당히 진행되었다.[15] 한국통신이 차후 초고속 인터넷망의 밑거름이 되는 네트워크망을 곳곳에 깔았고, 철도와 고속도로 노선을 신설하는가 하면, 1기 신도시 계획의 연장선인 2기 신도시는 북부지방 주요 5개 도시에서 진행하겠다고 발표하며 북부지방의 민심은 확실하게 잡았다.
과학 인프라와 공교육의 질적 강화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기초과학은 대한민국 과학계의 새싹이라는 말과 같이 대전에 기초과학복합연구단지를 추가로 건설하여 대전을 단순한 교통 중심 요지가 아닌, 과학 중심 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비록 문민정부에 밀려 조명을 못 받기는 하지만[16], 미래의 정부는 정부 명칭 그대로 대한민국의 미래 를 보고 기본 인프라에 투자하고 내정에 집중했다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도 이에 대해서는 이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재가 계속된 건 아니었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보통 1~2번 있는 대형사고가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정권 출범 한 달 후,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를 필두로 100명 전후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1993년 ~ 1995년 사이에 무려 6건이 발생했으며, 부모를 살해한 사건, 부유층 대상 잔혹 범죄사건이 발생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서울 당산철교가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계기로 실행된 전격적 서울 한강교량 안전점검에서 부실공사 실태를 발각당한 것도 이종찬 정부 임기중이었던 1994년이었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도 1994년 발생했으며, 경인 축 교통수송시스템의 수용능력 초과 패닉, 그리고 부천-인천 세금포탈사건 등 한 해 대형사고들이 연달아 발생함에 따라,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사고의 면면을 보면, 1993년 7월 26일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5년 4월 28일 대구 가스폭발 사고처럼 안전 문제에 소홀한 무리한 일 추진에서 비롯된 사고가 있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제3공화국 ~ 제4공화국 시절 부실하게 건축된 구조물들이 무너지게 된 인재(人災)도 있었다. 즉, 급속한 경제 성장의 누적된 모순이 그 시점에 터지기 시작한 측면이 있었지만, 이런 각종 사고들 + 여러 엽기적인 살인사건[17]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그 시점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종찬이었던 것.[18][19]
경제 분야에서는 한때 나았는데, 1996년 말까지 기업고정자본형성(고정투자)이 전년 대비 30%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일 만큼 기업 투자가 활발했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5.9%[20]~ 9.6%라는 호조를 보였으며, 동년 말에는 국민총소득(GNI)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듬해인 1996년 10월 11일, 경제선진국가단체라 불리는 OECD에 가입할 만큼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질 수 있었다. 이종찬 정부 당시 경제지표. 더군다나 김영삼 정부를 괴롭혔던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의 상승도 김영삼 정부 임기 말부터는 부동산 규제가 먹히고 신도시 분양이 진전 됨에 따라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었고, 이에 더해 금융실명제의 도입과 부동산 거래실명제도의 도입으로 짧고 굵은 부동산 정책기조를 이어나갔기에 소득이 증가하면 바로 소비와 저축의 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 과정을 거쳤기에 내수시장은 활황을 보였다. 이런 미래의 정부의 모습을 지지하는 여론이 여전했기 때문에, 이대로 임기를 마무리했다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김구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고 퇴임이 되고 나서부터는 위인전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라는 농담반 진담반 같은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97년 초 부도가 난 한보그룹의 후속 조치과정에서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관련 법정 증인인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가 97년 4월 목을 매 자살해 여론이 악화되었다.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인데,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1996년 4분기부터 28%, 14%, 심지어는 7%를 찍어내며 하염없이 추락하고만 있었고, 김현철 사건 이후로는 식물 대통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한 확장 후유증을 앓던 일부 대기업들이 매월 잇달아 도산하고, 원화 가치가 달러당 1,900원으로 폭락하는 가운데 식물 정권 상태이다 보니 별다른 대책을 내지도, 대책의 약발도 보지 못한 채, 결국 달러 부족으로 11월 21일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임기 말 긍정 평가가 6%까지 추락하게 된다.[21] 이 7%라는 지지율은 먼 훗날 어떤 역대급 정치 스캔들을 터뜨리는 대통령이 나오기 전까지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지지율이었다.[22]
1997년 11월 8일, 당시 임기 말의 대통령인 이종찬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 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하지만 직후 IMF 사태가 터지면서 정부의 혼란 수습 노력은 빛이 바래게 되었다.
퇴임 후
이종찬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통절한 개혁으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했었다가, 막판 1997년 외환 위기에 대한 대실책으로 퇴임할 때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23] 이종찬의 지지율 격차 기록은 아직도 한국에서 전무할 정도이다. 그 후에도 각종 측근들의 비리 등으로 초반의 영예가 무색해질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퇴임의 쓴맛을 봐야 했다. 퇴임 2년 뒤에는 한 시민으로부터 빨강 페인트가 주입된 계란을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편찬하는가 하면, 조상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이름을 딴 우당장학회를 세워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사회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 ↑ 상서공후(尙書公后)-백사공파(白沙公派) 중시조 37세 종(鍾)○ 항렬. 백사 이항복의 12대손.
- ↑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다.
- ↑ 흥선대원군의 차녀이다. 혈연상 고종의 남매이긴하나 고종이 효명세자에게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고종과 12촌이다.
- ↑ 외할머니의 남자형제
- ↑ 혈연으로는 이 가족관계가 맞지만 법적으로는 고종이 이종찬의 외할머니와 12촌이기 때문에 이종찬에게 고종은 외할머니의 12촌이 된다.
- ↑ 외할머니의 아버지
- ↑ 외할머니의 할아버지
- ↑ 육군사관학교 16기 출신
- ↑ 예편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다.
- ↑ 퇴임 이후 탈당
- ↑ 동기생으로 신구, 고건, 이준용, 박용오, 조양래가 있다. 대우그룹 회장인 김우중과 경기고 52회 동기로서 매우 친했다고 한다.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
- ↑ 원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에 가려고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 ↑ 이외에 김지하 본인의 주장으로는 이종찬에게 쿠데타 제의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종찬은 이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 ↑ 이 때에 이례적으로 김대중 총재가 1공부터 군부독재 시기까지 호남보다 더 홀대받던 북부지방 표를 잡기 위해 양보한 덕도 있었다. 이 때 양보를 한 김대중 총재는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기호지방의 민심을 얻게 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 ↑ 이 덕에 퇴임 이후 평안북도지사가 찾아와 은퇴 후 거취를 물으며 영변군에서 여생을 보내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이종찬 전 대통령은 정중히 거절했다.
- ↑ 문민정부 시절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었고,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해인 1988년 새해를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로 장식하는가 하면, 군부 세력에 대한 숙군 사업 진행과 군 내 부패 척결, 광주 민주항쟁에 대한 조사, 지방자치제도 도입, 권위주의 타파, 공직자 재산 공개제도 도입... 이 외에도 현재 대한민국 정부와 독재를 방지하는 정치 시스템 다수가 이 때에 정립되었다.
- ↑ 박한상, 지존파, 온보현, 김성복 교수 살인사건 등
- ↑ 무리한 일 추진은 재발 방지 차원에서 강조하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둘 수 있지만, 기존 부실시공된 교량(다리), 백화점 같은 건축물 붕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로, 사전에 예상하고 방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단,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발생한 후 이종찬이 "부실 기업을 물려받은 기분"이라고 심경을 토로한 것은 실언이라 할 수 있다. 본인 입장에서야 확실히 위에 설명한 것처럼 그 전 시대에서 이미 잘못된 채 이어져오다가 터진 일이라 억울한 면이 있긴 하겠지만 이걸 대놓고 말해버리면 안됐던 것. 실제로 문민정부 출범 후 세가 위축되어 있던 보수층 일각에선 산업화, 경제 개발 시기의 업적을 폄하한 것이라 반발하며 반격을 꾀하는 빌미가 되었고, 야권에서는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을 탓할 것인가?"라는(책임 회피라는) 비판을 불러왔기 때문.
- ↑ 묘한 우연으로, 1993-1995년은 유독 내외(內外)로 대형사고가 많았던 해였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엽기적인 테러사건이 속출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만 봐도 옴진리교에 의해 터진 카메이도 악취사건, 마츠모토 사린사건, 자신의 여동생을 사이비종교집단에서 탈퇴시켜 데리고 나온 공증관리사무소장 카리야 키요시 씨 살해사건, 그리고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졌고, 미국에서도 1993년 월드 트레이드센터 지하 폭탄테러사건, 1995년 오클라호마 주 소재 연방정부청사 폭탄테러사건 등이 터졌다. 그러니까 1993-1995년은 한국 미국 일본 3국이 공통적으로, 이때까지 고속직행만 해 온 부작용이 줄줄이 터져나온 해였던 것.
- ↑ 97년 수치이다.
- ↑ 이 드라마틱한 지지율 변화 때문에 이종찬의 지지율은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민주국가에서 북부지방이라는 콘크리트가 있어 지지도가 떨어지지 않았던 대통령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몰락할 수 있냐는 것.
- ↑ 박근혜의 탄핵 직전 지지율은 4%였다.
- ↑ 이후 최저 지지율은 알다시피 박근혜가 4%라는 말도 안되는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경신했다. 다만 박근혜의 4%는 주간 지지율이었기에, 분기별로 산출한 지지율은 이종찬의 6%가 최저다. 박근혜는 10월 말 까지는 20%대 정도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분기 통합으로는 6%이하가 나오기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12월 초에 탄핵 소추 되면서 그 이후 지지율은 조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