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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 사후 [[다자이후]]가 위치했던 자리에 정동행성 관청이 들어서며 본격적인 규슈 통치가 시작되었다. 정동행성 승상은 [[고려]] 국왕이 겸임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평장정사]]가 규슈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했고, 그 아래에 [[우승]]과 [[좌승]]이 평장정사를 보좌했다. 좌·우승은 주로 토착 호족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기존 지배층을 새로운 통치 구조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였다.
쿠빌라이 칸 사후 [[다자이후]]가 위치했던 자리에 정동행성 관청이 들어서며 본격적인 규슈 지배가 시작되었다. 정동행성 승상은 [[고려]] 국왕이 겸임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평장정사]]가 규슈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했고, 그 아래에 [[우승]]과 [[좌승]]이 평장정사를 보좌했다. 좌·우승은 주로 토착 호족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기존 지배층을 새로운 통치 구조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였다.


13세기 말부터 고려에서 넘어온 이주민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기존 원주민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대부분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몰수된 영지는 고려계 이주민들이 차지하였다. 그중 일부는 토착 호족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 특히 거상 [[김자의]]는 옛 [[쇼니씨]]의 영지를 사들이고 고려 조정에 은 1천여 냥을 바쳐 정동행성 우승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정동행성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고려인들의 이주를 장려하였으며, 죄를 범한 몽골인이나 고려인들을 강제로 정착시켰다. 또한, 토착 호족들에게 공물 등을 부담토록 해 지방 통제력의 강화를 꾀했다. 이러한 탄압 정책에 불만을 품은 [[쇼니씨]]·[[지바씨]]·[[기쿠치씨]] 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엔유의 난]])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이 소유했던 영지는 몰수되었다.

2025년 2월 16일 (일) 23:21 판

정동등처행중서성
征東等処行中書省
1294년 - 년(약 년)
성립 이전 폐지 이후
가마쿠라 막부 고려 (축자도)
약칭 정동행성(征東行省)

개요

정동행성(일본어: 征東行省 세이토코쇼)은 원나라규슈를 대상으로 설치한 특수 행중서성이다. 정동행성은 약칭으로 본래 이름은 정동등처행중서성(일본어: 征東等処行中書省 세이토토쇼코추쇼쇼)이다.

역사

1274년 여몽연합군은 다카시마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진격, 다자이후의 서쪽 관문인 미즈키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간몬 해협을 건넌 뒤 교토를 향해 진격하던 이들은 시모후리성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규슈로 퇴각하였고, 그 뒤에도 수차례 아카마가세키에 재상륙을 시도했으나 막부군의 강력한 저항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쿠빌라이 칸은 병력을 충원한 뒤 원정을 재개하려 했으나 다른 국내외적인 문제에 직면해 단념하였고, 1294년 그가 사망함으로써 일본 원정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쿠빌라이 칸 사후 다자이후가 위치했던 자리에 정동행성 관청이 들어서며 본격적인 규슈 지배가 시작되었다. 정동행성 승상은 고려 국왕이 겸임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평장정사가 규슈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했고, 그 아래에 우승좌승이 평장정사를 보좌했다. 좌·우승은 주로 토착 호족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기존 지배층을 새로운 통치 구조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였다.

정동행성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고려인들의 이주를 장려하였으며, 죄를 범한 몽골인이나 고려인들을 강제로 정착시켰다. 또한, 토착 호족들에게 공물 등을 부담토록 해 지방 통제력의 강화를 꾀했다. 이러한 탄압 정책에 불만을 품은 쇼니씨·지바씨·기쿠치씨 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엔유의 난)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이 소유했던 영지는 몰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