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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대신으로 임명된 민영환은 중추원 권력 강화, 인민의 권리 존중, 헌법 제정과 하원 설립을 약속하였다. 4월에 공표된 임시 헌장을 거쳐 9월 11일, '''제헌 헌법'''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대한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 의정대신으로 임명된 민영환은 중추원 권력 강화, 인민의 권리 존중, 헌법 제정과 하원 설립을 약속하였다. 4월에 공표된 임시 헌장을 거쳐 9월 11일, '''제헌 헌법'''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대한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 ||
비록 일본의 메이지 헌법을 모방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주의 권한이 매우 강했지만 이전의 대한국 국제와 비교하면 훨씬 진일보된 것이다. | 비록 일본의 메이지 헌법을 모방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주의 권한이 매우 강했지만 이전의 대한국 국제와 비교하면 훨씬 진일보된 것이다. 1년 뒤 제1회 민의원 총선거가 이루어지면서 상원인 중추원과 하원인 민의원으로 이루어진 대한국 의회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바로 ''''융희헌정''''의 시작이었다. | ||
융희제 순종은 태생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데다 독살 사건까지 겪은 탓에 제대로 된 정무를 수행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역설적으로 이는 국무대신들과 의회 주도의 입헌정치를 가능케 하였다. 순종은 1926년 52살의 나이에 요절하게 되지만, 그의 뒤를 이어 위한 태시제 영종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었고 입헌 정치를 지지하였기에 이러한 기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 융희제 순종은 태생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데다 독살 사건까지 겪은 탓에 제대로 된 정무를 수행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역설적으로 이는 국무대신들과 의회 주도의 입헌정치를 가능케 하였다. 순종은 1926년 52살의 나이에 요절하게 되지만, 그의 뒤를 이어 위한 태시제 영종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었고 입헌 정치를 지지하였기에 이러한 기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 ||
한편 의회가 설립되면서 정당들 또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회 민원선을 기준으로 원내에 입성한 정당들은 윤치호가 이끄는 헌정당과 | 한편 의회가 설립되면서 정당들 또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회 민원선을 기준으로 원내에 입성한 정당들은 윤치호가 이끄는 헌정당과 자유주의 성향을 띄는 이승만-박용만의 자유당, 보수적인 관료들과 유림들의 충군당, 천도교의 진보당 등이 있었다. 1924년 2회 민원선과 함께 민영환이 의정대신을 사직하고 헌정당의 총재 윤치호가 의정대신으로 임명되면서 최초의 정당내각이 수립되었다. | ||
==대공황과 극단주의의 발흥 == | ==대공황과 극단주의의 발흥 == |
2025년 3월 15일 (토) 18:06 판
개요
대한국 (광무유신)의 역사
칭제건원과 광무유신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조는 연호를 광무로 개정하고 이후 국호를 대한으로 제정하였다. 뒤이어 10월 12일, 옛 남별궁 터에 건설된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바야흐로 제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제국을 선포한 고조는 구본신참의 기치 아래 '광무유신'이라고 불리는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의 이권을 두고 벌어지는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결국 1904년 일본의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대한국은 이미 전쟁 발발 1개월 전, 공식적으로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대규모 군사들을 무단 진주시키며 군사 동맹을 강요하였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며 선전하였지만, 뤼순 공방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결정적으로 최대 격전이었던 봉천 전투에서 패배함에 따라 전세는 러시아 측으로 기울게 된다. 일본의 전비와 물자는 고갈되었고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은 한계에 달했다. 일본으로써는 다행이도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에 따라 러시아를 협상장에 불러내는 데 성공하지만, 육전에서의 패배는 뼈 아픈 결과로 이어졌다. 1905년 9월 2일, 미국의 중재로 결된 포츠머츠 조약은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였고, 한반도는 러-일간의 중립지대로 설정되게 되었다.
조약의 결과로 국제적인 중립을 공인받는 한국은 열강의 간섭 없이 원할하게 개혁을 진행해나갈 수 있었다. 중앙은행의 설립과 양전 사업으로 급증한 세입은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도로와 철도, 항만이 건설되고 관영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전국 각지에 학교가 세워졌다. 또한 프랑스 고문단을 초빙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는 등 군제 개혁도 가속화되었으며, 해군의 창설 또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군대의 개혁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은 중국과 영토 갈등을 빚던 간도 지역을 무력으로 탈환하려 시도하였다. 1910년대 중국은 정치적 혼란과 내전으로 인해 간도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였고, 결국 1915년 길림성 군벌 멍언위안과 "간도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실상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다.[1]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당시 처음에는 어느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지만, 전세가 협상국 측으로 기울면서 1917년 5월 동맹국에 선전포고하며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서부전선에 약 3,000여명을 파병하는 등 전쟁 수행에 기여하였고,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함으로써 러시아 내전에도 개입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서구 열강과 맺어진 불평등 조약을 다수 개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듯 근대화 개혁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국제적인 위상도 상승하고 있었으나, 정치 체제의 경우 후진적인 전제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899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 운동은 수구파의 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부패와 구습은 청산되지 못했다. 서양의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들은 이러한 자국의 상황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912년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면서 이는 점차 심화되었고, 전제황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퍼져나갔다. 결국 1913년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이었던 안명근이 친위사단 장교들과 정변을 모의하던 사건이 발각되었고, 이를 빌미로 개화적인 지식인들이 대거 체포당하는 '105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입헌군주제 운동은 침체기에 들어간다.
3.1 운동과 융희헌정

1919년 1월 21일, 광무제 고조의 붕어 이후 순종 융희제의 즉위가 이루어졌다. 융희제는 지식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제정치를 고수하였고, 작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독감의 유행과 조정의 무능한 대체는 민심을 크게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신교계가 주축이 되어 민권과 입헌정치를 요구한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황제와 수구파 대신들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탄압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며 격화되고 있었다. 시위가 계속되자 순종은 친민권파였던 민영환을 중심으로 한 민영환 정부를 출범시켰고,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면서 3.1 운동은 종결되었다.
의정대신으로 임명된 민영환은 중추원 권력 강화, 인민의 권리 존중, 헌법 제정과 하원 설립을 약속하였다. 4월에 공표된 임시 헌장을 거쳐 9월 11일, 제헌 헌법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대한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비록 일본의 메이지 헌법을 모방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주의 권한이 매우 강했지만 이전의 대한국 국제와 비교하면 훨씬 진일보된 것이다. 1년 뒤 제1회 민의원 총선거가 이루어지면서 상원인 중추원과 하원인 민의원으로 이루어진 대한국 의회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바로 '융희헌정'의 시작이었다.
융희제 순종은 태생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데다 독살 사건까지 겪은 탓에 제대로 된 정무를 수행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역설적으로 이는 국무대신들과 의회 주도의 입헌정치를 가능케 하였다. 순종은 1926년 52살의 나이에 요절하게 되지만, 그의 뒤를 이어 위한 태시제 영종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었고 입헌 정치를 지지하였기에 이러한 기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한편 의회가 설립되면서 정당들 또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회 민원선을 기준으로 원내에 입성한 정당들은 윤치호가 이끄는 헌정당과 자유주의 성향을 띄는 이승만-박용만의 자유당, 보수적인 관료들과 유림들의 충군당, 천도교의 진보당 등이 있었다. 1924년 2회 민원선과 함께 민영환이 의정대신을 사직하고 헌정당의 총재 윤치호가 의정대신으로 임명되면서 최초의 정당내각이 수립되었다.
대공황과 극단주의의 발흥
광무유신 이래 지속된 식산흥업과 교육 진흥 정책은 2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광업과 방직업을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상공업은 근대적 자본가와 노동자 계층을 형성시켰고, 보통교육 실시와 고등교육 진학률 증가는 지식인 계층의 확대를 불러왔다. 그러나 20년대 후반부터 점차 경기가 침체되면서 노동자와 소작농들의 처우는 열약해졌으며 지식인들의 실업률 또한 높아져만 갔다.
1929년에는 국내 최초의 대규모의 파업이자 노동투쟁인 원산 총파업이 일어났고, 곧이어 미국 발 대공황까지 일어나면서 대한의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윤치호의 뒤를 이어 취임한 의정대신 박영효는 자본가와 대지주의 편에 서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고, 1930년엔 보안법을 제정하여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사회주의 사상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제 악화의 책임을 지울 수는 없었고 결국 1931년 선거에서 야당이던 자유당에서 과반의 의석을 내주며 대한국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자유당 정부는 소작료 인하와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힘쓰며 보통선거법을 통과시키는 등 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복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는데 1932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세워진 만주국의 승인 여부에 대해 의정대신인 이승만과 내부대신 박용만과의 갈등이 발생한 것이였다. 제국주의 성향의 박용만은 만주국을 승인을 주장하였고 이에 외교현실주의자였던 이승만이 반대하면서, 자유당 계파 간의 내분이 시작되었다.[2] 결국 박용만은 지지자들과 함께 자유당을 탈당하여 새 정당 국민회를 창당하였고,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의회를 해선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였다. 1933년 열린 제4회 민의원 선거는 최초로 이루어진 보통선거였으나 자유주의 유권자들의 표는 자유당과 국민회, 새로 떠오르던 여운형의 인민당으로 분산되었고 그 결과 민권당이 소수정부로서 다시 정권을 탈환하게 되었다.
박용만이 이끌던 국민회는 이후 신한민족당으로 개칭하였고, 민권당 극우파들을 포섭함으로써 세를 늘렸다. 이들은 고토회복과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아시아주의적 성향을 띄었고 일본과의 친선을 중요시하였다. 당시 일본은 대만과 만주를 집어삼킨 아시아 최고의 강대국이었고 그런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과 패권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적지 않은 지식인과 민중들은 이런 주장에 공감하며 지지를 표했고,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후계인 노동당 또한 원내에 진입하면서 정치 사상의 극단화는 점차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의정 안창호의 민권당 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5회 민원선 이후 자유당-인민당 연립정부가 출범함으로써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두 당의 연정은 보수파들과 극단주의자들을 견제해야 한다는 이해관계가 일치된 결과였다.
2차 세계대전과 항일투쟁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우 사건을 발단으로 중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반도 주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이승만 정부는 중립을 고수하는 한편 군비를 증강시키며 국방력 강화 정책을 펼쳤다. 일본의 친선 요구는 거절되었고 결국 1941년 7월 28일, 일본의 침공으로 한일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3개월만에 한국의 전 국토를 점령하였다. 이후 영종 황제와 내각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한국 망명정부를 수립하였고, 국군 패잔병들과 민중들은 의병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토를 점령한 일본은 군정을 실시하였고, 친일 인사들을 포섭하여 괴뢰정부 수립을 준비하였다. 1942년, 의정 윤치호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정부가 세워졌다. 괴뢰정부는 일본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공출제를 시행하여 식량과 자원을 무자비하게 수탈해갔고
이종혁 장군이 이끄는 대한 광복군을 중심으로 13도 전국의 의병들은 연합하였고, 미 OSS의 지원하에 한성진공작전을 계획한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이 예상보다 앞당겨지는 바람에 이 작전은 패망 이후 실시되었다. 또한 노동당 출신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매국노와 일제 고위층에 대한 암살 활동이나 주요 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을 수행하며 일제에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