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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강성했던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1356년 [[병신정변]]을 일으켜 기철 일파를 비롯한 부원 세력을 일소하고 정동행성의 보거권<ref>保挙権, 관리를 임명할 때 후보자를 보증 천거하는 권리</ref>을 회복했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그는 나아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규슈를 직할지로 삼고자 규슈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인 해상 무역을 원천 차단하는 강경책을 내세웠다. 이에 맞서 호족 세력은 사략함대를 운용해 고려를 대상으로 약탈과 밀무역에 나섰고 일반 백성들도 생계 유지를 위해 노략질에 가담했다. 소위 [[축자구]]라 불리는 이들 해적 집단은 [[세토 내해]]에서 활동하던 [[무라카미 수군]]과 충돌하거나 [[명나라]] 연안까지 진출하는 등 [[원말명초]]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강성했던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1356년 [[병신정변]]을 일으켜 기철 일파를 비롯한 부원 세력을 일소하고 정동행성의 보거권<ref>保挙権, 관리를 임명할 때 후보자를 보증 천거하는 권리</ref>을 회복했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그는 나아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규슈를 직할지로 삼고자 규슈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인 해상 무역을 원천 차단하는 강경책을 내세웠다. 이에 맞서 호족 세력은 사략함대를 운용해 고려를 대상으로 약탈과 밀무역에 나섰고 일반 백성들도 생계 유지를 위해 노략질에 가담했다. 소위 [[축자구]]라 불리는 이들 해적 집단은 [[세토 내해]]에서 활동하던 [[무라카미 수군]]과 충돌하거나 [[명나라]] 연안까지 진출하는 등 [[원말명초]]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 ||
마침내 1360년 [[여조의]]의 뒤를 이어 만호를 세습한 [[여자견]]은 휘하 사병 및 자신에게 동조하는 호족들과 함께 정동행성 일대를 습격·점령해 평장정사 [[신윤국]]을 비롯한 규슈 내 친고려 세력을 제거하고 축자도원수를 자칭, 이듬해에는 [[부여풍]]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국호를 | 마침내 1360년 [[여조의]]의 뒤를 이어 만호를 세습한 [[여자견]]은 휘하 사병 및 자신에게 동조하는 호족들과 함께 정동행성 일대를 습격·점령해 평장정사 [[신윤국]]을 비롯한 규슈 내 친고려 세력을 제거하고 축자도원수를 자칭, 이듬해에는 [[부여풍]]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국호를 [[정안]](正安, {{글씨 크기|9.5|세이안}})이라 하고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정동행성 통치 체제는 막을 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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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7일 (금) 20:10 판
정동등처행중서성 征東等処行中書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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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년 - 1361년(약 68년) | |||
성립 이전 | 폐지 이후 | ||
가마쿠라 막부 | 정안 | ||
약칭 | 정동행성(征東行省) | ||
승상 | 초대 충렬왕(1294-1298) 말대 공민왕(1352-1361) | ||
주요 사건 | • 1317년 쇼니씨의 난 |
개요
정동등처행중서성(일본어: 征東等処行中書省 세이토토쇼코추쇼쇼)은 원나라가 규슈를 대상으로 설치한 특수 행중서성이다. 약칭은 정동행성(일본어: 征東行省 세이토코쇼)이다.
역사
1274년, 여몽연합군은 다카시마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다자이후의 서쪽 관문인 미즈키성을 함락했다. 이후 간몬 해협을 건너 교토를 향해 진격하던 이들은 다타라야마 전투[1]에서 패배하고 규슈로 퇴각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아카마가세키에 재상륙을 시도했지만, 막부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쿠빌라이 칸은 병력을 보충한 뒤 원정을 재개하려 했으나, 다른 국내외적인 문제에 직면해 이를 단념하게 되었고, 1294년 그의 사망으로 일본 원정은 종결되었다.
쿠빌라이 칸 사후 다자이후가 위치했던 자리에 정동행성 관청이 들어서며 본격적인 규슈 지배가 시작되었다. 정동행성 승상은 고려 국왕이 겸임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평장정사가 규슈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했고, 그 아래에 우승과 좌승이 평장정사를 보좌했다. 좌·우승은 주로 토착 호족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기존 지배층을 새로운 통치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였다.
정동행성은 장기적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려는 일환으로 고려인들의 이주를 장려하였으며, 죄를 범한 몽골인이나 고려인들을 강제로 정착시켰다. 또한, 토착 호족들에게 공물 등을 부담토록 해 지방 세력의 준동을 억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쇼니씨·지바씨·기쿠치씨 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쇼니씨의 난)[2] 진수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이 소유했던 영지는 몰수되어 이주민들이 차지하였다. 그중 일부는 막대한 토지를 경영하게 됨으로써 호족으로 성장했는데, 대표적으로 여조의는 권신 기철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 만호를 제수받아 토착 호족에 버금가는 세력을 구축했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강성했던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1356년 병신정변을 일으켜 기철 일파를 비롯한 부원 세력을 일소하고 정동행성의 보거권[3]을 회복했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그는 나아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규슈를 직할지로 삼고자 규슈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인 해상 무역을 원천 차단하는 강경책을 내세웠다. 이에 맞서 호족 세력은 사략함대를 운용해 고려를 대상으로 약탈과 밀무역에 나섰고 일반 백성들도 생계 유지를 위해 노략질에 가담했다. 소위 축자구라 불리는 이들 해적 집단은 세토 내해에서 활동하던 무라카미 수군과 충돌하거나 명나라 연안까지 진출하는 등 원말명초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마침내 1360년 여조의의 뒤를 이어 만호를 세습한 여자견은 휘하 사병 및 자신에게 동조하는 호족들과 함께 정동행성 일대를 습격·점령해 평장정사 신윤국을 비롯한 규슈 내 친고려 세력을 제거하고 축자도원수를 자칭, 이듬해에는 부여풍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국호를 정안(正安, 세이안)이라 하고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정동행성 통치 체제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