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ㆍ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

Νέα Ῥώμη Πατριαρχείο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ς
공식 정부기 세계총대주교청기
국가휘장
신앙의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상징
국가 대 영광송
테오토코스 마리아
수호성인 '테오토코스' 마리아[1]
국화 흰 백합
국가 지도
역사
  • 프로토클레토스 안드레아 사도의 교회의 설립 AD.30?~38?
  • 밀라노 칙령 AD. 313
  • 제1차 니케아 공의회 AD. 325
  • 새로운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AD.330
  •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AD. 380
  • 트롤로 공의회 AD. 692
    • 성상 파괴령 AD. 726~842
  • 동서 대분열 AD. 1054
  • 1차 십자군 AD. 1096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AD. 1453
  • 오스만 제국 멸망 AD. 1922
    • 위대한 이상의 실현[2] AD. 1919~1922
  •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 AD. 1922
  • 아테네 협정 AD. 1923
  •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령 설치 AD. 1923
  • 아뉘포탁스 독트린 AD. 1925
  •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주선언 AD. 1930
  • 초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 AD. 1936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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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세계총대주교청 대교구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법적 수도 및 최대도시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면적 71,939km²
내수면 비율 43.4%
기후 지중해성 기후 및 온난 습윤기후, 쾨펜 기후구분법 기준
일부의 고지 지중해성 기후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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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71,964,34명(2020 통계)
인구밀도 1800명/km²
출생률 1인/2.1명 (2018 통계)
평균 수명 71.8세
기대 수명 80.1세
민족 그리스인 92%, 투르크인 5%, 기타 3%
공용어 코이네 그리스어, 현대 그리스어
종교 국교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방 정교회
분포 기독교(동방 정교회) 99.9%, 기타 0.1%
군대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위기사단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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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시 급(廣域市/μητροπολιτική πόλη) 1(Ѡ)개,3개
현(縣/περιφέρειες) 13개
자치주(自治州/αυτόνομο κράτος) 1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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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신권정치, 정교일치, 과두정, 양원제, 왕권신수설 주장, 종교법 우선, 거국내각

Οικουμενικός Πατριάρχης | 세계총대주교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구 대주교 및 세계 총대주교

 바실리오스 4세
 Βασίλειος Δʹ
 Basil IV
 2020년 8월 31일 ~
ㅤㅤㅤ
Η Αυτού Θειοτάτη Παναγιότης ο Αρχιεπίσκοπο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Νέας Ρώμης και Οικουμενικός Πατριάρχης
정부요인
국가원수 바실리오스 4세Βασίλειος Δʹ
신성종무원 의장 아리스토텔레스 페트로스Αριστοτέλης Πέτρος
각내평의회 의장 알렉산드로스 테오도코스Ἀλέξανδρος Θεοτόκος
주권안보위원장 마타이오스 모로코스Ματάιος Μαρόκο
대법원 최고판관 엘리아스 콘스탄티노스Ἠλίας Κωνσταντίνος
근위기사단 대장 헤라클레스 마타이시오스Ηρακλής Ματαΐσιος
여당 그리스 정교회 보편파
290 / 300 (97%)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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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수출중심 자유시장경제
GDP 전체 $ 180,253
1인당 $ 10,482
PPP 전체 $ 181,000
1인당 $ 10,500
신용등급 S&P:Ac-
Moody's:Aa3
Fitch:AB-
DBRS:AA (high)
화폐 법정화폐
노미스마 | νόμισμα
ɴꜱ,Ⰹ
ISO 4217 NS
중앙은행 콘스탄티노폴리스 국가은행
국가 예산 1년 세입 $
1년 세출 $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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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율리우스력[3]
그레고리력[4]
시간대 UTC+3
도량형 국제단위계 (SI)


콘스탄티노폴리스 전경
Constantinopolis |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ς

콘스탄티노폴리스 전경[5], 테오도시우스 막시무시아 대경기장, 아야 소피아 대성전




개요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 (터키어:Konstantinopolis Kutsal Yeni Roma Patrikhanesi),(그리스어:Ιερό Νέο Ρωμαϊκό Πατριαρχείο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ς), (러시아어:Священный Ново-Римский Патриархат Константинополя), (라틴어:Novi Romani Patriarchatus Constantinopolitanus Sanctus), 줄여서 콘스탄티노폴리스(터키어:Konstantinopolis),(그리스어: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ς)는 발칸반도의 트라키아 지역과 아나톨리아 지역의 서쪽 지역 사이에 걸쳐있는 기독교 신정국가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넬레스 해협을 끼고 있으며, 수도는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이다. 발칸 방면으로는 불가리아와 그리스가 있으며, 아나톨리아 방면으로는 튀르크 민주파와 튀르케스탄이 있다. 주요 도시로는 앞서 소개한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트라키아 지역에서 주요 교통의 요충지인 아드리아누폴리스, 전통적인 아나톨리아 지역의 요충지인 니케아, 역사적인 장소이자 기초산업의 부흥지인 칼케돈, 나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인 칼리폴리스와 주요 해안지역인 트로이가 있다.

남유럽의 발칸반도 동편의 아시아와 유럽이 교차점에 위치하는 국가로 트라키아라 불리는 유럽의 지역과 아나톨리아라 불리는 아시아의 지역으로 국토를 거대하게 가로지르며 동서편으로 나누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 해협이 존재하며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가는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에 냉전시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흑해 연안 국가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내수면 면적이 매우 크며 해안선도 약 2033km나 될 정도로 국토의 대부분이 바다나 강에 접해있다. 내륙에는 석호가 많으며 주요 도시인 니케아도 석호에 존재하는 도시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천천히 오르던 전체적 성장률은 개방정책과 더불어 유입된 해외 자본과 기존에도 경쟁력을 유지하던 해운업이 성하였으며 항구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주요 도시들로 인해 성장율은 꾸준한 3%대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과두정 체제와 신권정치는 같은 정치체제에 가까운 바티칸과 달리 넓은 국토와 많은 인구로 인해 민주주의가 요구되는 지역이기도 하며, 독립 이후 2000년대에 들며 심각한 사회적인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국가의 뿌리를 나사렛의 예수의 제자 안드레아가 세운 교회를 시작으로 규정하며, 전통적이고 또 공식적으로 비잔티움의 문화가 자신들의 전신임을 밝히고 있다. 오스만 투르크에 대해 자신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부인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투르크 문화를 많이 쇠퇴시키었어도 생활 곳곳에는 그리스 문화와 투르크 문화가 섞인 특이한 지중해 연안 문화가 존재한다.

교회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으며, 국가의 역사적인 근본은 고대 그리스에 두고 있고, 비잔티움 시대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정교회의 후손이다. 근대에 그리스에서 로마란 명칭을 자칭하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로마를 칭한 바가 있으나, 새로운 로마라는 칭호를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부터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 사회는 기독교 신정국가답게 중세시대의 분위기에 머물러 있으나 지식개방화 정책을 통한 여러 해외 문물 수용 및 다문화적 문화수용은 국가를 빠르게 변화시키었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요구와 함께 여러 문화를 무분별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여러 사회문제가 일어났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이민자 문제가 짙기도 하다.

바티칸 시국과 같은 국가체제와 운영은 비교적 광대한 영토의 크기로 인한 물리적 인구 증가와 여러가지 사회적 수요로 인해 체제변화가 이루어지는 중이며, 이 과정에서 근대 공화주의 사상에 입각한 문민통치를 요구하는 민간 세력과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있으며 지금에 와선 국가의 근간으로서 존립하는 교회 사이의 큰 불협화음이 있다.

특이점으로는 근대의 메갈리 이데아로 인해 세워진 국가이므로 그리스 우선주의적 성향과 민족주의의 정서가 짙게 깔려있어 다민족 국가적인 면모는 크게 없으나 문화적으로는 전통문화의 쇄국에 가까울정도의 보호를 기반으로 여러 문화를 들여오며 독특한 문화정서가 형성되었다. 민간에서의 개방적 정서와는 다르게 교회 내에서는 비잔틴 전례 복고와 함께 전통전례를 이어나가며 매우 보수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국가 상징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가상징은 국가적 상징과 교회적 상징이 법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교회가 곧 국가라는 인식이 국내외적으로 짙게 깔려있으므로 혼용되어 사용된다. 실제 동로마 제국에서 키로(크리스토그램)이 쓰여진 깃발을 제국의 상징격으로 사용한것과 비슷한 사례이다. 실제로 국가적 상징인 깃발에도 기독교적 상징이 분명히 들어가 있으므로 교회에서도 혼용하여 국기를 개양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하지만 이를 혼용하는 것 자체에는 국가의 근간이 교회라는 사상에 따라 별 문제가 없다는 공식적 입장[6]에 따라서 묵인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국가적 상징으로는 국호(國號), 깃발(旗), 국장(國章)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실상 혼용되는 교회의 상징으로는 교회(Orthodox Church), 성가(聖歌)[7], 주보(主保)[8]가 있다.

실제로 《교회의 대한 품위유지에 관한 규율(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관구 관구장령 12호)》과 《국가상징에 대한 보호법》에 의하여 국가의 상징 및 교회의 상징이나 영적 성물을 훼손 및 파괴하거나 사회통념상 바르지 못하게 사용될 시 법적으로 처벌받으며, 특히 국기에 그려진 크리스토그램(Χριστόγραμμα)이 들어가 있으므로 위에 발췌한 두 법률에 모두 저촉되어 함부로 훼손 할 수 없으며, 도안에 대한 편집도 경우에 따라 처발받을 수 있다.

이외의 모든 종류의 이콘, 성화나 성가, 그리고 교회에 대한 모든 형태의 모욕 및 비윤리적 행태에 대해 엄격한 법률을 적용하고 있다. 단순히 교회에 대한 불만이나 욕설보다는 이를 2차 창작 등의 불명예스러운 방법으로 변형되는것에 대한 예방에 가까운 법률이며, 법률의 적용 또한 사법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곳에서도 이러한 개념의 법률로서 판단하고 또 판결한 선례가 존재한다.

국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령은 기본적으로 과거 동로마 제국때의 도시를 계승하는데, 교회의 관습이자 과거 330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비잔티움으로 천도할때에 내린 명칭이다, 이 명칭으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교회의 5대 총대주교중에서 로마 주교에 이어 2등 주교로 권리가 격상되었으며, 이 명칭으로서 가톨릭 세계의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로마와 차등화되지 않는 관계에 있음을 명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정식 명칭은 아니었으며, 이칭정도의 위치였으나 도시에 대한 찬사나 그리스인의 민족의식과 관련하여 다양하게 쓰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공식 직함에도 이 명칭이 포함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라는 명칭은 기본적으로 이 도시로 천도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도시 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도시 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폴리스는 과거 그리스의 군소 도시국가들의 통칭적인 명칭으로, 이후 여러 유럽의 도시들에서도 쓰였는데 그리스의 색채가 짙은 이곳에서도 쓰이였다.

이전에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로 쓰였는데, 고대 그리스 메가라의 주민들은 그들의 왕인 뷔자스 혹은 뷔잔타스(그리스어: Βύζας, Βύζαντας)의 이름을 따 비잔티움(그리스어: Βυζάντιον 뷔(비)잔티온,라틴어: Byzantium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등의 도시의 명칭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한 후에도 여러 의미로 쓰였는데, 주로 동로마제국의 이칭이나, 도시의 대한 명칭으로 쓰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언어별 국호
그리스어 Νέα Ῥώμη Πατριαρχείο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ς
라틴어 Novi Romani Patriarchatus Constantinopolitanus Sanctus
튀르크어 Konstantinopolis Kutsal Yeni Roma Patrikhanesi
러시아어 Вселенский Патриархат Константинополя
아랍어 بطريركية القسطنطينية المسكونية
몽골어 ᠺᠣᠨᠰᠲ᠋ᠠᠨᠲ᠋ᠢᠨᠣᠫᠣᠯᠣ ᠶᠢᠨ ᠡᠺᠦ᠋ᠮᠧᠨᠢᠺ ᠫᠠᠲᠷᠶᠠᠷᠬ᠎ᠠ
영어 Ecumenical Patriarchate of Constantinople

주로 쓰이기 위한 이유는 1648년에 출판된 "루브르의 비잔티움"(불어: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 캉주의 "비잔티움 역사"(불어: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며 서방권에서는 19세기에 도시의 이름에서 국가와 제국을 호칭하는 일반명사로, 특히 프랑스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나 새로운 로마 등의 명칭보다 더욱 소설가나 역사가들에게 친숙해져 일반명사화 되어 쓰이게 되었다, 이는 제국이 무너진 후에 명사화된 경우이므로 정식 명칭보다는 이에 준하는 명칭 정도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로마" 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그리스인이나 여타 사람들(주로 중세의 사람들)은 따로 명칭도 없이 "그 도시(헤 폴리스)(그리스어:ἡ Πόλις)"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인의 도시 라는 뜻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중세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딱히 명칭을 하지도 않아도 그저 도시라는 포괄적인 이름만으로도 이 도시를 대표로서 생각하였다.

이렇게 큰 도시였기에 다른 이칭으로도 "모든 도시들의 여왕" 이라고도 불렸으며, 고대 노로드어에서는 위대한 도시란 뜻으로"미크로고로드"(고대 노로드어:Miklagard) 라고도 불렀다, 슬라브족은 대체로 발칸반도로 진출한 남슬라브족과 동유럽으로 진출한 루스족이 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 도시에 대하여 큰 도시라 하여 "짜(차)르그라드"(슬라브어:Царьград)라고도 불렀다, 짜르는 슬라브족의 임금을 칭하는 용어로 큰 도시에 대하여 가장 상위명사로서 칭한것으로 당시 그 위용을 알수있다.

오스만 제국은 주로 "콘스탄티니예"(아랍어:قسطنطينيه)라고 불렀는데, 이스탄불 이라는 명칭이 있음에도 오래전부터 쓰이던 이름을 존중하는 차원, 혹은 동로마 제국의 영광을 이어받으려는 목적 등의 정치적/역사적 의미로 이 명칭을 지속하여 주로 사용하였다, 터키-그리스 전쟁 동안에는 터키어 이름인 "이스탄불"(터키어:İstanbul)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공식 명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라틴어:Constantinopolis)를 공식적인 명칭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리스어를 혼용하기에 "콘스탄티누폴리스"(현대 그리스어: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가끔 종교적인 의미로서 수호 성인인 성모 마리아의 도시라 하여 "마리아오르데"(라틴어:Mariaurbe) 라고도 하는데, 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국가의 주체를 의미하는 세계총대주교청[9]은 국가원수가 세계총대주교이며 교회가 국가의 근본적인 주체임을 밝히고 있으며, 아뉘포탁스 독트린의 마지막 절차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주선언(1930)"의 선포 이후 기본 국가에 대한 법률이 채택 및 체제에 대해서 논의가 진행되었고, "제 1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 시노드 결의문(1936)"에 의하여 "국가기본법"이 결의되었다. 또한 관습에 의거하여 총대주교의 영지라는 의미인 "διάταγμα του παγκόσμιου πατριάρχη(세계총대주교령(領)"에서 "Οικουμενικό Πατριαρχείο(세계총대주교청(廳)"으로 명칭을 관습적/실질적 으로 변경하기로 결의하였다.

깃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기
① 공식 정부기 ② 세계총대주교청기
지위 ① 국가 상징, 함수기, 상선기
② 세계총대주교청 상징
채택일 1936년 1월 3일
1978년 7월 31일
근거 법령 국기및 상징에 관한 조례 1호 개정
비율 2:3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의 국기는 공식 정부깃발과 세계총대주교청기가 혼용되는데, 공식 정부기의 명칭은 크리스토그람 시메아(Χριστόγραμμα σημαίαzm )이라 하며, 2개의 크리스토그램(기독교의 상징적 문양)과 비잔티움의 상징적 깃발이 서로 교차하여 배치된 형태의 깃발의 형태에 따라 관습적으로 이렇게 부른다. 법적으로는 국가의 상징적 깃발 정도로 따로 명칭을 정하지 않고 있다.

국기의 개양은 1년의 특별한 날로 지정된 날 이외에는 모두 같은 깃대의 위치에 개양하는데, 기쁜날이라 할 수 있는 성탄절이나 그리스도 부활축일과 같은 날은 평일깃대기준(깃대끝-깃발 위치 간격 20cm)에서 "깃대끝-깃발 위치 간격 10cm"까지 줄이고 슬픈 날이라 할 수 있는 성금요일(그리스도가 못박히신 날, 부활절 기간)에는 깃발을 "깃대끝-깃발 위치 간격 30cm"까지 벌리도록 되어있다. 슬픈날과 기쁜날의 기준은 정부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서 정해진다.

위에 예시로, 1월 7일의 기쁜날에 해당하는 날은 깃발을 깃대의 끝보다 10cm 아래 두어 평소보다 높게 개양하며, 슬픈날인 성금요일에는 깃대의 끝보다 30cm 아래에 두어서 평소보다 낮게 개양한다. 이외 모든 날에은 평일깃대기준을 따른다. 깃발은 정부깃발은 언제나 똑같지만 세계총대주교청기는 여러 변수가 있는데, 세계총대주교의 개인문장이 같이 추가된 경우나 여러 날짜에 따라 여러 문구를 적어둔 경우이다. 일례로 세계총대주교가 선종하면 깃발은 흑백을 반전하여 검은 바탕의 흰색 문장이 추가된 형태로 슬픈날 기준에 따라 개양된다.

국기로 여겨지는 2개의 국기 말고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 자체의 상징으로 베타가 들어간 금색 십자가가 있는 붉은 깃발(국기의 각각 우상향, 좌하양에 있는것)은 시 자체의 상징으로 사용하므로 딱히 국기에서 사용하는 깃발의 위치를 달리달거나 하는 것 없이 항시 평일깃대기준을 지켜 개양한다. 더불어 국가상징으로서의 법적 보호 또한 없기도 하다.

국장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가휘장
지위 국가 상징
채택일 1936년 1월 3일
근거 법령 국기및 상징에 관한 조례 1호 개정
사용처
  • 비잔틴 양식 돔 내부 이콘
  • 국가 상징
  • 국가 문서
  • 여권
  • 수훈
  • 해외공관
  • 화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장은 "판토그레이토스"라 부르는 비잔티움 양식 성당의 돔에 그려지는 거대한 그리스도 이콘으로, 만물의 주관자라는 뜻(παντογράφος)의 거대한 그리스도 이콘을 이미지화 한 이콘을 국가상징에 준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의 상징적 문장중 하나로 사용한다.

실제로는 국장에 준하게 사용되는데, 이콘의 하나로 취급되므로 극진히 보호되며 모든 휘장이 들어간 곳에는 무조건 비에 젖거나 눈이 쌓이거나 훼손되지 않게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화폐나 여권등에 들어간 이콘도 보호대상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채색과 이콘의 요소를 온전히 갖춘 경우에만 극진한 보호를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선화나 간략하게 아이콘으로 들어간 경우에는 적절한 관리를 요하게 하기만 하고 큰 보호를 하지는 않는다.

문장의 형태는 원형에 중앙에는 그리스도의 상반신과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이콘에 전통적으로 쓰이는 "ICXC"[14]가 적히고, 전례에 따른 문장이 모두 적절하게 삽입되어 전통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걸치고 있는 옷이 파란색이라는 점에서도 전통성을 크게 반영하였으며, 둥글게 삽입된 그리스어는 각각 그리스도를 중앙삼아 4개의 양 끝 부분에 그리스 형태의 십자가를 넣어 글자를 각각 좌상,좌하,우상,우하로 분리하였다.

문장의 명칭은 크리스토그람 시메아와 같이 형상을 명확히 표현하여 수식어를 없애 형식적 부분보다 실용적이고 진실된 부분에 더 집중하여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인 ICXC로 결정하였다. 원형문장에 둥글게 적힌 글씨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가휘장의 각 부분의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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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 우상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Νέα Ρώμη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
세계총대주교의 땅
Οικουμενικών Πατριαρχών Γη του
좌하 우하
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요,[10]
Είμαι το άλφα και το ωμέγα,
나는 시작이자 끝이니라.[11]
Η Αρχη Και Το Τελο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가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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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성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영광 (대영광송)
지위 전례 성가 및 관습국가
작사 알 수 없음
작곡 알 수 없음
전례 성경 문헌 및 유대 문헌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영광혹은 대영광송, Δόξα στον Ύψιστο Θεό, Gloria in excelsis Deo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례에서 사용하는 전례음악이자 찬송 성가, 관습상 국가이다. 전통적으로 신약성경의 루가의 복음서의 2장 14절의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구절과 고대 유대 문헌의 전례, 그리고 비잔틴 전례의 이른 아침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시간에 부르고, 해가 지고 모든 하루일과가 끝나고 부르는 밤의 예배때 부르는 신성한 노래이다.

원래는 이러한 의미의 노래였으나, 따로 국가가 정해지지 않자 상징적이고 또 익히 알려진 성가인 대영광송을 국가로 민간에서 사용하는 일이 잦아졌고, 결정적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조정 금메달을 획득한 안드레아 칼레오기시오스(1964)의 시상이 결정되었을때 콘스탄티노폴리스올림픽 준비위원회에서 국가제창때 대영광송을 따로 녹음한 파일이 없자 그자리에서 한국 정교회 성가대를 보내 합창하며 국가의 위치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정부는 국가의 위치를 인정하고 있으며, 노래에 있어서 전세계 콘스탄티노폴리스 산하의 교구는 모두 같은 음율을 사용하게 함으로서 가사는 각지의 언어로만 바꾸어, 본토에서는 그리스어로 부르며 특이한 관습적 국가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가사는 아래와 같으며, 가사는 그리스 전례 한국정교회,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의 가사를 따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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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한국어


Δόξα Σοι τῷ δείξαντι τὸ φῶς.
Δόξα ἐν ὑψίστοις Θεῷ καὶ ἐπὶ γῆς εἰρήνη ἐν ἀνθρώποις εὐδοκία.
Ὑμνοῦμέν σε, εὐλογοῦμέν σε, προσκυνοῦμέν σε, δοξολογοῦμέν σε, εὐχαριστοῦμέν σοι, διὰ τὴν μεγάλην σου δόξαν.
Κύριε Βασιλεῦ, ἐπουράνιε Θεέ, Πάτερ παντοκράτορ, Κύριε Υἱὲ μονογενές, Ἰησοῦ Χριστέ, καὶ Ἅγιον Πνεῦμα.
Κύριε ὁ Θεός, ὁ ἀμνὸς τοῦ Θεοῦ, ὁ Υἱός τοῦ Πατρός, ὁ αἴρων τὴν ἁμαρτίαν τοῦ κόσμου, ἐλέησον ἡμᾶς, ὁ αἴρων τὰς ἁμαρτίας τοῦ κόσμου.
Πρόσδεξαι τὴν δέησιν ἡμῶν, ὁ καθήμενος ἐν δεξιᾷ τοῦ Πατρός, καὶ ἐλέησον ἡμᾶς.
Ὅτι σὺ εἶ μόνος Ἅγιος, σὺ εἶ μόνος Κύριος,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Πατρός. Ἀμήν.
Καθ' ἑκάστην ἡμέραν εὐλογήσω σε, καὶ αἰνέσω τὸ ὄνομά σου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καὶ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τοῦ αἰῶνος.
Καταξίωσον, Κύριε, ἐν τῇ ἡμέρᾳ ταύτῃ, ἀναμαρτήτους φυλαχθῆναι ἡμᾶς.
Εὐλογητὸς εἶ, Κύριε, ὁ Θεὸς τῶν Πατέρων ἡμῶν, καὶ αἰνετὸν καὶ δεδοξασμένον τὸ ὄνομά σου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Γένοιτο, Κύριε, τὸ ἔλεός σου ἐφ’ ἡμᾶς, καθάπερ ἠλπίσαμεν ἐπὶ σέ.
Εὐλογητὸς εἶ, Κύριε, δίδαξόν με τὰ δικαιώματά σου. Εὐλογητὸς εἶ, Κύριε, δίδαξόν με τὰ δικαιώματά σου. Εὐλογητὸς εἶ, Κύριε, δίδαξόν με τὰ δικαιώματά σου.
Κύριε, καταφυγὴ ἐγενήθης ἡμῖν, ἐν γενεᾷ καὶ γενεᾷ.
Ἐγὼ εἶπα΄ Κύριε, ἐλέησόν με, ἴασαι τὴν ψυχήν μου, ὅτι ἥμαρτόν σοι.
Κύριε, πρὸς σὲ κατέφυγον, δίδαξόν με τοῦ ποιεῖν τὸ θέλημά σου, ὅτι σὺ εἶ ὁ Θεός μου.
Ὅτι παρὰ σοὶ πηγὴ ζωῆς, ἐν τῷ φωτί σου ὀψόμεθα φῶς.
Παράτεινον τὸ ἔλεός σου τοῖς γινώσκουσί σε.
Ἅγιος ὁ Θεός, Ἅγιος Ἰσχυρός, Ἅγιος Ἀθάνατος, ἐλέησον ἡμᾶς.
Ἅγιος ὁ Θεός, Ἅγιος Ἰσχυρός, Ἅγιος Ἀθάνατος, ἐλέησον ἡμᾶς.
Ἅγιος ὁ Θεός, Ἅγιος Ἰσχυρός, Ἅγιος Ἀθάνατος, ἐλέησον ἡμᾶς.
Δόξα Πατρὶ καὶ Υἱῷ καὶ ἁγίῳ Πνεύματι.
Καὶ νῦν καὶ ἀεὶ καὶ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τῶν αἰώνων. Ἀμήν.
Ἅγιος Ἀθάνατος, ἐλέησον ἡμᾶς.
Ἅγιος ὁ Θεός, Ἅγιος Ἰσχυρός, Ἅγιος Ἀθάνατος, ἐλέησον ἡμᾶς.


1.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요.
2. 우리는 주의 위대한 영화에 대하여 찬양하고 경배하고 영광과 감사를 드리나이다.
3. 주여, 임금이시여, 하느님이시여, 전능하신 아버지여, 주여 외아들이시여, 예수 그리스도여, 성령이시여.
4. 주 하느님이시여, 주의 어린양이시여, 아버지의 아들이시여,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죄지은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소서.
5.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주여,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6. 하느님 아버지 영광 안에 예수 그리스도,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도다, 아멘.
7.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의 이름을 항상 대대로 영원히 찬양하나이다.
8. 주여, 오늘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보호해 주소서.
9. 영화로우신 주여,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 주님의 이름에는 영원히 찬양과 영화가 있나이다.
10.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대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11. 영화로우신 주여, 내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소서.
12. 주여,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었나이다. 나는 말씀드렸나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3. 주여, 주께로 피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느님이니 주의 뜻대로 행하도록 나를 가르쳐 주소서.
14.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고, 주의 빛 속에서 우리가 빛을 보게 되겠나이다.
15. 주의 자비를 우리에게 더 오래 베풀어 주소서. 거룩한 하느님이시여, 거룩하고 전능하신 이여, 거룩하고 영원하신 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16.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거룩하고 영원하신 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거룩한 하느님이시여, 거룩하고 전능하신 이여, 거룩하고 영원하신 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보성인


테오토코스 마리아

지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호성인
및 하느님을 낳으신 여인(테오토코스)
모습 동방전례 이콘의 성모
축일 8월 15일 - 성모안식대축일

성모, 테오토코스 마리아(Θεοτόκος Μαριάμ)는 기독교에서 신의 아들이자, 삼위일체로서 신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다. 성서적으로 루가의 복음서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심을 예고한다, 이후 요셉과 결혼한 후에 그리스도를 잉태하시었으며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그리스도를 낳으시고 평생 동정녀로서 살아가시다가 정교회에선 인정하지 않지만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성모의 육신과 영혼을 천국으로 들어 올렸다고 한다. 가톨릭에선 이는 교황무류성에 의해 선포되어 공식 교리이지만 정교회에선 이를 공식 교리로서 부정한다.[12]

아야 소피아의 성모와 콘스탄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 이콘

테오토코스 마리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보성인(수호성인)이 된 경위는 콘스탄티누스 1세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성모께 봉헌하면서 주보성인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곧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정교회의 중심지인 아야 소피아 대성당을 건설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제 또한 성당을 성모께 봉헌하였으므로 자연스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호성인으로 성모 마리아가 받아들여졌다.

또한, 성모는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으로도 받아들여지지만 특히나 과거 이칭으로 모든 도시들의 여왕이라 불렸던 콘스탄티노폴리스였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크기도 하였다. 모든 기독교인의 어머니임을 관례적으로 인정하므로 자연스레 기독교의 총본산중 하나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마리아의 도시로서 인정받고 있다. 과거에는 마리아의 도시라 하여 마리아오르데라는 별칭 또한 있었으며, 상징적 존재에 있어서 성모는 큰 부분이다.

정교회

동방 정교회(Ανατολική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 "하나인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교회(Ορθόδοξη Καθολική και Αποστολική Εκκλησία)[13]" 줄여서 정교회(ΟΡΘΟΔΟΞΙΑ)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교이자 국가의 존립을 증명하고 국가의 최대 근간이다.

동방 정교회는 초기 기독교의 5대 교회(로마 • 비잔티움[14]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 • 알렉산드리아)에서 가톨릭으로 불리는 로마를 제외한 나머지 4개의 교회(비잔티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를 뜻하는 말이다. 각 4개의 교회는 그리스 전레와 알렉산드리아 전례, 혹은 아르메니아 고대전례를 따르는 교회공동체적 성격을 지니며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서 상호 존재한다.

동방 정교회는 공교회주의에 따라 독선적 결정보다는 공동의 동의된 결정과 신학을 공통적으로 따르고자 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가 모든 정교회 주교들 사이에서 동등한 가운데 첫 번째(그리스어: Πρώτος μεταξύ)로서 공동회의(공의회)의 의장으로 있으며, 실제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에큐매니컬 공의회를 개최한 바가 있다. 정교회의 신학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기본으로 하며, 필리오케 문제에서 그리스어 원본에 따라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출한다는 입장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거룩한 전승에 따라 전통을 지키고, 교부로부터 이어져오는 바른 교리에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생활과 신앙을 실천하고 있다.

성사는 7대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혈성사(성찬), 고백성사, 신품성사, 결혼성사, 성유성사)를 인정하고 있다. 성체성혈성사는 성찬예배로서 특별한 예배(거룩한 리투르기아)라고 한다.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 때는 오리엔트 정교회(알렉산드리아와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와 분화한 바 있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정교회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격은 그리스도 내에서 혼동되거나 섞이지 않으며 그리스도 내에서 존재한다고 공인한 바 있다.

국교로서의 위치를 지닌 국가는 그리스 공화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 중근동의 조지아가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의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 정교회는 국교이지만, 실제로 그 이상의 위상을 지닌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국교로서 위상을 지닌 교회는 그리스 전례를 따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교구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 영토 내와 그리스 전역을 교구로 두고있으며, 대교구이자 총대주교로서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교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 모든 교회를 관할하며 법률에 따라 모든 종교활동에 있어서 정부의 행동을 대교구의 교구장이자 총대주교인 국가원수가 확인해야 한다는 조항에 의해 사실상 모든 종교활동의 총추의 역할을 지니며 이에 따라서 국교로 지정된 대교구청과 총대주교청에 의해 통제의 권한이 존재한다, 법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총대주교청에서 공포하는 결정문이나 선포는 법에 준하는 권위를 지니는것이 현재로서의 위치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 정교회의 권위는 법에 적혀있는대로는 기본법에서 보장한다. "V.종교" 부분에서 국가의 모든 국민이 믿고, 또 국가가 믿는 종교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관할하는 교회를 믿는다는 항목이 존재한다. 국교로서 정교회를 지정하였으며 국민을 넘어 국가적으로 국교로서 공인하고 또 믿는다는 표현까지 사용함으로서 준 초법적 권한을 지닌 막대한 권위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법적 보호뿐만 아니라 행정부도 사업에 있어서 총대주교청의 인가를 받아야만 하며, 총대주교청의 운영 또한 정부의 운영비용과 공유하므로 협력적이면서도 서로 대치하는 기묘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정교회의 공식적 통계로는 전국민의 99%[15]가 믿고있다. 현실적으로도 95% 이상이 정교회를 믿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종교에 비해 압도적이므로 일각에선 종교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는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으나 공식적으로 부인중에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

틀: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 역대 목록


콘스탄티노폴리스 제271대 세계총대주교
바실리오스 4세 | Βασίλειος Δʹ
지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국가원수
동등한 가운데 첫 번째 주교
임기 5년 연임제
성립 38년 설립 / 451년 총대주교 칭호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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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프로토클레토스 안드레아
관저 콘스탄티노폴리스 하기온 아울레
호칭 성하(聖下),Ο Παναγιώτατος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그리스어: Οικουμενικός Πατριάρχη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의 국가원수이자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의 관구장, 동방 정교회의 주교들 가운데 "동등한 가운데 첫 번째 주교(πρώτος επίσκοπος μεταξύ ίσων)이다. 관습적으로 세계총대주교는 모든 정교회 신앙을 가진 이들의 영적지도자로 여겨진다.

기독교의 5명의 초대교회의 총대주교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은 프로토클레토스 안드레아의 후계자로 여겨지며, 초대 총대주교가 안드레아라고 공식적으로 전해진다. 세계총대주교는 영적 지도자로 여겨지고, 또 정교회 세계의 대표자로 여겨지지만 실질적인 권한이 미치지는 않는다. 교황의 경우와 같은 직접적인 주교의 임면이나 교구의 존폐와 같은 중대사를 산하의 교구가 아닌이상 다른 독립교회에 직접적으로 재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

하지만 세계총대주교는 수석 주교들 가운데 유일히 특별한 사안을 다루기 위해 수석 주교나 그들을 대변하는 대리인단으로 구성된 특별 시노드를 소집할 수 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뿐만 아닌 범 정교회 시노드를 소집할 권한이 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로마의 다음가는 모든 주교중 두번째, 정교회 내에서는(로마를 제외한) 동등한 가운데 첫번째 주교로서 직책을 지니지만 모두 이것은 권위적인 역할이 아닌 명예적 역할이 더욱 크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령에서 법률적 권한을 행사할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관구 관구장명의로 공포하며, 세계총대주교로서의 명의는 국내가 아닌 범 정교회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이 더욱 크다. 과거 오스만 제국때는 이를 그리스의 종교적 지도자로 여기었으며, 어떤 경우에서는 민족적 지도자로도 여겨 책임의 역할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시기엔 많은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국내에서 국가원수로서 결재하는 권한 이외에도 그는 행정에도 관여할 수 있는데, 이는 교회의 유지·관리와 같은 교회의 운영에 관한 사안으로 공식적으로 관여할 수 있으나 행정부에 위해를 가할 권한은 없다. 대표적으로 그는 명목상 군사권을 지닌 최고 원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사의 통제권과 사령부 지휘권은 각내평의회에 속해있고 현장 지휘 및 인가권만 근위기사단 대장에게 있으므로 행정부와 사실상 연립은 필연적이다.

그는 더불어 그리스의 아토스 성산 수도원 공화국의 종교적으로 예속시키고 있으며, 자치권을 그리스와 함께 공동으로 보장하고, 모든 수도원의 본지로서 성직자의 교육기관이자 수도기관으로서 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복잡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거치는 정계 성직자도 많다. 세계총대주교는 국가원수로서 외교석상에서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행정구역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의 현급 행정구역
틀:콘스탄티노폴리스 시 행정구역 그림
지도 번호 광역시 광역시 번호 현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광역시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1 동트라키아 현 살라타 에킬리시스
·1 아드리아노폴리 광역시 아드리아노폴리스 2 중앙트라키아 현 불가로피곤
·2 칼케돈 광역시 칼케돈 3 서트라이키아 현 루시온
·3 니케아 광역시 니케아 4 셀림브리아 현 셀림브리아
번호 현도 5 헬레스폰토스 현 칼리폴리스
6 니코메디아 현 니코메디아 7 파블라고니아 현 폰토스
8 옵티마이콘 현 옵티마이콘 9 비티니아 현 빌티코마
10 프루사 현 프루사 11 동미시아 현 쿠티에온
12 서미시아 현 팔레오카스트론 13 트로이 현 다르다넬스

역사

틀: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령의 역사 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에서 역사를 규정할때는 기준점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오스만 튀르크에 의한 함락(AD. 1453)"를 기준으로 삼아 전-후 로 판단한다. 함락 전에는 로마제국이 주된 사관이며, 함락 후에는 오스만 튀르크의 통치하의 정교회사와 도시의 변천사를 다룬다. 기본적으로 오스만 튀르크의 통치를 공식적인 석상에서 굴욕 이란 명칭을 쓸정도로 매우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오스만 튀르크의 통치는 불법적이며, 식민통치와도 같은 억압적인 이교도의 통치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로마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이교도 제국의 수도로서의 콘스탄티노폴리스[16]에서는 우리 정교회의 적법한 정부와 역사가 성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위대한 이상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협정을 통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령이 로마를 전신으로한 새로이 수립된 정부라고 규정한다.

역사관은 철저한 교회 중심, 국가적 관점으로서는 그리스 중심에 가까운 사관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 대학에서는 국가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교육한다. "로마사","교회사","그리스-세계사","통합 세계사" 이러한 소분류를 지니고 교육하는 이유는 기존의 비관적 시각뿐 아닌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개혁파의 주장에 따라 소분류로 갈래가 정해지게 되었으며, 기초교육에 있어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교회사"를 주로 배운다, 로마사와 교회사를 연결시킨 일종의 탕평책이다.

고대

로마사에 있어서 로마의 시작은 보편적인 이야기인 트로이아 전쟁에서 트로이아가 멸망할때에 그곳의 영웅 아이네아스(Aeneas,Αινείας)가 방황하다 라티움에 정착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라티움의 왕 라비누스를 만났고, 그의 딸 라비니아에게 구애하던 자를 결투로 이긴 후 그녀와 결혼하여 새 아내인 라비니아를 기려 "라비니움"을 건설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Ascanius,Ίουλος)가 로마 북쪽 근방에 알바 롱가란 지역을 건설하였으며, 아스카니우스 이후 12번째 왕인 프로카에겐 두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였다. 아물리우스가 승리하자 누미토르를 투옥하고 그의 딸인 실비아를 독신으로 살아야만 하는 여사제로 만들었으나, 그녀는 마르스(Mars,Μαρς)에 의해 잉태되어 두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Romulus,Ρωμύλος)"와 "레무스(Remus,Ρώμος)"를 낳았다.

루파 카피톨리나

이 사실에 아물리우스는 여사제의 본분을 지키지 않은 실비아의 행태에 분노해 두 아들을 티베리스 강에 유기하게 하였으며, 둘은 로마땅의 근처에서 암늑대에 의해 발견되어 젖을 키워 먹였고, 이후 목동 파루스툴루스가 이들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이들은 목동의 자식으로 성장하여 주변 양치기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우연히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누미토르를 만나 그와 혈연임을 알게된다, 이들은 누미토르의 사주로 아물리우스를 살해하고 누미토르는 알비롱가의 왕이되며 누미토르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7개의 인덕이 있는 로마에 정착하고, 도시를 세운다. 이후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말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살해하고 이로서 로물루스가 로마의 왕이된다. 이것이 로마의 시작이다.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의 티베리스강의 팔라티누스 언덕을 따라 성장하였고, 왕정의 로마는 혈통의 대가 끊기며 결국 BC.509년에 왕정은 무너지고 로마 공화정인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이 설립되었다. 왕정이 무너지자 로마는 소수의 귀족가면에 온갖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고 신분투쟁이 일어나 BC.287의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에 의해 트리부스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의 재가(동의)없이 시민에 영향력을 끼친다(법적 효력을 지님)는 것을 확인 및 공식적으로 인정되며 신분투쟁을 통한 로마의 공화정이 확립되었다.

내부적인 신분투쟁 와중에서도 라티움 전쟁, 삼니움 전쟁, 퓌로스 전쟁 등으로 대외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 가 되었으며 이것이 토대로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국으로서 미미한 시작에서 창대한 끝으로 가는것의 기반이 되었다.

중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세사는 2개의 거대한 갈래가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판단하는 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을 모두 고대로 판단하며, 그 이후를 중세의 시작으로 본다. 중세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신 우리의 구원자의 역사와 로마제국으로서의 중세사로 2개의 큰 갈래의 역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라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의 중세사

중세시대의 입성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기원후 1년에 일어난 일이다. 나사렛의 한 여성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듣게 된다.<누가의 복음서 1:26-38> 바로 자신이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나사렛의 위대한 어머니가 되시는 어머니중의 어머니이신 테오토코스 마리아께선 그의 약혼자이시자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나사렛의 요셉에게 밝히셨다.

그는 처음엔 받아들이지 못하시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그에게도 꿈에 나타나 계시를 전하였고 그는 겸허히 받아들이곤 혼사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선 12월의 달밤, 나사렛 지역의 한 마구간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리의 위대한 메시아이시자 유대인의 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셨다. 성경적 근거에 따르면 별빛을 보고 베들레헴[17]까지 직접 나타나 아기예수를 발견하니, 이를 보고선 주 예수를 경배하며 향료를 머리에 붓고서 여러 선물을 하며 탄생을 축복한 사건이다. [18] 이때를 시작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고대시대를 기원전으로, 기원 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중세의 시작으로 본다. 중세시대 역사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따라가며, 로마제국사와 병행되며 진행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요셉을 따라 목수일을 하시다가,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광야로 나가시어 광야에서 세례를 배풀고 있던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가셨다.<요한의 복음서 1:23, 29> 이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어 요르단 강에서 나오시자 성령이 하얀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시었으며 하늘에서 말씀하시길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라 하시었다.<누가의 복음서 3:22> 이때를 동방 정교회에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최초로 발현하신 주현절(主顯節, Epiphany), 다른 말로는 신현 대축일, 주님 세례 대축일 또는 성삼위일체대축일이라고 전통의 교회가 말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 프로토클레토스이신 사도 안드레아. 아직까진 그저 어부에 불과하신 사도께서 그 자리에 계셨었다. 그 이튿날 안드레아는 또다시 요한과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는 호기심에 그분의 뒤를 쫓았고 그리스도께서 뒤를 돌아보시며 무슨 볼일이 있느냐 물으시니, 프로토클레토스께서 말씀하시었다. "선생께서 묵는곳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이라고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요한과 안드레아를 자신이 묵는 집에 들이고선, 그들을 제자로 택하시었다. 이것이 사도(使徒,ἀπόστολος)의 시작이자, 프로토클레토스이신 사도 안드레아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어 이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된 사실상의 "기독교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작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도시는 콘스탄티누스뿐만 아닌 안드레아께서 세우신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어부의 일을 하고있는 성자 사도 베드로와 제배데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오의 복음서 4:19라고 말씀하시자 곧이어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나섰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선 말로 다 셀 수 없는 수많은 기적을 이루시고, 많은 이들에게 영광과 도움을, 또 도덕적이며 철학적이고 말로 다 이룰수 없는 많은 일은 이루신 뒤에 본인의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 예루살렘의 언덕에 오르시었다. 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에 크게 연연하지 아니하시며 제자들과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었고, 자신의 죽음이 이 세상에 뜻을 전하는 바와, 해야할 일을 알려주시니 이를 성체제정이라 하며 성찬례, 혹은 성만찬이라 부르는 성체성사의 유래이기도 하다.

빵과 포도주를 때어주시며 전승에서 이르길, '이 빵은 내 살이오, 이 포도주는 내 피이다.' 라고 하시었다고도 한다. 이후 그리스도는 정치적으로 정적이었던 유대인 제사장들에 의해 위기에 몰리시는데, 이때 천하의 배신자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이스카리옷 유다는 유대인 제사장들과 결탁해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겼다.

산헤드린 의회에서 재판을 거치어 본디오 빌라도[19]의 재판을 받으시는데, 그는 그분의 큰 뜻에 관심없이 "그대가 정말로 유대인의 왕인가?" 라고 묻자 그리스도께선 그렇다 답하시었고, 결국 십자가형을 받으시었다. 그리스도께선 골로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며 조리돌림과 구타, 야유를 받으시며 누군가 보기엔 가장 낮아보이는 수난을 당하시었다.

언덕을 오르시며 쓰리지시자,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 그리스도를 대신해 십자가를 마저 지고 올라서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선 자신의 어머니 테오토코스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네 어머니이시다.' 라고 하시며 맡기셨고, 제자들은 그날 이후로 테오토코스를 자신의 집에 모시었다. 그리고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마태오의 복음서 27:46

이후 그분의 임종에는 두 복음서가 말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의 복음서 19:28,19:30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선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루가의 복음서 24:46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지셔서 무덤에 들어가시었으나, 돌아가신지 사흘 뒤 무덤에서 스스로 부활하셨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며 무덤을 열어보았을땐 비어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후세계에서 선지자들을 만나시고, 부활하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축복해주시고,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스스로를 보이셨으며, 테오토코스 마리아께 나타나시었고, 마르코와 루가의 복음서 모두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눈앞에서 저 하늘로 승천하시어 하느님 우편에 앉아계시게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에서는 사도 안드레아의 행적을 역사로서 판단한다. 그는 오순절 즉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50일째에 사도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당시엔 그리스도교를 핍박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분께선 감옥에 수감되시었으나 천사에 도움으로 탈출해 예루살렘에서 설교를 전파하시다가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크게 얻어맞으시고 물어나시었다.

이후 선교를 떠나시며 당시에도 큰 도시었던 비잔티움에 교회를 세우시었다. 이후 아카이아에서 설교하시었고, 이때 체포되시어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시었는데, 안드레아 사도는 그리스 문자로 그리스도의 첫 문자인 "X"모양의 십자가에 포박되시었고, 형장에 끌려가시던 도중 그는 손을 높게 들고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 다오!' 라며 기쁨에 가득찬 기도를 올리셨다.

형을 언도받으시고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안드레아는 군중에게 형장에 묶여있는 이튿동안 선교를 멈추지 않으셨고, 군중은 그를 내리기를 요청해 결국 그는 땅에 내려왔다, 내려오자 빛이 그분을 감싸시며 그 빛이 하늘에 다시 올라가자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이때 세웠던 비잔티움의 교회 말고도 많은 전승에서 사도 안드레아는 동유럽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셨다. 이러한 전승이 있는곳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조지아, 루마니아, 루스 등이 있다. 이렇듯 사도 안드레아는 두번째의 지위를 가진 세계의 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초대 주교이자 많은 교회의 뿌리가 되시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으로 간주되는 첫번째 총대주교 프로토클레토스 안드레아이다.

로마제국의 중세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정의하는 로마제국의 중세사는 사두체제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을 기준으로 이것을 로마제국으로서의 중세사의 시작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때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의 종교의 자유를 공인한 차례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보편종교로서 확립하고 통치수단으로서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때 주구난방으로 나타난 여러 주장과 학자들은 큰 골칫거리였고 교회 내에서의 분열을 초래하기에 이을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 아나톨리아의 니케아 석호에 위치한 니케아에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였고 이곳에서 니케아 신경을 통해 삼위일체를 확립하고, 아리우스파를 처단하였으며 부활절의 날짜 기준을 보편으로서 명확히 잡았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경을 보완 및 수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채택하며 하느님이 동일한 본질이 아닌 유사한 본질이라 주장한 호모이우시오스주의자나 영지주의로부터 파생되어 영향을 끼친 가현설 등의 교리를 명백한 틀린 교리로서 확정하였다.

이런 일련의 공의회는 기독교의 범문명종교이자 지금에 교회에 있어서 큰 발자취를 남기었다. 더불어 콘스탄티누스 1세는 교회에서도 공공연히 인정하는 로마제국의 명군으로서, 제도적 개혁과 내부적인 통치장치 등의 성과로 제국이 대를 이어도 안전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를 이어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등의 보편교회의 확립에 앞장섰고 결과적으로 가톨릭 이라고 불리는 보편적 신앙이 확립되었다. 가톨릭의 본질적 내용인 보편적 신앙의 대해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또한 이를 주장하고 있으나, 관례적으로 가톨릭은 서방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존재하여 그들 스스로는 에큐메니컬 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테오도시우스를 대제로 공공연히 인정하는 부분은 바로 이교도를 뿌리뽑았다는 것에 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칙령과 무력을 통해서 동물을 바치는 형태의 기독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이교도적 제의를 금지하였다.[20]더불어 직접적으로 이교의 숭배를 금지하고 보편종교인 기독교를 의무화 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었다.

또한 이 시기에 오스만 튀르크와 서방의 제4차 십자군을 제외하고선 난공불락의 요새라 불렸던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이때 그 위세를 완공에 가깝게 하였으며, 유목민들의 침공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다. 이때 훈족(헝가리 등)의 왕 아틸라에게 공물을 바치어 이들을 회유한 적도 있으나 이것은 로마가 자존심을 굽힌 것이 아닌, 쓸데없는 국력 손실을 피하기 위한 지혜라 설명한다. 더불어 마르키아누스는 이러한 공물을 바치려 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일시적인 지혜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훈족)은 로마의 위세 앞에서 스스로 몰락하여 토착민이 되었다.

한편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는 때로 삼는 로마 정통의 서로마 마지막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의 기일인 480년을 종식으로 서로마는 멸망하고 적통의 로마는 동로마 제국만이 남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경제적으로 아나스타니우스 1세의 통화 및 세제 개혁을 단행하여 내부적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였고, 그를 이어 풍부한 안사정을 기반으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는 로마의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의 고토수복을 위한 위대한 전쟁[21]은 큰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하지만 유스티아누스 1세의 정치적 실책으로 니카 폭동(그리스어: Στάση του Νίκα)이 있는데, 이 사건때엔 성인 테오도라 황후의 폭동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을 용인한 유스타이누스 1세는 폭동을 진압[22]하였고, 몇 안되는 실책이면서도 정치의 안정화가 이루어졋다.

이후 정치의 안정화와 중앙권력화가 공고해짐과 동시에 동고트 왕국의 왕 아말라스빈타가 죽고,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고토수복 계획에 있어서 동고트의 왕은 서방교회의 교황인 성 아가피토 1세에게 계획을 취소할것을 부탁하였고, 이에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방문하였다. 그는 방문하고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23]의 인선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단성설을 주장하는 안티모스의 착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그는 언변과 전통적 신앙을 통해 유스티아누스 1세를 설득해, 단성론을 지지하는 안티모스를 파직하였고 전통신앙을 지지하는 총대주교인 메가스가 착좌하며 교회의 전통과 바른 교리를 보호할 수 있었다, 다만 이탈리아 고토수복에 대해서는 결국 실행되어졌다.

더불어 법제도의 개편과 더불어 로마 법대전을 완성해 법률을 바로세웠고, 동방의 페르시아와는 50여년의 평화를 약속하였으나 발칸반도에서는 슬라브족의 침공이 있었다. 이때에 동부에서 내려오던 그리스-로마 문화는 새로이 부상하는 위대한 기독교 철학과 문화로 인해 이들은 흡수되었고, 성찬전례의 발전과 지금도 꿋꿋히 서있는 위대한 아야 소피아 대성전이 건립되었다.

한편 로마의 권역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이슬람 제국이 드리웠고 서쪽에서는 이민족의 침공이 있었으며 흑해는 슬라브족에 의해 영유권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602년에 마우리키우스가 장군 포카스에 의해 암살되며 쿠데타가 일었으나, 그는 암군이었고 결국 카르타고에서 성스러운 이콘을 뱃머리에 붙이고 온 이라클리오스 1세에 의해 제국은 다시 안정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그의 문화적 정책은 실로 훌륭하였다, 라틴어에서 예전부터 쓰이던 코이네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삼았으며 하느님의 권세와 제국을 위한 성전으로서 포카스의 쿠데타에 의해 잃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복을 위해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였으며, 성십자가를 회수하였다.

하지만 634년에 크테시폰이 함락되며 결국 북아메리카의 카르타고 속주와 메소포타미아를 거의 상실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도 상실하였으며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아나톨리아로 제국은 축소되었다. 하지만 수도까지 그 마수를 뻗히려는 아랍인들에 대해 해전에서 그리스의 불과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승리하며 더이상의 축소를 막을 수 있었다. 한편 불가리아에서는 도나우강 아래로 내려오는 슬라브족에 의해 그들에게 격퇴당하며 결국 불편한 공존을 이어가게 되었으며,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도시귀족에 의해 물러나며 헤라클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레온 3세 황제는 외부적으로는 이슬람을 격퇴하고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등의 지역을 방어하며 버티기도 했으나, 그가 성상파괴론에 관한 내정에 있어서 큰 실책을 보였다. 이콘을 금지한것이다. 이에 이코노둘레스라 불리는 이콘 옹호론자들은 반발하였고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며 결론으로서 "성화에 바치는 공경은 성화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한 것이지, 성화를 숭배하는게 아니므로, 성화 공경은 절대 우상숭배가 아니다." 라는 바른 결정을 내리게 되며 이콘을 지킬 수 있었다.

허나 레온 5세가 다시 이콘을 억압하려 하자 843년에 테오도라 황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의 대항으로 이콘을 다시금 지켜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성상파괴론적 논쟁과 사건들은 단성론의 의한 혼란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때 즈음 성 포티오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과 대립하였으며, 당시 로마와 접경하며 불편한 공존을 이어가던 불가리아에 교황 니콜라오는 정교회에서 절대적으로 반대하며 성부로부터 성령이 나오신다는 교리에 반하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온다는 필케오케 교리를 설파해 큰 공분을 사게 되었다.

이에 필케오케를 단죄하고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을 폐위하였으며 루트비히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이후 동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샤를마뉴에게 프랑크의 왕이자 서로마 황제로서 대관을 해주었고 이는 동로마로서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는 로마 황제가 아닌 그저 프랑크인의 황제로서 인정하는것으로 동로마는 받아들였다.

이후 불가리아의 짜르인 보리스 1세의 아들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하였으나 헝가리와 협조로 이들을 외교적으로 물리쳤으나, 군사적으로 불가로피곤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불가리아는 코린토스까지 남하하며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였고 아드리아노폴리스의 함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성 끝에 패퇴시키며 불가리아가 슬라브인의 침공을 받으며 그들을 크게 격퇴하였고 고토를 수복하였다.

이후 바실레이오스 2세는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말도안되는 대승을 거두었고, 끝내 불가리아를 멸망까지 몰아가며 도나우까지 밀어내었다. 이후 슬라브인들은 흑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고, 크림반도의 무역거점을 공격하는 등 불화를 빚었으나 루스의 짜르인 블라디미르 1세가 포르피로예니타 안나 공주와 혼인을 맺으며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이들을 온전히 개종하기 위해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형제에 의해 선교사업은 크게 이루어졌고 든든한 동맹으로서 모스크바와 키예프 등에 큰 교회가 세워졌다.

이후 1054년에 이을어 동서교회의 균열은 걷잡을수 없게 되었고 그 해 6월 16일 토요일 오후에 성체 의례 중에 교황 특사 세 사람이 아야 소피아에 들어와 제단에 파문 교황 칙서를 놓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계총대주교 또한 그들을 파문하며 쌍방 파문으로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하지만 제국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고 바실레이오스 2세는 후계문제를 끝내 해결못하고 죽으며 소아시아에서의 셀주크 튀르크의 확장과 노르만족의 침공, 달마티아 상실등으로 저물어가고 있었으며 아르메니아의 군사귀족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가 황제로서 선출되 대적하였으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그는 미하일 7세 두카스에게 양위해야만 했다, 하지만 미하일 7세 두카스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한편 셀주크 튀르크는 니케아까지 밀고들어와 이곳에 도읍을 정하며 위기는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이때 콤네노스 왕조의 출범으로 알렉시오스 1세는 셀주크를 격퇴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제1차 십자군이다. 이때 온 노로드족 장군과의 불화가 있었고, 안티오케이아 공성전에서 제국이 돕지 않자 그들은 안티오케이아 공작을 자처하며 선전포고를 했었고, 1108년에 데아볼리스 조약을 통해 일단락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몰락

안드리니코스 3세가 승하하고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일어나며 6년간 이어진 내전에 제국은 황폐한 상태 그 자체였다. 비잔티움 내전 이후 산재해있던 여러 십자군 국가들과 코소보 전투 등을 통한 오스만 튀르크의 확장은 공격적이었다. 1453년 4월 2일엔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8만여명에 달하는 군대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고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함락되자 육탄전으로 뛰어들어 전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된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콘스탄티니예, 혹은 이스탄불이란 이름으로 개칭되며 로마의 수도에서 오스만의 수도가 되었다, 일천년 역사의 제국은 이렇게 몰락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는 기독교 제국의 몰락과 이슬람 제국의 입성으로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이르되 튀르크의 암흑기의 시작이었다.

각주

  1. 가톨릭 교회에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라고 하지만, 먼저 이루어진 공의회엔 에페소 공의회에서 "크리스토토코스(Χριστοτοκος)"를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고,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를 공식적인 수식어로서 동의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2. 그리스-터키 전쟁
  3. 교회력
  4. 정부력
  5. Grand Palais (Μέγα Παλάτιον, Great Palace) de Constantinople, 삽화, 앙투안 헬 베르트
  6. 행정부 내무성 입장문 2018.10.3
  7. 사실상 관습상 국가로도 불리는 테오토코스 마리아와 대영광송은 공식적으로는 성가로서 쓰인다.
  8. 수호성인(守護聖人)과 동의어이다.
  9. 에큐메니컬 총대주교 라고도 한다.
  10. 신약 성서의 「요한의 묵시록」(1:8, 21:6, 22:13)
  11. 신약 성서의 「요한의 묵시록」(1:8, 21:6, 22:13)
  12. 정교회에선 이를 초대교회의 전승으로만 치부하며, 영혼이 들어올려진것은 인정한다.
  13. 정교회 출판사 - 《올바른 믿음과 삶 정교회》에서 발췌
  14. 당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나 새 로마가 아닌 비잔티움이라 불렸다.
  15. 각내평의회 내무성 통계상 《국내 종교에 관한 인구통계 2018》
  16. 당시 오스만 튀르크는 "콘스탄티니예", 현재 튀르크 민족은 "이스탄불" 이라고 지칭
  17. 여러 역사적 사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이자 출생지를 이곳이라 말한다.
  18. 이때를 서방 기독교에선 최초로 주께서 신성(神性)이 나타난 사건인 주현절로 기념한다.
  19. 당시에는 유대속주의 지방관이었다.
  20. 이 사건은 기독교 이외의 번제를 올리는 종교에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유다교가 이때 큰 영향을 받았다.
  21. 실제로 교과서에서 위대한 전쟁이라 서술한다.
  22. 교과서에 따라 진압, 혹은 전차경기장 학살 이라 기록한다.
  23. 당시엔 5개 교구중 하나였으나, 로마에 버금가는 교회로서 공공연한 인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