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협정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1922년 11월 톱카프 궁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협상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스, 오스만, 쿠르디스탄은 오전 10시에 책임자가 모두 참가하였으며 향후 영토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에 모든 대사들 및 담당자와 책임자, 각국의 대표자들은 해당 내용에 동의하고 서명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

1.이 조약은 선제적으로 있던 조약인 세브르 조약을 대체한다.
2.현재 국제통치령에 있는 마르마라와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해협지역 및 아나톨리아의 근접지와 트라키아 전역을 국제적 합의에 따라 세계총대주교가 공인하는 총대주교청으로 기능한다.
3.총대주교청은 주권을 지닌 국가이며, 국방의 권리는 국제연합에 헌납한다.
4.오스만 제국은 금의 단위로 8천만 루블을 그리스와 러시아, 총대주교청에 배상한다.
5.우리는 이 사항에 모두 동의한다.

연합왕국 대사 테디 베일웨이
프랑스 공화국 대사 페루에 프랑수아
그리스 왕국 국왕 콘스탄티노스 3세
숭고한 오스만국 술탄 압뒬메지트 5세
쿠르디스탄 대통령 모하메드 라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콘스탄티노스 6세

위 조약문은 결의문인데, 실제로 그리스가 병합하고자 하였으나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격분하였고 거부하였다. 이에 러시아와 그리스는 합의안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바지사장으로 세워 임시적으로 다스리게 하고 차후 회의에서 이를 온전히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 결과에 따라 오스만은 배상금과 함께 전쟁의 패배의 대가를 치르어야 했다. 오스만에 지원만 할뿐 전면적 지원을 꺼리던 서방은 오스만을 버리는 패로 써 러시아와 그리스를 달래려 애썻고 결정적으로 전쟁을 할 겨를이 없던 터였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의 사실상 괴뢰국으로 급조되어 세워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해당 조약 직후 오스만에서 술탄에 반하는 움직임과 함께 청년 튀르크당은 쿠데타로 술탄을 몰아내고 임시정부를 세웠으며 쿠르디스탄의 내전개입으로 청년 튀르크당은 합의안에 따라 주권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아테네 중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속여부에 대해서 그리스 왕국의 아테네에서 회담이 열렸다. 1923년의 이 회담에서 러시아의 공격적 남부확장을 언제나 우려하던 영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가 바티칸과 같이 신권국가로서 중립을 지키며 유지하는것이 가장 바른 처사라 말하였고, 이에 러시아에선 그리스에 합병되는것을 계속 요구하였으나, 영국은 협상테이블에선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상에 있어서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통행과 정박이 가능하다면 이에 반발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었고, 정박에 있어서 민간의 정박을 허가하고 통행의 자유를 약속하며 세금은 총대주교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주권국가로서 걷는것이 합당하다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리스의 합병이 아닌 그리스의 괴뢰국을 암암리의 인정하는 아테네 밀약까지 체결되었다. 이러한 물밑정치에 총대주교는 개입하지 못하였고, 콘스탄티노스 3세는 그리스의 메갈리 이데아를 성공시켰으나 반쪽짜리 성공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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