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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서의 분기점은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증손자 경은군 이재성이 조선의 왕으로 즉위함으로서 분기점이 시작된다. 왕으로 즉위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방과의 문호개방이었다. 일찍이 세자 시절 청에 방문해 외국 열강의 힘을 경험한 그는 조선을 서구화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는 조선이 곧 중화이며, 중화로 나아가는 길은 이전 송, 명 왕조와 같이 활발한 교류를 통한 성장임을 천명했다. 그렇게 마침 그레이트 게임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 극동 지역 일대의 지도를 그리러 온 영국 해군이 조선에 보급을 위해 인천에 방문하였다. 인천에 영국인들이 왔다는 소문은 조정에 빠르게 알려졌고, 영은군은 그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내어주고 특별히 대우할 것을 명한다. 영국인들은 한성에 방문하여 한성에 청의 문물들이 수도 없이 널려 있는것을 발견한다. 당시는 청이 아편 전쟁을 겪은 후 영국과 반 강제적으로 교류하고 있던 시기이긴 하였으나, 영국인들은 조선에서 훨씬 값싼 청 문물 (일부는 불법적으로 입수한)을 교류하고자 결심하게 되고 돌아간다. 그로부터 1년 뒤 1888년, 다시 방문한 영국인들은 조선과의 교역로를 확보하는 조약을 맺었다. (강화도 조약, 1888년) 조약의 내용엔 양국 간 거주하는 자국민의 신변을 보장하고, 홍콩, 싱가포르-인천, 부산을 잇는 교역소를 설립하고 유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조선에는 이전보다 수 배는 증가한 서양 문물이 흘러들었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에는 1인당 GDP가 아시아 최고를 달성, 전체 GDP는 청, 일본을 이은 3위를 달성하고 경제 성장률도 최고를 달성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1899년,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생해 자국민 대한제국 귀족이 피살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대한제국 정부는 분개하여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기병대 800명을 파병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으로 구성된 7개국 연합군에 합류하여 8개국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이는 대한제국의 첫 대외 분쟁이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한 대한제국은 간도에도 병력을 보내 간도를 점령하고, 요동 반도까지 나아가는 성과를 보인다. 개전 2개월 후 연합국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어 청나라는 항복을 선언한다. 이후 신축조약이 발표 되며 톈진에 조계를 확보하고, 서간도와 요동 반도를 보호령으로 얻어내었다. 이때 대한제국은 헌법을 제정해 의회를 조직하고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는 정치적 개혁 또한 이루어내었다. 1901년, 최초의 의회가 설립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이완용이 선출되었다. 이완용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노력했다. 1914년, 이완용의 뒤를 이은 2대 내각총리대신으로 김옥균이 선출되었다. 김옥균이 선출된 후 4개월 후, 유럽에서 불가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대한제국은 동맹국의 일원으로 러시아 제국의 프리모르스키를 점령하고, 중국의 이탈리아 조계, 프랑스 조계, 러시아 조계 등을 같은 동맹국인 일본 제국과 분할 점령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승전국으로서 대한제국은 유럽에 비해 피해를 덜 입었고, 그로 인해 경제적 호황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대한제국을 강타했다. 사회주의 극좌 정당인 대한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자 파업과 파시스트 극우 정당인 신한청년단이 급부상했으며 경제성장률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최초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영은궁 이재성이 사망했다. 그는 최초로 죽을 때 까지 외자를 사용하지 않은 왕족이었다. 그의 묘호는 성조(成祖)가 되었다. 2대 황제는 이재성의 조카 신익왕 이건이 되었다. 이건은 즉위 후 의회에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거국일치내각을 수립하라 명했다. 여당인 대한독립당과 제1야당 사회민주당, 그리고 새로이 급부상한 신한청년당 세 정당이 거국일치내각을 결성했다. 총리는 서재필이 지명되었다. 거국일치내각은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회민주당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가 주도 공사 정책을 실시했다. 1930년, 대공황 극복은 순조로이 진행되는 듯 했으나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대한제국 관동군 사령관 석원완이 돌발적으로 만주의 봉천 군벌을 공격하고, 장쭤린을 사살했다는 소식이었다. 거국일치내각은 이에 대해 석원완을 처벌하려 했으나 신한청년당측의 반대로 석원완을 처벌하지 않고 석원완의 관동군이 외몽골과 만주를 관리하도록 결정했다. 그렇게 1936년, 대한제국은 이제 유럽에서 시작될 새롭고 거대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