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번의 난

Ernst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5월 26일 (일) 15:28 판
삼번지난
三藩之亂
1673년 ~ 1711년
숭정 47년 ~ 연흥 8년
1. 남명과 번국

기본적으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장강 이남의 중국 대륙의 지리에 익숙치 않았는데 이들이 중원을 지배한 것은 약 600년 전 금나라시절 화북 지역에 한해서였으며, 장강 이남으로는 내려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강 이남은 화북 지역과 달리 강과 산악 지형이 많아서 청군의 최대 전력인 기마병을 활용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누르하치, 홍타이지와 같은 청나라 지도층도 화북을 지배했던 금나라 재건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중국 전체를 제패하는 것까지는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고, 순식간에 장강 이북을 차지했음에도 명의 잔존 세력을 추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당시 청나라의 실세인 도르곤 역시 이러한 이유들로 남진을 주저했다.

한편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나라가 망했지만 남은 명나라의 황족과 유신들은 남경과 광동에서 각각 칭제한 후 명나라의 계승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본래 명나라는 남방에서 시작한 왕조이기에 정강의 변으로 급히 쫓겨온 남송보다 비교적 나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화북에만 머무른다면 다시금 남북조시대 또는 남송 시절처럼 장강을 경계로 장기간 양국이 대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명조의 신하였다가 청조에 귀순한 홍승주는 남명을 놔두면 커다란 후환이 될 것이라고 도르곤과 순치제에게 계속 상주했고, 결국 청나라는 남명을 정벌하기로 한다.

전술했듯이 청나라의 만주족과 몽골족들은 남방의 지리에 무지했기에 오삼계를 비롯한 한족 항장들과 그 휘하의 한족 병사들이 남방 정벌군을 이끌게 되었다. 청나라 측은 이들을 아예 자치권을 가진 번국의 임금인 번왕(평서왕 오삼계, 평남왕 상가희, 정남왕 경중명)으로 봉했는데 중국사에서 한고조이래 공신이라도 황족이 아닌 신하를 "왕"으로 봉한 예가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후대에 못지 않게 이들은 만주족의 중국 대륙 장악에 있어 최고의 공신들이었다. 경중명과 상가희가 청에 망명하면서 데려온 수군과 홍이포 전력 덕분에 청나라는 명군의 강력한 화력에 같은 화력으로 맞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며, 심지어 오삼계는 청나라에게 천혜의 산해관 문을 열어준 그야말로 일등 공신이었다.

만주족은 지리에도 어둡고,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풍토병이 많은 장강 이남을 공략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예 병력인 만주병과 몽골병이 아닌 한족 출신 번왕들과 그 휘하 세력을 활용하기로 한다.

항장 출신 번왕들은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남명을 철저히 공략했고, 이들의 손에 남명이 멸망하면서 그나마 남은 주씨 황족들과 명나라 잔당들은 모조리 소멸한다. 청나라는 해당 번왕들이 정벌한 지역들을 영지로 하사했고, 이에 운남성과 귀주성는 오삼계에게, 광동성과 광서성은 상가희에게, 복건성은 경중명에게 귀속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만주족은 이이제이를 역이용한 셈이었다. 이렇게 만주족은 한족 출신 항장들과 그 세력들을 이용하여 손쉽게 남명을 포함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제압했고, 차후 재발할 수 있는 한족들의 저항과 외부 세력의 침공에 대비하면서도 청나라 편에서 공을 세운 한족 인사들을 후대할 겸 그들에게 번왕의 직위를 내려 남방 지역의 군사적/행정적 업무를 담당케 했다.

그러나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만주족 중심인 청나라에게 제국 내에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강대한 한족 세력들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 예로 삼번은 청 조정의 허가 없이 임의로 자신들의 직할 병력을 증강하거나 세수 지역을 넓혔을 뿐 아니라 적극적 상행위로 부를 축적했고, 번 내부의 인사 뿐 아니라 주변에 위치한 각 성들의 인사권에도 줄곧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오삼계는 그 정도가 심했는데 운남 일대의 소수민족들을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평시에도 경정충이나 상가희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수만 명의 군대를 유지했고,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운남과 귀주에서는 청 조정의 인사권보다 오삼계의 인사권이 중시되었다.

여기에 남송 시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장강 이남의 경제력이 장강 이북의 그것을 능가함에 따라 삼번의 경제력도 청나라에 위협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미 삼번의 한 곳인 광동성의 마카오는 개항되어 있어서 서양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더욱이 장강 이남은 명나라 시절 농민 반란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기에 명청교체기 당시 피폐해진 화북에 비해서 경제가 훨씬 안정적이었기에 청으로서는 삼번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통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함부로 번을 폐지할 수도 없었다. 전술했듯이 해당 번왕과 그 세력들은 명청교체기에 청나라를 위해 엄청난 공을 세웠으니 명분 상 하루아침에 박대할 수 없었고, 만주족 중심의 청나라 중앙군은 장강 이남의 지리에 익숙치 않았으며, 당시 삼번의 군대는 대다수가 한족으로 소수인 만주족의 병력보다 규모가 더 컸을 뿐 아니라 남명과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토벌하면서 얻은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게다가 당시 장강 이남은 반청감정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그나마 남방 지역의 통제력을 구축한 번을 폐지하려다가 되려 반청복명세력들이 겉잡을 수 없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로 청나라 조정은 남명이 완전 진압된 지 한참 지난 1664년에도 남명 토벌을 위해 설치한 삼번을 폐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2. 강희제의 철번과 오삼계의 궐기

1661년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 초기에도 이러한 삼번의 위세와 청 조정의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오삼계가 형식상 운남, 귀주 두 성의 지배권을 조정에 반납한 거 뿐이고 실질적 지배권은 여전히 오삼계에 있었다.

그러나 1669년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정의 최대 권력자인 구왈기야 오보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숙청당하고, 젊은 황제 강희제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강희제는 삼번의 폐지, 즉 철번을 마음 속으로 강하게 결심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황제의 인사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삼번 지역에 자신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임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평남왕 상가희였다.

1673년 상가희는 자신의 나이가 많고 병이 많음을 이유로 평남왕 자리를 장남 상지신에게 세습해줄 것과,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원했다. 실제 번왕의 세습은 정남왕의 3대 세습을 통해 충분히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넙죽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으나 평남왕작의 세습은 허락치 않는 철번을 결정했다. 그리고 상가희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 아쉽고 섭섭하긴 했지만 청의 개국 공신으로서 황명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강희제도 이 쿨한 결정을 환영하며 상가희를 띄워주기 바빴다.

문제는 나머지 두 번왕이었다. 황제의 평남 철번이 주는 메시지는 명백했다. 위기감을 느낀 경정충과 오삼계는 뒤따라 “상가희의 예를 따라 우리도 철번하게 해주세요”라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다. 그리고 강희제는 즉시 응 그래 철번이라며 이 상소문을 넙죽 받아먹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허서리 송고투와 같은 조정 내 철번 반대론자들은 철번을 강행할 경우 삼번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호응하면 쉽게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며 안정을 위해 철번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와 철번 찬성론자들은 "삼번을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하고 저들의 인질을 우리가 잡고 있으니 섣불리 반란 못 일으키고, 설사 일으킨다 쳐도 오삼계 뿐,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의 입장을 내세우며 초강경 모드로 돌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삼계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오삼계의 측근과 가신들은 대부분 궐기할 것을 주장했고 오삼계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려 1673년 11월, 청이 멸망시킨 명의 복수와 오랑캐 토벌을 대의로 내세우며 황제가 임명한 운남순무(雲南巡撫) 주국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삼번십국시대
[ 펼치기 · 접기 ]
대원
좌량
준가르·섬서
대원
북원
북직례·섬서·산서
번왕
소초
하남
천자국
대청
북직례·산서
대원
우량
북직례·요동
삼번
오주
운남·귀주·사천·광서
삼번
상교
광동
삼번
경민
복건·강서
남명
진송
호광
남명
서월
남직례·절강·하남·산동
삼번십국시대 ·  사황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