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20군 (서태평양 연대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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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6일 (목) 15:01 판

개요

강서12군은 문종 6년(1456년) 제4차 요동정벌로부터 시작해 성종 1년(1482년) 조원전쟁까지 50년간의 원정을 통해 조선이 확보한 압록강 이서 영토이다. 강(江)은 압록강을 의미하므로, 함께 정벌한 압록강 중류의 건주위와 상류의 호랑위 지역에 설치한 3군을 합쳐 강서15군으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옛 요동도지휘사사 관할 지역만을 따로 떼어 강서12군으로 부르고, 건주·호랑위 땅에 설치한 3군은 여진을 정벌하고 설치했다는 점에서 세종조에 설치한 서북4군과 합쳐 서북7군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조선 초기까지는 '요동'으로 칭했으나, 정작 조선이 요동 진출에 본격적으로 나선 15세기 후반으로 가면 조선령만 따로 떼어내 '강서'로 칭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이는 조선이 군사적으로 충돌 가능성이 높은 후원은 물론이고, 명목상 요동의 종주권을 가진 남명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압록강 이서지역의 버려진 땅들을 부득이하게 위무할 뿐'이라는 명분으로 강서를 강조한 것이다. 이후 조선이 가리키는 '요동'은 엉뚱하게도 남은 요동도사의 영역, 즉 요하 이서지역(요서)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가, 강서영토를 상실한 한국이 건국된 이후로는 다시 원래대로 요하 이동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환원되었다.

역사

조선은 과거 고려 영토에서 이탈한 바 있었던 동북면 지역에서 발흥했기 때문에, 북진은 곧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세우는 사업이었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고려만큼이나 북방영토 개척에 적극적이었다. 비록 국력 문제로 제2차 요동정벌 도중에 칼끝을 돌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창하기는 했으나, 이성계와 정도전은 다시 제3차 요동정벌을 추진하기도 했다. 요동정벌을 앞장서서 추진한 정도전이 죽은 이후로는 서로에게 우호적인 영락제와 태종이 각각 집권하면서 요동 방면으로의 진출은 관심에서 멀어졌으나, 여진족에게 막강한 무력과 카리스마로 인정받아 '대추장'으로 군림했던 이성계의 사후 여진족의 변경 침탈이 점차 심해지면서 마침내 세종 대 압록-두만강 자연국경선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서북 4군·동북 6진 개척이 추진되었다.

4군6진의 설치 자체는 세종 당대에 완수되었으나, 개척사업 초반인 1436년, 천보의 변 (서태평양 연대기)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발생했다. 북방개척의 경쟁자인 동시에 건주위 견제의 파트너이기도 했던 북명이 무너지면서, 명이 요동에 설치한 요동도지휘사사는 명 본국과의 연계가 끊어지고 붕 떠버린 상태가 된 것이었다. 조선인과 발해인이 많았던 지역 특성상 일각에서는 조선 귀부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요동총병관 조의(曹義)는 산해관과 압록강에 의지해 남명에 신종하며 자립을 택했고 조선 역시 국경 안정을 위해 이에 호응하며 일부 장수들이 조선에 귀부하려는 움직임도 거절할 정도였다.

이런 기조가 변화한 것은 문종대 들어서였다. 조선은 세종 말기 내내 요동을 극력 지원해왔으나, 건주위가 의주-요양 가도를 침범, 점거하여 교통이 끊어지고 요양성이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에 문종은 직접 4만의 군사를 동원해 요양가도의 여진족을 섬멸하며 진군하는 제4차 요동정벌(서태평양 연대기)을 단행해야 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조선의 전시체제는 신종 2년(1467년) 정건주위로 이만주를 참살하고 건주본위를 조선이 영토로 흡수하여 서북4군이 서북7군으로 개편되는 1472년까지 지속되었고, 더 이상 강변방위를 요동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인식한 조선은 1457년 요양 입성 후 조선과 인접한 장백산맥 이남의 정료좌위와 금주위를 넘겨받아 1458년 정료좌위 지역의 의주 대안에 진강군(鎭江郡)을 설치했고, 1461년 정료좌위 소재지에 봉황군(鳳凰郡)을, 1462년 금주위 지역에 금성군(金城郡)을 설치하였다.

문종대 강서3군의 설치 이후, 신종(이홍위) 시기에는 주로 압록강 중상류의 건주3위에 대한 정벌과 영토화에 주력했으나, 1467년 건주위의 멸망과 1472년 건주3군의 설치가 완료되면서 조선은 다시금 요동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요동은 올량합의 지속적인 침공에 철령위가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었고, 마침 조상이 고려계였던 철령위지휘첨사 이춘미(李春美)는 조선에 귀부와 함께 원군을 청했다. 요동의 최전선이었던 철령위의 편입은 조선이 본격적으로 올량합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조정 내에서도 의론이 분분한 가운데, 신종은 결국 제3차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태조의 유지이자 요동 조선인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춘미의 귀부를 받아들여 철령위와 삼만위를 접수하고, 1478년 철령군(鐵嶺郡)과 개원군(開原郡)을 설치했다.

후원은 조선의 철령위 병합을 요동 전역에 대한 병탄 의지로 받아들여 강력하게 반발했고, 결국 신종이 후사 없이 사망(1481년)한 직후 조카 잘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는 어수선한 틈을 타 후원의 타이시 에센이 요동을 전격 침공하면서 조원전쟁이 발발했다.(1482년) 그러나 후원의 침공은 결국 요하 방어선에서 저지되었고, 요동 침공의 실패로 에센이 실각한 후 후원 조정이 지리한 내분에 휩싸이면서 조선은 본격적으로 요동 경영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진행중이던 1482년 요양성에 요주목(遼州牧)을 설치했고, 1483년 복주위 자리에 복성군(復城郡)을, 1485년 심양위 영역에 심양군(深陽郡)을, 1486년 해주위 자리에 해성군(海城郡)을 설치했다. 이어 1491년 금성군 도서부를 떼어 장산현(長山縣)을, 요주목 동쪽을 떼어 요산현(遼山縣)을 설치하고, 1496년에는 요건도(遼建道)가 설치되는 동시에 심양군 동쪽에 무순현(撫順縣)이, 진강군과 금성군의 일부를 떼어 장천현(庄川縣)이 독립하면서 강서 전역에 총 1목 7군 4현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후

이렇게 반세기에 걸친 군사력 투사를 통해 확보한 강서 영토는 1세기에 걸쳐 '고토수복'을 이룬 조선인들의 자부심으로 남았지만, 동시에 영토 유지를 위한 막대한 부담을 야기했다. 조선인들은 조선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압북(鴨北)지방에서 벼농사를 지어보려 무수히 노력했으나 압록강 연안을 벗어나지 못했고, 강서에서의 농사는 쌀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보리나, 그나마도 조선인들은 재배에 익숙하지 않은 밀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1] 강서 방위에 들어가는 비용은 양호(兩湖; 호서/충청도와 호남/전라도)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으로 충당해야 했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예당·호남평야에 대한 대대적인 개간과 서해안 조운로 최대의 난코스였던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한 굴포운하의 개통이 이어졌다. 이로써 한반도 제2의 섬인 태안도가 탄생했다.[2]

성종대 조선은 이렇게 확보한 북방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개혁이 잇따랐다. 가장 큰 변화는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애민주의가 퇴조하고, 국방력 강화를 위한 세제 및 군제개혁이 활발하게 추진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전분6등법이나 연분9등법 등 농민 부담을 경감해주기 위해 도입된 각종 제도들은 전분3등법과 연분3등법으로 대폭 손질되었고, 연분9등법 체제에서 하하년 4두였던 법정 최저부과선이 연분3등법에서는 9등법의 중하년에 근접한 9두로 껑충 뛰어오르는 등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3] 이로 인한 양민층의 불만이 가중되자 지배층의 고통분담을 통해 불만을 달래려는 조치로 관수관급제를 실시하여 집권층에 대한 토지분배를 원천 차단하고 균역법 시행으로 사족층에게도 군비부담을 명문화했으나, 이러한 조치들이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성종이 사망하고 의종(이융)이 즉위하여 성종대 긴축상태에 들어간 왕실 재정을 무제한으로 확대하고 내수사직계제를 통해 조세제도를 교란시키면서 조선의 부담은 한층 가중되었다.

  1. 그나마 압북에서도 잘 자라는 호밀 재배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발효빵 기술이 발달한 유럽에서도 사람 먹을 게 못된다고 천대받던 곡물이 쌀 지상주의자(...) 조선인들 입맛에 맞을 턱도 없었고, 발효를 포기하고 만들어볼만한 국수나 만두, 난 계열로 만들기엔 호밀은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결국 강서에서 호밀은 주로 동물 사료로 쓰였다.
  2. 반대편에서는 대동강의 지류인 재령강을 해주만이나 예성강까지 연결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쪽은 끝내 실패했다.
  3. 이는 수령들이 매번 수확량을 하하로 보고하면서 조세수입이 바닥을 친 탓이 컸다. 신종대까지는 자신이 직접 보고 자란 조부 세종대에 확립된 9등법 체제를 어떻게든 끌고 가보려 했지만, 도저히 답이 안나오자 결국 세종의 증조손이었던 성종은 이걸 포기해버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