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광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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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광지치(중국어: 國光之治)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직후, 중국 대륙에 대한 영토 확장을 위하여 군인 내각(軍人內角)이 주도하던 제국주의 정책이다. '국광(國光)'이라는 의미는, 국가의 영광을 드높이라는 뜻이다.

정책 진행

서광회 사건(曙光會事件)으로 정당 정치의 몰락을 가져온 군부는 1932년 1월, 만주사변의 영향을 받아 하이난 침략(海南侵略)을 일으켜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의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광동·광서 지역은 양광사변(兩廣事變)으로 장제스(蔣介石)가 주도하는 '난징 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에 대항하여 반장 세력이 주도하던 '광저우 국민정부'(廣州國民政府)가 성립해 대립하던 시점이었다.

최후의 '신민정 체제(新民政體制)'였던 진대영 내각(陳大寧內角)은 중국과의 쓸데없는 마찰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했다. 그 이유는 불필요한 외부 분쟁을 늘리면 늘릴수록, 중국이 국난 타개와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내부의 문제를 봉합한 뒤 공동으로 대화향국(大花鄕國)에 대항할 구실을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군부는 이러한 '소극적' 외교책에 반발하여 4월 위기(四月危機)를 일으켜 군인 내각(軍人內角)을 수립시켰고, 주하이 사건(珠海事件)[1]을 조작하여 중화민국 국민정부(中華民國 國民政府)측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끝내 주하이 시장이 굴복하여 화향의 요구를 수락했으나, 군인 내각은 요구의 수락 여부와 관계 없이 육전대(陸戰隊)를 상륙시켜 광둥성·광서성 일대에 화향 국민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주장을 제시했다.

얼터당토않은 요구에 진의 파악을 위해 접근하던 중국은 19로군(十九路軍) 예하의 총 3만 명으로 구성된 78사단을 광둥성 주요 시내 일대에 배치하여 참호(塹壕)와 토치카(特火點, 특화점), 지뢰지대를 건설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에 화향군은 방어 시설 확충을 빌미로 사태 확장을 꾀하고 있었으나, 반일 군사 세력이 많았기 때문에 화향 입장에서는 아직 광둥성 일대로 진출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각주

  1. 화향인(花鄕人) 2명이 주하이 시내를 걷던 중, 괴한의 습격으로 인해 한 명은 중상을, 다른 한 명은 사망한 사건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