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동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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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대한국 표 (LB) 대한국(한국어: 大韓國)은 1872년, 조선(朝鮮) 제26대 왕 고종(高宗)이 조선국왕(朝鮮國王)의 칭호를 폐지한 후, 대군주(大君主)를 칭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국으로 개칭하면서 세워진 국가이다. 1871년, 신미통상조약(辛未通商條約)을 체결한 이후 전제군주정(專制君主政)에 입각한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을 표방하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条約)을 체결함에 따라 은 대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폐기한 후 국권수호조약(國權修好條約)을 체결하여 동아시아 삼국간의 대등한 관계를 수립한 후, 이듬해의 고종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통해 제정을 선언하게 되었다.

배경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를 거친 조선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통치 아래 쇄국 체제가 강화되고 있었다. 그는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 기간이 마무리되자 막후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실세를 거머 쥔 그는 양전 사업과 호포제(戶布制)를 통해 국가 재정을 확충하였으며,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해 문란했던 민정을 혁파했다. 그외에도 서원철폐 등의 왕권 강화와 조선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병인박해(丙寅迫害)를 통해 병인양요를 거친 이후 그는 천주교(天主敎)와 서양 열강에 대한 접촉에 대한 회의심을 가졌으나,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1866년에 급사함에 따라 진정한 의미로서의 고종의 친정이 실시되면서 서양에 대한 개화와 근대화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가게 되었다. 고종은 대원군이 경복궁(景福宮) 중건을 위해 유통한 당백전(當百錢)과 청전(請錢)을 폐지하고 민승호(閔升鎬), 민겸호(閔謙鎬) 등의 여흥 민씨(驪興 閔氏) 세력과 이최응(李最應), 김병학(金炳學)과 같은 대원군 반대파를 포용하면서도 박규수(朴珪壽), 이경하(李景夏)와 같은 대원군을 지지하던 대신들도 조정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이는 등 정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1]

1868년,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생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파헤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프로이센 왕국과의 통상 수교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를 이야기하여 마무리를 지었으나, 서구 열강에 대한 조정과 민중의 인식이 일시적으로 약화되기도 했다.[2]

각주

  1. 그럼에도 여흥 민씨에 기인된 민씨 정권이 사실상 군림하게 되는 세도 정치의 형세를 보이게 되었다.
  2. 이후 오페르트의 바램과는 다르게 조선 조정에 의해 그는 영사관으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으며, 공무원을 사칭하여 외교 마찰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본국에서 실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